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노 정신·근육 발굴' 김재훈, '귀신통'도 엽니다

이재훈 기자 2023. 8. 7. 07: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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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곡가 겸 피아니스트…올해 신악기 만든 'P.N.O' 작업 주목
감독까지 맡은 퍼포 다큐, '제19회 제천국제음악영화제' 경쟁부문 진출
국립아시아문화전당 공연 레지던시 참여작가, 신작 준비
[서울=뉴시스] 작곡가 겸 피아니스트 김재훈. 2023.08.07. (사진 = 아티스트 측 제공) photo@newsis.com *재판매 및 DB 금지

[서울=뉴시스]이재훈 기자 = 서울 지하철 1호선 신이문 역 앞 어느 건물 지하실. 피아노 생태계를 재정의하는 피아노의 베이스캠프가 자리하고 있다. 이곳의 주인장은 작곡가 겸 피아니스트 김재훈.

김재훈은 국내에서 드물게 피아노의 정신과 근육을 동시에 발굴하고, 이를 적극적으로 사용하는 예술가다. 미니멀함을 단순화하지 않고, 인문학을 과시하지 않으면서 감정과 통찰을 온전히 전달하는 예술.

올해 초 한국문화예술위원회 공연예술창작산실 음악 부문에 선정된 '김재훈의 P.N.O(Prepared New Objects)'가 이미 증명했다. 오래된 인류의 악기였다, 최근 버려지는 피아노에서 탄생한 신악기 P.N.O 제작 이야기를 담았다. 직접 악기를 제작하는 동시에 연출과 음악까지 맡은 이 작품엔 '철과 나무, 연쇄와 해체의 소나타'라는 부제가 달렸다. 강철 같은 노동, 미학적 심미안이 돋보인 이 작품은 학술적인 공연인 줄 알고 보러온 관객들 사이에서 "상상도 못했던 과감하고 대담한 역사 이야기"라는 반응을 끌어냈다.

'제19회 제천국제음악영화제'(10~15일) 경쟁 부문에 진출한 퍼포먼스 다큐멘터리 '귀신통'(11일 CGV 제천 6관·14일 제천시 문화회관 상영)은 김재훈의 이런 작업의 연장선상에 있다. 그가 음악뿐 아니라 감독, 공동각본, 제작까지 맡은 이 다큐는 한국 사회에서 피아노가 갖는 역사적 의미를 고찰하는 인문학과도 같다. 동시에 피아노 콩쿠르라는 음악 제도의 권위를 해체하는 사회학이기도 하다. 피아니스트들뿐 아니라 조율사·운반사·수리사·유통업 등 피아노와 연관된 일들을 업으로 삼는 이들을 아우르며 피아노의 물리적·화화적·생물학적 지형도를 톺아본다. 그건 자연스레 피아노의 과거와 현재, 미래로 수렴된다. 피아노를 둘러싼 자신의 경험담과 생각을 녹여낸 이 작품은 개별적인 것이 어떻게 문화적 보편성을 획득하는지를 보여준다.

이용철 영화평론가는 해당 다큐에 대해 "아름답고 위대한 악기에 대한 예찬이자 소멸해 가는 어떤 문화에 대한 애가"라고 평했다. 이번 영화제 모더레이터 중 한명으로 나서는 임희윤 음악전문 기자(희미넴·Yuni Lim)는 김재훈에 대해 "벼락 같은 천재"라고 봤다. 이번 제천국제영화제 기간인 14일 오후 4시 제천시 문화회관 '귀신통' 특별상영 뒤엔 김재훈과 임 기자가 함께 토크하는 시간과 김재훈의 해체악기 P.N.O 퍼포먼스를 직접 볼 수 있는 특별한 시간도 마련된다. 다음은 최근 김재훈과 만나 나눈 일문일답.

-우선 '김재훈의 P.N.O' 작업이 호평을 받았습니다.

"한강 작가님의 소설 '소년이 온다'가 원작인 공연 '휴먼 푸가'(연출 배요섭) 작업을 할 때 '프리페어드(Prepared)' 기법(피아노 줄 사이나 내부에 이물질 등을 넣어 소리를 변질시키는 연주법)으로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어요. 5월 광주 이야기를 하는데 건반만으로는 소화가 안 되더라고요. 또 남산예술센터에서 공연을 할 때 제가 점유할 수 있는 공간이 넓지 않았어요. 그랜드 피아노 하나 놓을 수 있는 공간이었죠. 다른 악기를 쓸 수도 없었고요. 결국은 피아노 내부를 긁거나 때리는 '프리 페어드 방식'으로 해야겠다고 생각했죠. 다회차 공연이다 보니, 몸에 무리가 갔고 그래서 저만의 악기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까지 하게 됐어요. 다섯 살 때부터 천착했던 악기가 피아노였고, 그 피아노를 재료로 만들어 봐야겠다는 생각에 이른 거죠. 피아노를 뜯어 보기 위해 중고마켓을 찾아보니까 피아노가 많이 버려지고 있더라고요. '5만원, 10만원에 가져가라' 또는 '공짜로 줄 테니 운반비를 부담해 가져가라' 등의 글이 많이 눈에 띄었죠. 예전에 부모님의 등골이 휘어서라도 사주신 악기들이 이제 층간 소음 그리고 도시에서 1인당 점유할 수 있는 공간이 줄어들면서 있을 자리가 없어진 거죠."

