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절에 생각하는 3명의 지식인...리영희·신영복·변형윤 [송의달 LIVE]

송의달 에디터 2023. 8. 15. 0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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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8회 광복절 특집 [코리아 프리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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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광복 78주년이자, 대한민국 건국 75주년일입니다. 우리나라는 2차 세계대전후 신생독립국 중 유일한 ‘30·50클럽’(1인당소득 3만달러에 인구 5000만명) 국가입니다. 동시에 우리는 세계적으로 유례없는 정치·이념·사회적 양극화를 겪고 있습니다. 이러다간 한국이 중후진국으로 다시 추락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옵니다.

제78회 광복절을 하루 앞둔 2023년 8월 14일 낮 서울 서대문형무소역사관 벽에 게양된 대형 태극기 앞에서 학생들이 태극기를 들고 퍼포먼스하고 있다./뉴시스

눈부신 발전 뒤켠에서 우리가 지독한 혼란과 분열을 겪는 데는 국민들의 의식과 판단에 영향을 미친 일부 지식인(知識人)들 탓이 적지 않습니다. 우리가 진정한 선진국으로 도약하려면 이들의 행적을 조명하고 정리하는 작업이 필요합니다. 고인(故人)이 된 세 명의 교수들(이하 경칭·敬稱 생략)을 살펴봅니다.

◇親中主義 정치 선전물 쓴 리영희

먼저 한국 좌파 진영에서 ‘우상을 깬 사상적 전환의 스승’, ‘민주화운동 의식화의 은사(恩師)’로 추앙받고 있는 리영희(李泳禧·1929~2010)입니다. 그는 평북 운산군에서 태어나 1950년 국립해양대 졸업후 영어 교사로 근무하다가 6·25 전쟁 중 군에 입대해 7년간 통역 장교로 복무했습니다. 제대후 합동통신 외신부 기자, 조선일보 외신부장으로 일했고 1968년 7월부터 1971년까지는 합동통신 부장이었습니다. 이듬해 한양대 문리대 교수로 옮겼고 1976년부터 8년간 해직후 복직해 1995년 정년 퇴임했습니다.

리영희 전 한양대 교수/조선일보DB

리영희가 남긴 가장 큰 유산은 중국공산당과 중국 현대사에 대한 왜곡(歪曲)입니다. 1974년과 1980년에 각각 낸 저서 <전환시대의 논리>와 <우상(偶像)과 이성(理性)>, 1977년 마오쩌둥(毛澤東) 사망후 그를 찬양한 일본과 구미의 좌파 지식인들이 쓴 글들을 번역해 낸 <8억인과의 대화> <10억인의 나라>에서입니다. 이 네 권의 평론집·번역서는 한국인들의 뇌리에 잘못된 ‘중국 환상(幻想)’을 심었습니다.

지금 그의 저작들을 읽어보면 금방 졸속(拙速)임을 깨닫게 됩니다. 사유의 깊이, 논증의 체계, 자료의 신빙성 등 모든 면에서 낙제점을 면하기 힘든 엉성한 친중주의(親中主義) 정치 선전물에 불과합니다.

예를 들어 리영희는 1976년 7월 28일 중국 허베이(河北)성 탕산(唐山)에서 발생한 대지진과 뉴욕 정전(停電) 사태를 비교하며 “탐욕에 물들어 약탈이나 하는 미국인들보다 중공 시민들의 시민수준이 높다”며 이를 사회주의와 마오쩌둥 문화혁명 체제의 우수성이라고 칭송했습니다. 1980년대 대학가에서 가장 많이 읽힌 책 중 하나인 <우상과 이성>의 제3장 ‘현대 중국의 이해’에서 그는 이렇게 주장했습니다. (※쪽수 표시는 1980년 개정판 기준)

<우상과 이성>은 리영희 전 교수의 대표작 중 하나이다.

