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헌 살롱] [1410] 8분 능선의 철학

조용헌 건국대 석좌교수·문화컨텐츠학 2023. 8. 14.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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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의 금강대(金剛臺), 영신대(靈神臺), 노장대(老將臺), 영랑대(永郎臺) 같은 해발 1000m 이상의 기도처를 돌아다니다 보니까 곳곳에 빨치산 루트가 있었다. 빨치산이 선호한 산길은 대개 8분 능선쯤에 있었다. 능선 위가 아니었다. 능선 위로 다니면 드러나서 토벌대의 총에 맞기 쉬웠기 때문이다. 꼭대기보다는 약간 아래쪽인 8분 능선의 철학. 벼슬에도 8분 능선이 있다.

조선 시대 명문가 후손들을 만나보면 ‘우리 집안은 정3품 이상은 하지 말라는 가훈이 있습니다’라는 이야기를 종종 듣곤 한다. 정3품은 통정대부. 종2품이 가선대부, 즉 관찰사니까 그보다는 약간 아래 벼슬이다. 요즘에는 차관보 정도가 여기에 해당한다. 정3품 이상 하다가는 8분 능선을 넘어간다. 8할 위로 넘어가면 당쟁에 휘말려서 멸문지화를 당할 가능성이 높았다.

민주당 혁신위원장을 맡았다가 집중 사격을 받고 전 국민에게 망신당한 김은경을 바라보면서 ‘벼슬의 8분 능선’이 생각났다. 혁신위원장 자리는 8분 능선을 넘는 자리였다. 금감원 부위원장 자리에서 머물렀더라면 이렇게 사생활, 가정사가 다 까발려져서 전 국민의 ‘악녀’로 전락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정치는 누드 게임이다. 하나 하나 옷을 벗길 때마다 대중은 환호한다. 포르노 배우가 아닌 이상에야 모든 사람은 누드에 대한 두려움이 있다. 누드로 가는 길에는 사생활도 없고, 가정사도 없다. 8할을 넘어가면 포르노 배우가 되는 길이다. 그런데도 왜 인간은 꼭대기를 위해서 달려갈까. 누드가 되어도 좋다는 각오가 없이 말이다. 각오와 준비 없이 얼떨결에 8할을 넘었다가 근래에 패가망신한 사례가 한둘이 아니다. 벼슬에 대한 집착은 유교 문화의 유산인가? 아니면 인간 본성에 깊은 뿌리를 내리고 있는 ‘인정 욕구’의 발동이란 말인가.

사회에서, 아니면 다른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환호를 받고 싶은 인정 욕구는 불가에서 말하는 아상(我相·ego)의 뿌리이기도 하다. 기도를 하고, 염불을 하고, 참선을 해 보아도 아상을 제어하기는 쉽지 않다. 기도, 염불, 참선보다도 훨씬 효과적인 방법이 피, 땀, 눈물이라는 세 가지 액체를 흘리는 길이다. 거친 노선이다. 김은경도 이번에 기관총 사격을 받고 세 가지 액체를 많이 흘리고 있을 것이다. ‘역사는 도살장이다’라는 말도 있지만 현재 한국 사회는 모든 위선과 거짓을 해체하는 도살장이다. 8분 능선 아래에서 멈추는 지지(知止)의 경지는 이렇게도 어려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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