[서울=뉴시스] 작곡가 겸 피아니스트 김재훈. 2023.08.07. (사진 = 아티스트 측 제공) photo@newsis.com *재판매 및 DB 금지

-그렇게 문제 의식이 생긴 거군요.

"네 리서치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운이 좋게 뉴욕에 갈 일이 생겨서 메트로폴리탄 뮤지엄에 갔어요. 그곳에 바르톨로메오 크리스토포리가 만든 인류 최초의 피아노가 있거든요. 그걸 보고 한국에 돌아와서 피아노가 버려지는 현장, 수거장, 리폼해서 파시는 분들을 찾아다니면서 2022년 한국에서 피아노를 재료로 새로운 악기가 만들어진다면 어떤 모습이어야 되는지를 조망하고자 팀을 조직했어요. 팀원들하고 업라이트 피아노로 부속 악기들을 만들었죠. 피아노가 독주악기로서 경쟁악기가 됐기 때문에 점차 버림 받는다는 진단을 내렸거든요. 제가 밴드(불나방스타쏘세지클럽·티미르호)도 하잖아요. 밴드 악기처럼 피아노를 세 명이서 함께 할 수 있는 합주 악기로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한 거죠. 또 서양음악사가 누적된 선택의 결과물들이고, 그것이 피아노로 만들어진 건데 거꾸로 가는 역사를 만들고 싶었어요. 일례로 업라이트 피아노의 타현장치를 뒤집어 거꾸로 연주하는 악기를 만들었어요. 다양한 연주 기법으로, 프리페어드 하기에 최적화된 악기죠. 예전 피아노 다리는 동물을 박제해서 사냥한 걸 장식했는데, 그것에 반대하는 상징을 이 악기 위에 조각했죠. 업라이트 피아노의 줄을 이용해 현악기도 만들었는데 타현장치를 뒤집은 악기에서 나온 재료로 만든 거예요. 피아노 의자는 의자 위의 홈을 파 음정 차이가 나게 한 뒤 타악기로 만들었죠. 그랜드 피아노는 실제 악기로 쓰이지는 않지만 사람들을 모일 수 있게 한 살롱을 확장한 개념으로 해체해서 집을 만들었어요. 이 악기들을 제작하고 시연하는 장면을 담은 게 '김재훈의 P.N.O'인 거죠."

-재훈 씨의 작업에선 일본 거장 음악가 사카모토 류이치(1952~2023) 선생님의 영향도 느껴집니다. 피아노의 자연성, 원시성을 탐구한다는 측면에서 그렇습니다. 사카모토 선생님은 '자연으로 돌려보내기 위한 실험'이라는 제목으로 피아노를 마당에 놓아둔 뒤 본래의 나무 상태에 가까워지는 모습을 지켜보기도 하셨죠.

"정말 구루 같은 분이죠. 사카모토 선생님이 돌아가시고 3일 동안 술을 마셨어요. 정말 존경하는 분이었거든요. 사카모토 선생님은 위대한 작곡가이자 피아니스트인데, 저는 그냥 피아노를 칠 줄 아는 작곡가예요. 그런데 스스로를 피아니스트라고 부를 수 없는 피아니스트가 많거든요. 피아노 전공을 해도 힘든 과정을 거쳐야 하기 때문이죠. 귀국 독주회 같은 증빙 서류가 필요하죠. 세계적인 콩쿠르에서 우승한 대단한 피아니스트들이 있지만 정말 바늘 구멍을 통과한 분들이에요. '귀신통'에선 그렇지 않은 피아니스트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습니다. 무엇보다 우리나라 피아노 생태계가 넓고 깊거든요. 근데, 조명 받지 못하는 피아노계 종사자가 너무 많아요. 조율사, 운반 하시는 분들, 수거하시는 분들, 수출하시는 분들…. 피아노를 삶의 동반자로 삶고 살아가는 분들이 많은데 그런 분들을 담아내고 싶었습니다. 다큐엔 훌륭한 피아니스트 두 분(원재연·김재원)이 출연하고 조율사, 판매하시는 분들, 수거하시는 분들, 운반하시는 분들 인터뷰가 들어가 있죠. 그런 분들 만나면서 한국 피아노계 지형을 그리고 싶었어요."

