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난경보, 이해도 대응도 어렵다”…이주민에게 멀기만 한 재난안전권
폭염주의보가 내린 지난 8일 오후 경기 포천의 한 채소농장. 네팔을 떠나 한국에 온 지 7개월째인 니르말(가명·30대)이 체감 온도가 40도에 육박하는 비닐하우스에서 일하고 있었다. 갑자기 그의 휴대전화에서 요란한 소리가 울렸다. “폭염 특보가 발효됐으니 뙤약볕 아래서 무리한 논밭일과 야외활동은 자제해주세요.” ‘폭염주의보’를 알리는 재난문자였다.
니르말은 ‘발효’나 ‘뙤약볕’이 무슨 뜻인지 몰랐다. 요란한 소리와 진동이 무엇인가를 ‘경고’하는 신호일거라 어렴풋이 생각했지만 ‘날이 더워서 그런가보다’ 하고 넘겼다. 설혹 더위를 경고하는 신호인줄 알았다고 해도 생수병을 들이키는 것 말고는 딱히 더위를 피할 방법도 없었다. 오전 6시부터 오후 6시까지, 점심시간 외엔 별도 휴게시간 없이 일해야 하기 때문이다.
기후위기로 폭염·폭우 등 이상 기후가 심해지지만 니르말을 비롯한 이주노동자들은 재난 경보의 사각지대에 방치돼 있다. 이들은 재난 문제를 “9시 뉴스에서 나오는 것 같은 말”이라고 한다. 일상에서 자주 쓰지 않는 생소한 어휘가 많다는 것이다.
행정안전부는 긴급재난문자를 영어·중국어로 번역해 제공하는 ‘Emergency Ready App’ 서비스를 운영 중이지만 캄보디아·태국·미얀마 등 비영어·비중국어권 국가 출신 이주노동자들과는 무관한 얘기다. 이주노동자를 지원하는 샬롬의 집 관계자는 17일 “이주민들이 ‘폭염’이라는 단어조차 잘 알지 못한다”면서 “한국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언어 소통이 어려울수록 재난 안전 경보에 취약한 상황”이라고 했다.
미등록 이주 노동자의 경우는 더하다. 본인 명의로 국내 전화번호를 만들지 못해 경보 울림조차 받기 어렵다. 김이찬 지구인의정류장 대표는 “(미등록 이주민들은) 전화번호가 없어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어떤 일이 있는지 간신히 파악하기도 한다”면서 “어느 지역에서 산사태가 났는지, 침수됐는지 일일이 알기 어려워한다”고 했다.
이주민 지원 단체들은 이주노동자들이 재난 상황에서도 고용주 지시를 따라야 해 능동적으로 대피하기 어려운 점도 문제라고 했다. 고용허가제는 사업주가 체류기간을 연장해줄 수 있게 돼 있다. 이들에게 밉보일까봐 폭염 속 휴식시간이나 호우 속 대피장소를 요구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김 대표는 “한국 내 이주민들은 임금을 받지 못할 때도 항변하기 어려워한다. 그런 마당에 재난에 대비할 권리나 지원은 부차적인 일로 느낀다”면서 “지난 폭우 때 경기 이천과 안성 인근 저지대에서 농경지 침수가 발생했다. 비닐하우스에서 숙식하던 이주노동자들은 사업주에게 출근 여부를 묻는 것조차 어려워했다”고 했다.
포천이주노동자센터에서 활동하는 김달성 목사는 “근본적 문제는 재난경보 문자가 아무리 많이 오더라도 사업주가 농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에게 단 10분의 쉬는시간도 주지 않는다는 것”이라며 “이주노동자들은 철저한 갑을관계 안에서 쉬고 싶어도 일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이주노동자 지원단체들은 지방자치단체와 외국인 고용센터가 이주노동자의 노동실태를 파악해야 한다고 했다. 김 대표는 “담당 외국인고용센터가 사업장을 알선해 준 노동자에 대해 극한 기후 속에서 일하고 있는지 추적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김 목사는 “지방자치단체는 재난경보 문자만 보내는 데 그치지 말고 폭염 속 휴게시간을 주지 않는 사업주를 단속·제재해야 한다”고 했다.
김송이 기자 songyi@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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