“마오쩌둥 사상의 본질은 인간주의이므로 서구식 인권이나 민주주의의 기준으로 평가해선 안 된다”(90~98쪽)

“중국 혁명은 물질 생산보다 인간의 평등, 능률 향상보다 인간의 소외를 해소, 극복한다는 데 중점을 두었다.”(93쪽)

“마오쩌둥은 양쯔강에서 수영하고 극장 속에서 군중에 섞여 경극을 감상하고, 행사 때에는 군중 속에 섞여 들어가는 것으로 신격화(神格化)라면 신격화를 완성했다.”(108쪽)

리영희 전 교수의 저서. <8억인과의 대화>와 <전환시대의 논리>/송의달 기자

◇마오쩌둥·중공·문혁 ‘진실’ 외면하고 美化만

리영희는 <8억인과의 대화>에서는 소련 경제사 전문가인 기쿠치 마사노리(菊池昌典) 도쿄대 교수가 1967년 중국을 관찰한 뒤 1971년에 쓴 글을 소개하면서 “마오쩌둥은 스탈린과 달리 사람은 죽이지 않는다고 단언했다”(330쪽)고 전했습니다. 문화혁명(1966~76년)이 진행 중이던 때 일본인 교수가 잠깐 보고 와서 쓴 글을, 리영희는 문화혁명 종료 1년이 지난 시점(1977년)에 수정도 없이 ‘중국의 진실(眞實)’이라고 소개한 것입니다.

실상은 어떤가요? 마오쩌둥이 1958년부터 62년까지 벌인 대약진운동으로 중국인들은 대규모 집단농장에서 일하는 국가 농노(農奴)가 됐습니다. 5년여 동안 굶거나, 맞거나, 일하다 지쳐 숨진 인원만 3000만~4500만명이라는 게 세계 학계의 일치된 연구 결론입니다. 캐나다 맥마스터대학에서 10년 넘게 ‘문화대혁명’ 세미나 강의를 하는 송재윤 교수는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문화혁명 기간중 벌어진 비투(批鬪) 대회 모습. 'X' 표시는 해당자가 사형 집행 대상임을 알려준다./사진출처=李振盛, <紅色新聞兵>·조선일보DB
1968년 4월 5일 하얼빈시 교외 모습. “반혁명 집단 주범” “살인범” 등의 죄목 아래엔 “사형 판결 즉각 집행”(判處死刑, 立卽執行)이라는 구호가 적혀 있다./사진출처=李振盛, <紅色新聞兵> 197쪽

“중국공산당 중앙이 2년 7개월에 걸친 조사와 검증을 통해 1984년 5월 발표한 자료를 보면, 문혁(文革) 10년 동안 172만8000여 명이 비자연적 원인(집단 린치, 테러 등 포함)으로 사망했다. 13만5000여명은 사형에 처했고 703만여명이 부상을 당하거나 회복 불능의 불구가 됐다. 또 7만여호의 가정이 파괴됐다. 억울하게 죽임 당한 사람을 포함하면 피해자가 2000만명에 달한다는 주장도 있다.”

◇한국 좌파의 ‘崇中·從北' 논리 제공

리영희는 덩샤오핑(鄧小平) 등장의 역사적 의미도 오독(誤讀)했습니다. 덩의 개혁·개방이 본격화된 1983년 출간한 <10억인의 나라>에서, 그는 덩샤오핑 노선을 부정하는 프랑스 학자의 입을 빌어 울분을 드러냈습니다.

“현 중국지도부(덩샤오핑)는 역사에 의해 사형을 선고받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모든 수정주의의 역사가 그러하듯 그들도 결국은 패배를 면하지는 못하리라.”(54쪽)

덩샤오핑은 문화혁명 시절에 발생했던 “억울하고 거짓되고 그릇된 사안들(冤假錯案)”을 모두 바로 잡는 평반(平反) 운동을 설계·실행했다.덩샤오핑이 1970년대 연설하고 있는 모습./조선일보DB

리영희는 “6·25는 민족의 독립통일을 위한 거사”라는 논리를 펴며 “남한은 혼란과 폭력이 난무하는 약육강식의 사회”라고 했습니다. 관념론적 친중(親中)에다 친북(親北) 성향까지 장착한 그는 좌파 진영의 숭중(崇中·중국 숭상)과 종북(從北·북한 추종) 사고의 토대를 제공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일제(日帝)때 고위 공무원의 아들이자 평북 출신 거부(巨富)의 외손자였습니다. 리영희는 자신의 배경과 정반대 노선을 걸으면서 생전에 자기 잘못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아쉬운 것은 우파 진영이 좌파 지식인·언론의 ‘리영희 보위(保衛) 및 신격화’를 방관했다는 점입니다. 마오쩌둥의 반(反)인륜적인 폭압·살상 같은 해악(害惡)을 기록한 문헌들이 켜켜이 쌓여 있는데도 말입니다.

