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간 포착한 빼어난 이미지[김정수의 시톡](24)

2023. 8. 15. 0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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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호 시인 디카시집 <도나 노비스 파쳄>

아파트 주차장을 지나면 화단이 있습니다. 국화를 심은 화단에는 접시꽃 한 그루가 우뚝 서 있지요. 한데 국화 옆에 뽑아놓은 잡초가 수북하더군요. 순간 접시꽃 혼자 살아남았다는 생각이 스쳤고, ‘험한 손길에도 혼자 살아남았구나. 참 외로웠겠다. 곁의 비명에 얼마나 힘들었을까’라는 문장이 떠올랐습니다. 얼른 휴대전화로 사진을 찍었지요. 이것이 바로 ‘디카시’입니다. 디카시는 디지털카메라와 시가 결합한 새로운 문학 장르입니다.

리호 시인(왼쪽)과 표지. /실천



숫자가 의미하는 것

2014년 ‘실천문학’ 제3회 오장환신인문학상으로 등단한 리호(1969~ ) 시인은 첫 시집 <기타와 바게트>에 이어 3년 만에 디카시집 <도나 노비스 파쳄>을 냈습니다. 도나 노비스 파쳄(Dona nobis pacem)은 ‘우리에게 평화를 주소서’라는 뜻의 라틴어입니다. 4부에 수록된 시 ‘도나 노비스 파쳄’에는 강가 큰 돌 위에 아슬하게 서 있는 길쭉한 돌 사진과 “헤이 준// 6.23 7.24/ 반짝이던 두 별이 등 돌리고 뛰어갔다”라는 문장이 나란히 수록돼 있습니다. 사진에서는 길쭉한 돌이 강 건너에 닿은 것처럼 보입니다. “헤이 준”은 “등 돌리고 뛰어”가는 아이들을 부르는 소리일 것입니다. 과거형 “반짝이던”과 “등 돌리고 뛰어갔다”는 것으로 봐서 서둘러 뛰어간 두 별을 그리워하는 시라 할 수 있습니다. “6.23”과 “7.24”는 두 아이의 생일이겠지요. 시 ‘하지’에는 버려진 앉은뱅이저울 위에 가로로 2개, 세로로 1개의 돌이 올려져 있습니다. 시인은 이를 “고장 난 저울 위에 쌓인/ 그리움의 무게”라 표현했고요. 제목이 ‘하지’인 것은 6월 23일에 가장 가까운 절기이기 때문일 것이고, 저울 눈금은 7.24㎏에 맞춰져 있습니다. 그리움의 무게는 달라지지 않습니다.

날짜는 시 ‘그대로 있으라’와 ‘핼러윈, 오상의 비오’에도 등장합니다. 세월호와 이태원 참사를 다룬 시입니다. ‘도나 노비스 파쳄’과 ‘하지’가 개인적 슬픔이라면, ‘그대로 있으라’와 ‘핼러윈, 오상의 비오’는 사회적 참사를 다루었습니다. ‘그대로 있으라’는 거리에 수북이 쌓인 벚꽃잎을 “빨간 틴트를 가지고 싶다던 아이와/ 하얀 핸드폰을 가진 아이들”이 “꽃처럼 진 날 4.16”이라 했습니다. 하얀 꽃잎과 붉은 꽃받침을 틴트와 휴대전화로 비유했습니다. ‘핼러윈, 오상의 비오’는 페인트 벗겨진 벽 문양이 나무를 닮은 사진에 “22,1029,159개의 심장을 가진/ 나무가 되었으면 해// 해가 지지 않는 별에서 달콤하게 웃었으면 해”라는 소망을 드러냅니다. 숫자 “22,1029,159”는 2022년 10월 29일에 희생된 159명을 뜻합니다. 오상(五傷)은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을 때 입은 다섯 군데의 상처를, 라틴어 비오(Pius)는 ‘자비로운 이’를 의미합니다.

한 발 뒤에서 보는 세상

시인은 꾹꾹 울음을 참으며 신을 호명합니다. 신에 의지하지 않으면 ‘마음의 평화’를 얻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빗물이 흘러내리는 유리창에서 “우기에만 등장하는 예수”와 “투명 가면 속 마블”을 포착한 시 ‘지킬 앤 하이드’에서는 인간의 내면에 선과 악이 공존함을 은연중 표출합니다. 한데 신은 항상 우리 주위에 있는 게 아니라 우기에만 잠깐 다녀갑니다. 인간사에는 별로 관심이 없는 듯합니다. 고통을 이겨낼 단단함과 희생을 통한 겸허와 베풂으로 인간을 인도하고자 했다면, 신은 참 잔인합니다.

