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죄에 관용 베푼 워싱턴, 살인 30% 늘었다

워싱턴/이민석 특파원 2023. 8. 10. 0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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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안 체계 무너진 미국의 수도

지난 5일(현지 시각) 오전 1시쯤 미국 워싱턴 DC 북서쪽 애덤스모건 유흥가에서 여러 발의 총성이 울렸다. 신고를 받고 달려간 경찰은 쓰러진 남성 세 명을 발견했다. 둘은 즉사했고, 한 명은 중상이었다. 2시간여 뒤인 오전 3시 30분 애덤스모건에서 남동쪽으로 약 1km 떨어진 U스트리트에서 또 다른 남성이 총에 맞아 병원으로 이송됐다. 비슷한 시각 북동부 워싱턴하이츠에선 두 명이 총격으로 중상을 입었다. 오전 5시 5분, 경찰은 버스 정류장에 숨져 있는 남성 한 명을 추가로 발견했다. 이날 하루 동안에만 워싱턴 DC 지역에서 총격 등 범죄로 인해 여섯 명이 사망했다. 이달 초부터 5일까지 총격으로 인한 사망자는 13명에 달한다.

미 수도 워싱턴 DC가 치솟는 범죄율에 비상이 걸렸다. 워싱턴 DC 경찰국은 올해 범죄율이 전년 동기 대비 30% 증가했다고 8일 밝혔다. 차량 절도 증가율이 115% 늘었고 강도와 성범죄가 각각 61%, 19% 증가하는 등 주요 강력 범죄가 모두 급증했다. 특히 살인 증가율이 약 28%로 20년 만의 최고 수준으로 치솟아 워싱턴 주민과 상인들이 공포에 떨고 있다.

미 수도의 범죄 급증은 최근 몇 년간 잇따른 ‘범죄 관용’ 정책 시행과 법 개정이 중첩된 결과라는 분석이 나온다. 민주당 초강세 지역인 워싱턴 DC 의회가 범죄 형량을 낮추고, 경찰 등 수사 당국 권한을 약화시키는 등의 정책을 남발한 것이 범죄를 조장하는 결과를 낳았다는 것이다.

7일 오후 애덤스모건은 이틀 전 총격 사건의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듯했다. 음식 쓰레기 냄새가 진동하는 거리 곳곳에 무장한 경찰이 주위를 살폈고, 주민들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거리를 걸었다. 경찰 순찰차 맞은편 거리엔 마약에 취한 남성이 휘청거렸다. 주민 네이선(45)씨는 “경찰은 저런 범죄자들을 붙잡지 않고 뭐 하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그래픽=김하경

버스 정류장 인근의 흑인 노숙자 한 명은 “어제 밤에도 총 소리를 들었다. 불안에서 잠을 잘 수가 없다”고 했다. 총격 살인이 벌어진 장소 불과 50m 떨어진 대형 마트에서 일하는 사설 경호원은 “너무 많은 사람이 대놓고 물건을 훔쳐간다”며 “이를 일일이 막는 건 불가능하다”고 했다.

지난해 11월 민주당이 절대다수를 점하고 있는 워싱턴 DC 의회는 강도나 차량 절도 등 일부 범죄에 대한 처벌을 완화하는 취지의 형법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민주당 의원들은 범죄자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유색인종이 미국의 불평등한 사법 체계 때문에 실제 죄보다 무거운 형벌을 받고 있다고 주장해왔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선 처벌 수위를 낮추고 구속보다는 교화 등에 더 집중해야 한다는 취지로, 의회는 범죄자에 대한 처벌을 느슨하게 바꿨다.

이 법은 발의 직후 미 전역에서 논란이 됐다. “범죄에 관대한 법안이 범죄율을 치솟게 할 것”이라는 보수 진영의 강한 반발에 부딪혔다. 법안 발의 직전 치러진 중간선거에서 다수당을 차지한 미 연방하원 공화당은 ‘특별구’인 워싱턴 DC 정책에 관여하지 않는다는 관행을 깨고 지난 2월 개정안을 무효화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민주당 소속인 조 바이든 대통령과 뮤리얼 바우저 시장조차 반대 의사를 밝혔다. 결국 지난 3월 상원이 무효 법안을 통과시키면서 해당 법안 자체는 폐기됐다.

법안이 폐기되긴 했지만 한번 느슨해진 공권력은 회복되지 못하고 있다. 지난해 통과됐던 법엔 경찰이 용의자의 목을 조르거나 과도하게 차량을 추격하는 행위를 금지한다는 조항 등이 포함돼 있었다. 이런 기조는 범죄 용의자에 대한 경찰의 적극적인 대응을 위축시켰다. 워싱턴 DC 의회는 2020년 5월 백인 경찰의 과잉 진압으로 흑인 남성 조지 플로이드가 숨져 전국적으로 시위가 확산됐다는 점을 의식한 다분히 정치적인 이유로 경찰 권한 축소를 추진했지만, 범죄율 증가라는 부작용만 발생했다. 워싱턴DC 경찰 노조는 올초부터 최근까지 수차례 “(처벌 완화) 법안은 책임감 있는 치안을 위해 전문적으로 뛰고 있는 경찰들의 사기를 저하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며 DC의회를 공개 비판해왔다.

범죄가 급증하는 가운데에도 DC 의회와 수사 당국이 잇따라 범죄에 관대한 모습을 보이자 주민들의 불만은 극에 달한 상황이다. 주미 멕시코·과테말라 대사관은 지난달 말 자국민을 대상으로 “워싱턴 DC의 범죄율이 치솟고 있다. 방문자들은 각별히 주의하라”는 경고문을 발표했다.

매슈 그레이브스 워싱턴 DC 연방검사가 강력 범죄자의 상당수를 기소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도 도마 위에 올랐다. 워싱턴 DC 범죄 매체 ‘DC 범죄팩트’는 “DC 연방검찰청은 올해 경찰이 체포한 범죄자들의 67%를 불기소 처리한 것으로 드러났다”고 최근 보도했다. 이 때문에 공화당은 “바이든 대통령이 임명한 민주당 검사가 범죄자들을 길거리에 풀어주고 있다”며 그를 공격하고 있다.

범죄율이 치솟자 DC의회는 지난달 급하게 범죄 처벌 수위를 높이는 내용의 임시 법안을 통과시켰다. 공공 장소에서의 총기 발사에 대한 처벌을 강화하고, 폭행 혐의로 기소된 사람은 재판이 열리기 전 구금하도록 하는 내용 등을 담고 있다. 임시 법안은 90일 동안만 임시 시행되는 만큼 DC의회는 범죄율을 낮출 수 있는 추가 입법을 내놔야 하는 상황이다.

7일(현지 시각) 미국 워싱턴DC 북서쪽 애덤스모건 거리에서 한 남성이 마약에 취한 채 비틀거리고 있다. 지난 5일 이 곳에서 불과 50m 떨어진 곳에서 총격 사건이 일어나 1명이 사망했다. /이민석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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