신영복 전 성공회대 교수/조선일보DB

◇통혁당 간첩에서 성인군자된 신영복

두 번째는 1988년 9월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을 쓴 신영복(申榮福·1941~2016)입니다. 부산상고와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한 그는 육군사관학교에서 경제학 교관으로 재직 중이던 1968년 통일혁명당(統一革命黨·이하 통혁당) 사건으로 구속됐습니다. 무기징역형을 선고받았다가 전향서에 서명해 20년 20일 복역하고 1988년 광복절 특별가석방으로 풀려났습니다.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은 그가 쓴 230장의 편지와 삽화 등을 담은 책입니다. 처음에 306쪽이던 분량의 책은 2019년 판에는 486쪽으로 늘었습니다. 청년들 사이에 인기를 모아 출간 10주년인 1998년 8월부터 2012년 4월까지에만 60쇄 정도 팔렸습니다. 일각에선 ‘시대의 고전(古典)’, ‘민족의 고전’으로 불렀습니다.

신영복 전 교수의 대표작인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이 책에는 그러나 통혁당의 실체(實體)는커녕 그와 관련된 얘기는 눈을 씻고 찾아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북한 주체사상(主體思想)을 지도이념으로 삼고 공산주의 건설에 목숨 건 사람의 글이라곤 상상도 못합니다. 감옥에서 고난의 날을 보낸 사람이 쓴 순수한 에세이, 즉 ‘수형서간문학(受刑書簡文學)’의 전형으로 비쳐집니다. 내용은 이렇습니다. (※쪽수 표시는 2008년판 기준)

“괴롭고 서글픈 하루의 마지막을 알리는 취침 나팔소리마저 자지러지고 나면 이 8호 감방에도 이윽고 무덤 속 같은 정적이 찾아든다. 내일 아침 기상 나팔소리가 칼끝같이 이 정적을 쪼갤 때까지 여기 감방은 그대로 하나의 무덤이 된다.”(55쪽)

“아버님의 ‘태백산 등반기’를 읽고 저희들은 아버님의 등산 실력에 경탄을 금치 못하였습니다.(중략) 이곳의 저희들은 열리지 않는 방형(方形)의 작은 공간 속에서 내밀한 사색과 성찰의 깊은 계곡에 침좌(沈座)하고 있는 투입니다.” (1977.9.7.편지·115쪽)

“‘나는 걷고 싶다’ 있으면서도 걷지 못하는 우리들의 다리를 깨닫게 하는 그 글귀는 단단한 눈뭉치가 되어 이마를 때립니다. 내일 모레가 2월 초하루. 눈사람도 어디론가 가고 없고 먼 데서 봄이 오는 기척이 들립니다.” (1988.1.30.편지·388쪽)

1968년 통혁당 사건 재판을 보도한 당시 신문 기사

◇문재인 대통령의 ‘각별한 신영복 사랑’

이 책으로 신영복은 ‘통혁당 간첩’이란 이미지를 벗고 인간과 자연을 따뜻하게 바라보고 세상 욕심에 초탈(超脫)한 ‘성인군자(聖人君子)’로 변신했습니다. 이로인해 ‘시대와 사상의 스승’으로 그를 떠받드는 사람들이 생겼습니다. 이 가운데 문재인 전 대통령의 ‘신영복 사랑’은 각별했습니다.

2018년 2월 평창동계올림픽 개막식 리셉션에서 그는 “한국 사상가 신영복을 존경한다”고 했고, 2021년 6월에는 국가정보원의 원훈석(院訓石)을 신영복 글씨체로 바꾸었습니다. 2012년 그가 출마한 대통령 선거 구호인 ‘사람이 먼저다’와 더불어민주당 당명(黨名)의 ‘더불어’도 신영복의 작품입니다.