-'귀신통'이라는 제목이 재밌습니다.

"영국 출신 사이드 보텀(한국 이름 사보담) 선교사님이 선교를 위해 찬송가를 가르치시려고 1900년 3월 낙동강 사문진 나루터를 통해 들여왔죠. 이 피아노를 운반하기 위해 조선의 짐꾼들이 상여를 메듯 어깨 위로 들어 올려 악기를 옮겼다고 해요. 피아노는 뚜껑이 덮여 있으니까 처음 본 사람들은 소리가 어디서 나는지 알 수 없죠. 통 안에서 알 수 없는 소리가 나니까 '귀신통'이라 불렀다고 해요. 제 생각이지만, 특히 페달을 밟은 채 '쾅'하고 내는 저음을 듣고 특히 그런 생각을 했을 거 같아요. 이전까지 듣지 못했던 소리니까요. 다큐를 위한 리서치를 하면서 피아노가 한국에 어떻게 들어왔고, 어떤 연주가 공식적으로 있었고, 어디서 제작됐는지 등이 재밌었고 주목해야 하는 부분이었어요. 한국의 피아노사를 대략적으로 개괄하기로 했고, 그거랑 병치·병행해서 저는 새로운 피아노를 만든 겁니다. 대한민국 최초부터 지금까지의 피아노를 개괄하면서 지금 시점에서 새로운 피아노를 선보인 거죠."

-재훈 씨의 활동엔 항상 명분이 따르고 그 과정에서 설득력이 생깁니다. 철학과 신념을 음악 활동과 일치시키는 드문 예술가예요.

[서울=뉴시스] 작곡가 겸 피아니스트 김재훈. 2023.08.07. (사진 = 아티스트 측 제공) photo@newsis.com *재판매 및 DB 금지

"저는 반항기가 많아요. 불편할 수 있지만 익숙해진 것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싶었어요. 왜 우리가 피아노를 알고 들어야 하는지에 대해서요. 최근 제 반항기가 '이런 데 쓰이라고 있었구나'라는 걸 느끼고 있고, 더 치고 나가야겠다는 생각입니다."

-준비 중인 신작 공연이 있다고요.

"그간 주로 제 이야기만 한 거 같아요. 스윔(S.W.I.M)은 사북항쟁 이야기가 포함되긴 했지만 제가 강원도에서 머물며 본 산과 바다를 그렸고 'P.N.O'는 제가 피아노를 영위하면서 겪은 이야기들이죠. 처음부터 제가 연출을 하겠다는 야망이 있었던 게 아니라 음악 공연을 입체적으로 만들기 위해 여러 요소를 넣다 보니까 연출까지 하게 됐는데, 다음 작업부터는 다른 분들의 이야기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현재 제가 국립아시아문화전당(ACC) 공연 레지던시 참여작가로 있는데, 극장 청소 노동 하시는 분들을 등장 인물로 하는 공연(11월 예정)을 준비 중이에요. 저는 전당에 손님으로 와 있는데요. 사실 극장에서 아티스트가 주가 되는 거 같지만 사실은 극장 감독님, 직원분들, 청소해주시는 분들, 관리해주시는 분들 덕분에 극장이 살아 움직이는 거죠. 그런데 이 분들은 그간 별로 조명을 받지 못한 거 같아요. 이 분들이 자신의 일터에 대해 이야기를 했으면 했어요. 결국 '귀신통'과 같은 결의 작업이에요. 생태계에 도움을 주시는 분들을 바라보는 거죠. 그 바라보는 각도만 바뀌었지, 똑같은 작업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소위 말하는 고급 예술을 하면서 젠체하지 않고 대중적인 걸 아우르는 융화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닌데 재훈 씨는 그걸 해내고 있네요.

"서양전통음악계에선 이단아 취급을 받지만 '이런 작업을 하는 사람도 필요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해요. '귀신통' 후속편을 만들고 있는데 현악기가 소재예요. 사실 현악기는 피아노보다 아비투스(교육 환경이나 주어진 사회적 위치 등에 따라 후천적으로 체득된 것)가 심한 악기에요. 본인의 악기로 입시를 보니, 형편에 따라 연주할 수 있는 악기가 다르고 그건 경주에서 출발선부터 다른 것과 같죠. 인류의 보물인 클래식을 좀 더 많은 사람들을 듣게 하려고 홀도 넓어지고 다양한 방식으로 발전했는데 모든 사람에게 평등하게 주어지지 않게 된 상황이에요. 전 그런 지점들에 질문을 던지는 게 아닌가 생각해요."

☞공감언론 뉴시스 realpaper7@news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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