수영장에서 찾은 주말의 자유

오세연 영화감독 2023. 8. 19.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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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주말]
[오세연의 취미 찾기] 왕초보 레인에서
일러스트=비비테

왜 나는, 아니 왜 나만 다음 레인으로 넘어가지 못하고 있는 걸까? 이유는 하나다. 너무 못하니까. 왕초보용 레인에서의 미션은 킥판을 잡고 발차기를 하며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몇 번 해보면 다 되는 것이어서 선생님이 굳이 내 옆에 서서 말을 얹지도 않는다. 그런데 나는 이상하게도, 레인의 절반쯤 가면 아무리 열심히 발차기를 해도 멈춘다.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다. 그러면 바닥을 짚고 일어섰다가 다시 출발하는 수밖에 없다.

그것만이 문제가 아니다. 앞으로 잘 나아가는 듯하다가, 어느 순간부터 앞이 아닌 옆으로 가게 된다. 분명히 내 몸인데, 물속에 있는 순간은 통제할 수가 없다. 누가 보면 바다 수영이라도 하는 줄. 바람 한 점 불지 않는 수영장에서 파도에 휩쓸린 사람처럼 왼쪽으로 오른쪽으로 떠밀려가다 어딘가에 부딪히기 일쑤다.

실수를 하고 물속에 우뚝 선 채로 살짝 선생님 눈치를 보면, 대부분은 초급반 수강생들을 지켜보느라 내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모르고 넘어가셨지만 어떤 때는 심각하게 굳은 표정으로 나를 가만히 바라보고 계셨다. 사람 좋은 미소로 상황을 무마하고자 물속에 머리를 파묻으려 하면, 선생님은 한숨을 쉬며 몇 가지 조언을 해주셨다. “허벅지를 움직여야 앞으로 나아간다” “배에 힘을 줘야 중심이 기울어지지 않는다” 뭐 이런 말씀들. 머리로는 이해가 되는데 왜 몸은 말을 듣지 않는가. 나 몸치였나. 뭐 이런 생각을 하다 보면 시간이 잘도 간다. 그 와중에 마지막 10분간은 선생님의 가르침이 체화되는 듯하지만, 며칠 뒤 다시 수영장에 돌아오면 다 까먹고 물속에서 숨 쉬는 법부터 다시 해야 한다.

수영을 시작한 건 순전히 재미있게 할 수 있는 취미를 찾기 위함이었지만, 막상 시작해보니 넘어야 할 관문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자유 수영을 할 수 있는 토요일엔 선생님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되니까, 기필코 열심히 연습해서 꼭 다음 단계로 넘어가리라 다짐하며 숨을 꾹 참고 입수했다. 물을 잔뜩 튀기며 발차기를 하다 마침내 레인의 끝에 가까워진 그때, 분명히 나 혼자 쓰고 있던 왕초보용 레인에 누군가 있는 듯했다. 더 가다간 부딪힐 것 같아서, 그 자리에 멈춰 섰다. 물에 젖은 수경을 살짝 들어올리고 보니, 다른 레인에서 착실히 수영하던 아저씨가 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누워’ 있었다. 킥판 두 개를 겹쳐 베개처럼 만들고는 그 위에 머리를 대고, 몸 어디에도 힘을 주지 않고 물에 몸을 맡긴 것이다.

당혹스러웠다. 어이가 없었다. 여길 어떻게 지나가야 하나. 아저씨는 날 보고도 모른 척하시는 건지, 잠깐의 흐트러짐도 없이 누워 있었다. 그러다 이따금 팔과 다리를 휘적였다. 수경을 쓰고 계셔서, 눈을 감고 있는지 뜨고 있는지 알 수도 없었다. 한참 열을 올리며 수영을 하는 중에 마주한 장애물에 말문이 막혀 서 있는데, 어느 순간 짜증이 가라앉고 웃음이 나왔다. 옆으로 죽 늘어선 다른 레인에선 첨벙대는 소리만 들려오는데, 이곳엔 누워 있는 이와 서 있는 이뿐이라니. 편안하게 누워 있는 아저씨를 뒤로하고, 왔던 길로 방향을 틀어 수영을 했다. 긴 레인의 절반을 아저씨와 내가 나눠 쓰는 것으로, 마음속으로 합의를 봤다.

선생님이 계셨다면 곧바로 제지당했겠지만, 뭐 어때, 토요일인데. 아저씨는 그렇게 한참을 누워 있다가 강습 시간 종료를 알리는 호각 소리를 듣고 일어나셨다. 어쩌면 물 위에 누워 쉬는 것이야말로 진짜 자유 수영 아닐까. 수영까지 ‘잘’하려고 애를 쓰던 나 자신이 조금은 우습게 여겨졌다. 내 앞길을 가로막은 아저씨 덕에 수영의 진짜 재미가 무엇인지, 내가 취미를 찾는 이유가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해본다. 왕초보용 레인을 벗어나지 못하더라도 그 시간을 즐길 수 있다면, 그걸로 괜찮을 것 같다. 그래도, 다음 주말에는 아저씨가 다른 레인에 누워 계셨으면 좋겠다. 레인의 끝까지 멈추지 않고 내 힘으로 닿아보는 경험을 꼭 해보고 싶다. 웃으면서, 즐기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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