문재인(사진 맨왼쪽에서 다섯번째) 전 대통령이 2021년 6월, 국가정보원에서 박지원 국정원장 등 참석자들과 '신영복 글씨체'로 제작한 원훈석 제막식을 가진 후 박수치고 있다./뉴시스
2018년 2월 10일 문재인 당시 대통령과 김여정 북한 노동당 중앙위 제1부부장이 청와대 오찬에 앞서 고(故) 신영복 성공회대 교수와 민중미술 판화가 이철수씨의 서화(書畵) 작품을 배경으로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배경 왼쪽은 신영복 교수가 쓴 '通(통)' 글씨, 오른쪽은 이철수씨의 한반도 그림이다./조선일보DB

그런데 신영복은 정작 한 번도 자신이 북한의 지령(指令)을 받은 간첩이었다는 사실을 부인(否認)하지 않았습니다. 범민련 남측본부 사무처장 출신으로 좌파에서 우파로 전향(轉向)한 민경우 대안연대 상임대표는 이렇게 말합니다.

“통혁당은 수많은 친북(親北) 성향의 지하당 운동 중 가장 중요한 조직이다. 신영복은 통혁당 넘버 2인 김질락에 포섭되어 통혁당 산하 조국해방전선에서 활동했을 뿐 아니라 청와대를 대포(大砲)로 포격하려는 ps(from paper to steel) 계획을 입안한 사람이다. 그는 통혁당의 단순가담자가 아니라 통혁당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했던 사람이다.”

1968년 드러난 한국내 통일혁명당 조직도

◇‘신분 세탁’ 도와준 한국 우파

1998년 김대중 정부때 사면복권돼 성공회대 교수가 된 신영복은 월간 ‘말’지와의 인터뷰에서 “통혁당 가담은 양심의 명령 때문이었다. 난 사상을 바꾼다거나 동지를 배신하는 일은 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그의 사상전향서 서명은 가석방을 위한 전술적 후퇴일 뿐이라는 ‘진실 고백’입니다. 이응준 작가는 이렇게 지적합니다.

“김일성은 월남 패망 뒤 사이공(지금의 호치민시)에 억류된 한국 외교관들과 신영복을 맞교환하려 굉장한 노력을 했다. 그때 그를 북한으로 보냈다면 좋았을 것이다. 무엇보다 신영복이 북한에서 혁명하다가 체포됐다면 20년 20일 만에 특별가석방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신영복은 넬슨 만델라가 아니고 김지하(金芝河)도 아니다. 주사파(主思派) 운동권들이 1987년을 거치며 민주화운동가로 신분 세탁을 하는 요술의 중심에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이 있다.”

2022년 12월 출간된 <신영복을 존경하세요?>는 통혁당 혁명가인 신영복이 ‘문화적 상징’으로 둔갑한 과정을 본격 추적했다.

신영복은 출옥 후 “미국이 한국의 은인(恩人)이라는 환상을 청산하고, 미국이 한국에 친미적 분단 정권을 창출하고 미국 경제의 하위 경제구조를 편성한 나라라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는 식의 주장을 했습니다.

우파 진영은 신영복의 참모습을 치열하게 해부하지도, 그에 맞서지도 않았습니다. 보수 언론들 조차 그의 감상적인 글을 장기 연재하고 인터뷰와 상(賞)으로 그를 ‘양심적 지식인’으로 분장(扮裝)시켜 주었습니다. 지금 대한민국 학술·문화계를 좌파가 장악하고, 우파는 몰락한 것은 그런 치명적 오판(誤判)의 대가(代價)입니다.

변형윤 전 서울대 교수/뉴스1

◇서울대 상대 47년 ‘터줏대감’ 변형윤

세 번째는 영국 신고전학파 경제학자인 알프레드 마샬의 ‘냉철한 머리와 따뜻한 마음(cool heads but warm hearts)’을 신봉하는 변형윤(邊衡尹·1927~2022)입니다. 황해도 황주 출신인 그는 1945년 서울대 상대의 전신(前身)인 경성경제전문학교에 입학해 1992년 교수로 정년퇴임할 때까지 47년 동안 서울대 경제학과에 몸담은 터줏대감이자 산증인입니다.