시인의 직업은 사서 선생님입니다. 한 중학교 도서관에 근무하지요. 시집에 학생들이나 학교가 빠질 수 없겠지요. 비 온 뒤 학교 창문 밖 난간에 맺힌 빗방울이 들어옵니다. 제목이 ‘교감 선생님’입니다. 빗방울 2개가 교감 선생님 눈(안경)처럼 보였나 봅니다. “교복 치마가 너무 짧아/ 퍼머나 염색한 거 아니지?” 잔소리만 하는 건 아닙니다. “그런데/ 우산은 가져왔니” 따스한 한 마디도 건넵니다. 시 ‘수능 모의고사’는 잔가지 우거진 나무 사진에 “3교시 수학// 내일은 머리 감자”라 합니다. 수능 모의고사, 그것도 어려운 수학 문제를 푸느라 움켜줘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잘 표현했습니다. 시 ‘중2병’은 축대벽 좁은 배수구에 난 나무 사진에 “어디로 튀든 좋으니/ 건강만 하”라고 합니다. 옹색한 환경에서 자라는 나무를 사춘기의 불만이나 반항에 빗대었지요. 또 시 ‘1교시 영어 시간’은 거미줄에서 가만히 있는 무당거미 사진과 “공부 중”이므로 “말 시키지” 말라고 합니다. 먹잇감을 기다리는 무당거미가 공부를 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하긴 공부도 먹고사는 것과 밀접한 관련이 있으니 틀린 말은 아닙니다.

가장 돋보이는 시는 맨 앞에 놓인 ‘투영’입니다. 제4회 디카시작품상을 받은 이 시는 “한 발 뒤에서 다시 보면/ 온몸으로 봄을 싣고 날아가는/ 새 한 마리”를 표현했습니다. “사물과 새와 봄이 찰나에 한 호흡의 멀티 메시지가 돼 단숨에 굳은 관념을 깨치며 살아서 날아가는 형상을 연출한 우수한 작품”이라는 평가를 받았지요. 적당한 거리라야 돌과 돌 사이에서 새를 포착할 수 있습니다. 가깝거나 멀면 새는 돌 속으로 숨어버리지요. 놀라운 건 투영된 새의 몸에 연출된 봄 이미지입니다. 오홍진 문학평론가는 해설에서 “마음 가득 봄기운을 싣고 어딘가를 향해 날아가는 새 한 마리를 통해 시인은 봄기운 가득 품고 사방을 둘러보는 또 다른 존재를 상상한다”며 “그 존재는 물론 시인=사람에 한정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날아가는 새와 봄의 생명력을 순간적으로 포착하고 글과 사진으로 담아낸 빼어난 작품입니다. 중요한 것은 새를 볼 수 있는 적당한 거리입니다. 슬픔과 기쁨, 절망과 희망, 빛과 어둠을 적당한 거리에서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의 준비가 필요하겠지요. 부디 마음에 평화가 찾아오기를 바랍니다.



도나 노비스 파쳄
헤이 준
6.23 7.24
반짝이던 두 별이 등 돌리고 뛰어갔다



투영
한 발 뒤에서 다시 보면
온몸으로 봄을 싣고 날아가는
새 한 마리

◆시인의 말

▲나는 참 어려운 나
조항록 지음·달아실·1만원



나의 삶에서 나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명료하게 구분하지 못한다.
삶의 시제가 뒤엉킬 때마다
나는 표정을 지우고,
가끔 허공에 시를 썼다.

▲이 차는 어디로 갑니까
오성인 지음·걷는사람·1만2000원



어른이 되려면 슬픔을
먼저 이해해야 했다.
슬픔을 외면한 대가로
불면에 시달릴 때마다 아직 꺼내 놓은 적 없는 죄책감들을 뒤적였다.

▲은근슬쩍 얼렁뚱땅
신현복·북인·1만1000원



시 쓰기는 추수 끝난 들판에서 벼이삭을 줍듯 사람 사이에, 자연 속에, 사물 틈에 흩어져 있는 사유의 이삭을 관심 갖고 살펴 찾아 모으는 일이다.

김정수 시인 sujungihu@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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