그는 <한국 경제의 진단과 반성>(1980년), <분배의 경제학>(1983년) <냉철한 머리 따뜻한 마음>(1986년) 등의 저서를 통해 ‘인간 중심 경제학’을 표방했습니다. 변형윤은 1960년 4·19 당시 서울대 상대 교수 중 유일하게 ‘교수단 데모’에 참여했고 그해 9월 서울대 상대 교무과장에 임명됐습니다.

그후 그는 선별 수리를 통해 20여명의 교수 중 15~16명을 내보내고 빈 자리를 진보성향 연구자들로 채우는 ‘변형윤 혁명’을 일으켰습니다.

변형윤 전 서울대 교수 사진을 담은 변형윤 회고록 <학현일지> 표지. 2019년 출간됐다.

그의 제자인 정운찬 전 총리는 “1960년대 이후의 서울대 상대는 완전 변형윤 동문 작품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고 경기고 동창회보(1992년 6월 10일자)에 적었습니다. 1970년부터 75년까지 6년 동안 서울대 상대 마지막 학장을 지낸 변형윤은 자서전 <학현일지>에서 “학장(學長) 시절에도 더 개혁적이고 진보적인 교수진을 구성코자 했다”(154쪽)고 했습니다.

그는 그러면서 동아일보 기고문에서 “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은 가능하지 않은 계획이며 신뢰하기 어렵다”(1962년 1월 16일자)고 했습니다. 1968년 2월 착공한 경부고속도로에 대해 변형윤은 서울대 상대 경제학 교수들과 함께 반대성명을 냈습니다. “자가용 가진 사람이 몇 명이나 된다고 농토를 가로질러 길을 내나. 소수(少數)의 부자들이 젊은 처첩(妻妾)들을 옆자리에 태우고 전국을 놀러 다니는 유람로가 될 것”이라는 주장이었습니다.

변형윤 교수의 저서들/송의달 기자
1970년 7월 7일 개통된 경부고속도로 대전 인터체인지에서 박정희 대통령이 탄 차량이 대전~대구 구간의 마지막 준공 테이프를 끊고 첫 시험주행을 하고 있다./조선일보DB

◇1960~80년대 경제개발계획 대부분 반대

여러 저서와 기고문 등에서 그는 “수출 증대 보다 수입 억제가 옳다. 외국인 투자는 한국에 주둔하고 있는 미군과 같은 성격이다. 미국 본국의 명령, 본사의 명령에 따르는 것이기 때문에 문제가 많다. 중화학 공업화 보다 고용 흡수 효과가 큰 농업을 육성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변형윤은 고속도로·창원 중화학공업단지·포항제철 건설 같은 경제 개발 프로젝트에 어깃장을 놓았습니다. 분배 지상주의와 기계적 평등에 집착해 한국인의 잠재력과 기업가정신에 의한 역동적 발전의 가능성을 부정한 것입니다. 현직 언론인 백광엽은 최근 저서 <경제 천동설 손절하기>에서 이렇게 지적했습니다.

“서울사회경제연구소와 한국사회경제학회, 한국발전경제학회에선 공통적으로 변형윤이라는 이름을 만나게 된다. 세 단체 모두 변형윤 교수가 초대 회장을 지냈고 학현연구실 멤버들이 회원의 주축이다. 변 교수는 세 단체의 최대 주주(株主) 격으로 이사장과 명예회장을 두루 섭렵했다. 가히 한국 진보경제학의 ‘숨은 신(神)’이라 부를 만하다.”(160쪽)

현직 언론인인 백광엽씨가 2023년 6월 발간한 책 <경제 천동설 손절하기>. '진보경제학은 어떻게 한국을 망쳤나'라는 부제를 달고 있다.

1980년 봄 ‘지식인 시국선언’에 참여했다가 그해 7월 해직후 4년 만에 복직한 변형윤은 1987년부터 89년까지 서울대 교수협의회 회장을 맡았습니다. 김영삼·김대중 정부 시절엔 한국노동연구원 이사장, 서울시정개발연구원 이사장, 제2건국 범국민추진위 대표공동위원장, 한국외국어대 이사장 등을 지냈습니다.

2006년 7월 6일, 171명의 경제학자가 ‘한미FTA 협상에 대한 경제학자들의 견해’라는 반대 성명을 발표했는데, 79세의 변형윤도 여기에 이름을 올렸습니다. 학자들은 “미국과 FTA를 맺으면 나라가 망한다. 노무현 정부의 최대 국정 실패로 기록될 것이다. 정부 당국자들과 재벌 산하 경제연구소가 앞장서서 대다수 국민의 이익을 내팽개쳤다”고 했습니다. 171명을 대표해 기자회견을 연 6명의 경제학자 중 4명이 변형윤의 직계 그룹인 ‘학현’ 소속이었습니다.

◇한국 진보경제학의 ‘숨은 神’...현실 헛짚어

2006년 11월 22일 오후 한미 FTA 반대 집회에 합류하기위해 서울역을 출발행진하는 시위대가 시청으로 향하고 있다./뉴시스

이들의 비판은 진실과 거리가 멀었습니다. 한미 FTA 발효 직전인 2011년 116억달러였던 한국의 대미 무역흑자는 2016년 233억달러로 5년 만에 2배 늘었기 때문입니다. 2018년 홍영표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는 “만일 한미 FTA를 안 했다면 어땠을까. 사실 소름이 끼칠 정도이다. 노동계와 진보진영은 그때의 교훈을 돌이켜볼 필요가 있다”고 했습니다.

변형윤의 ‘분배 악화’ 경고와 달리 1965년부터 1997년까지 32년 동안 한국의 양극화는 16% 개선됐습니다. 1965년 0.34이던 지니계수(도시 2인 이상 가구)가 1997년에 0.28로 낮아진 것입니다. 변형윤과 그의 제자들에게 ‘따뜻한 마음’은 넘쳤지만 ‘냉정한 머리’는 부족했다는 합리적 의심이 듭니다. 여기서도 우파(右派) 지식인들은 게으름과 타성(惰性)으로 일관했습니다.

한 예로 인구 5000만명이 넘는 OECD 회원국 가운데 한국 보다 양극화가 덜한 곳은 독일 정도이고, 나머지 국가는 모두 한국보다 심각합니다. 이런데도 우파 학자들은 좌파 성향 학자들의 오류를 정면 반박하기는커녕 ‘경제 민주화’ ‘동반성장’ 같은 슬로건 앞에 슬그머니 고개를 숙였습니다.

윤석열 대통령과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부부가 2023년 4월 25일 오후(현지 시각) 미국 워싱턴DC에 있는 '한국전쟁 참전용사 기념관(Korean War Veterans Memorial)'을 함께 둘러보고 있다. 이곳은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해 '함께 피흘린 동맹'을 상징한다./연합뉴스

◇한국지식인들 ‘진실 추구’ 더 매진해야

리영희·신영복·변형윤은 각각 중국, 북한·친북 운동권, 한국 경제에 대한 환상과 궤변을 만들었습니다. 이들로 말미암아 대한민국은 혼란과 분열에 휩싸였고 곧은 길을 멀리 돌아야 했습니다. 학문·사상의 자유를 누리면서 잘못된 진단을 한 학자들을 우리는 최소한 “정의(正義)롭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중국·북한·러시아를 주축으로 한 권위주의적 전체주의 정권들이 발호(跋扈·함부로 날뜀)하는 지금, 우리는 진보로 위장한 위선(僞善)과 달콤한 말[甘言]에 더이상 농락당할 여유도, 이유도 없습니다. 양명학의 창시자인 왕양명(王陽明)은 “천하가 어지러운 것은 학자들이 공부를 안 한 탓(天下不治 學文不立)”이라고 했습니다. 한국의 지식인들이 ‘거짓 배격’과 ‘진실 추구’에 가일층 매진할 때, 대한민국에 진정한 ‘광복(光復)’의 날이 활짝 열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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