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문·풍수·기상·사주 관장… 케플러보다 4일 먼저 초신성 폭발 발견[박영규의 조선 궁궐 사람들]

2023. 8. 4. 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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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기상청·천문대 역할 ‘관상감’
잡과에 합격한 65명 구성
‘조선 자연과학’ 전문가들
천문학, 천문과 기상 연구
지리학, 무덤 등 풍수지리
명과학, 사주팔자 명리학
1604년 10월13일 실록
‘초신성 발견’ 상세 기록
세종이 인정했던 이순지
‘제가역상집’은 당대 최고
일러스트 = 김유종 기자

관상감(觀象監)은 지금의 기상청, 천문관측소 같은 곳으로 천문, 풍수지리, 달력, 기상관측, 시간측정, 사주팔자 등에 관한 일을 맡아보는 관청이다. 관상감의 원래 명칭은 서운관(書雲觀)이었는데, 세조 대에 이르러 관상감으로 개칭되었다. 연산군 시절에는 잠시 사역서로 이름이 바뀌었다가 중종 때 다시 관상감으로 환원되었다.

이곳의 관리들은 모두 잡과(雜科)에 합격한 사람들인데, 명실공히 자연과학 분야의 전문가들이었다. 관상감에서 연구하는 학문은 천문학, 지리학, 명과학 등이었다.

천문학은 말 그대로 천문과 기상을 연구하고, 지리학은 어느 곳에 집을 지으면 좋은가, 무덤은 어디에 쓰면 좋은가 등을 알아보는 풍수지리를 말하는 것이고, 명과학은 앞날의 운세를 알아보는 사주팔자학 같은 명리학을 말한다. 이 중에서도 특히 명과학은 고려 때부터 시각을 잃은 맹인들이 전문으로 해왔다. 이 외에도 과거 시험이나 임금의 행차와 같이 국가 대사의 일정을 잡을 때, 예조에서 기안해서 올리면 관상감에서 좋은 날짜를 정해서 시행했다.

‘경국대전’에 따르면 관상감의 관원은 65명이다. 정1품 영사는 영의정이 겸하고, 그 아래 제조 2명이 겸직으로 있고 정3품의 정 아래로 부정, 첨정, 판관, 주부, 천문학 교수, 지리학 교수, 직장, 봉사, 부봉사, 천문학 훈도, 지리학 훈도, 명과학 훈도, 참봉 등의 관직과 다수의 임시직이 있었다.

조선 천문학의 수준은?

현대인들의 생각으론 조선 시대에 천문학이라고 해봤자, 기껏해야 별을 보고 점이나 치는 수준이 아니었을까 싶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 조선의 천문학은 결코 서양에 뒤지지 않았다. 요하네스 케플러가 독일의 유명한 천문학자라는 사실을 다들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케플러 초신성’이라는 용어는 좀 생소할 것이다. 케플러 초신성은 1604년 10월 17일에 관측한 초신성 폭발 현상을 일컫는 것이다. 그런데 케플러가 초신성을 관찰하기 4일 전인 10월 13일에 조선의 천문학자들이 먼저 이를 발견한 내용이 선조실록에 실려 있다.

‘밤 1경(更)에 객성(客星)이 미수(尾宿) 10도의 위치에 있었는데, 북극성과는 1백 10도의 위치였다. 형체는 세성(歲星)보다 작고 황적색(黃赤色)이었으며 동요하였다.’(선조 37년 9월 21일)

이 내용을 쉽게 풀어 놓자면, 17시에서 19시 사이에 떠돌이별(객성)이 전갈자리(미수) 10도의 위치에 있었는데, 북극성과는 110도의 위치에 있었으며, 크기는 목성(세성)보다 작고 빛깔은 황갈색이었으며, 움직이고 있었다는 의미다. 이 당시 음력 9월 21일을 양력으로 환산하면 10월 13일이니, 케플러가 초신성을 발견한 시간보다 4일 앞서 조선의 천문학자들이 초신성을 발견한 셈이다.

이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듯이 조선 천문학자들은 별을 보고 점을 치는 따위의 일을 하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이 객성에 대한 기록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이후에도 이듬해 3월 15일까지 무려 6개월 동안 50여 차례에 걸쳐 관찰한 기록이 남아 있다.

이러한 기이한 천문현상 때문에 당시 선조는 몹시 불안해했다. 객성의 출현은 나라에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질 것이라는 징조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다. 이 현상과 관련하여 홍문관에서는 천재지변이 생긴 만큼 임금은 몸과 마음을 삼가야 한다는 글을 올리기도 했다.

이때 관측된 초신성은 결국 폭발했는데, 초신성이 폭발한 이유는 태양을 제외한 대개의 별은 쌍둥이 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두 별이 함께 돌다가 결국 서로 부딪쳐 폭발하는 것이다.

천문학 대가 이순지와 ‘제가역상집’

관상감 소관인 조선의 천문학을 거론하자면 이순지를 빼놓고는 말할 수 없다. 이순지(李純之)는 지사간 이맹상의 아들이며, 언제 태어났는지는 기록되어 있지 않다. 그의 자는 성보(誠甫), 본관은 양성(陽城)이다. 그는 태어날 때부터 병약했으나 학문을 좋아하여 문과에 급제하고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이때 천문학에 관심이 깊던 세종은 명석한 문인들을 따로 뽑아 산학(수학)을 익히게 했는데, 이순지도 그중 하나였다. 이순지는 이 무렵에 이미 역산(曆算, 천체 수학)에 정통한 상태였다.

세종이 그 명성을 듣고 이순지를 불러 물었다. “지도상으로 우리나라는 어디에 위치해 있는지 아느냐?” “본국은 북극에서 38도 강(强)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세종은 그 말을 믿지 않았다. 이순지를 과소평가한 것이다. 그런데 얼마 뒤 중국에서 온 산학자(수학자)가 천문학 책을 바치자, 그에게 세종이 물었다.

“우리나라가 어디에 위치해 있는지 그대는 잘 알겠군.” “고려(당시 중국에서는 조선을 여전히 고려라고 부르는 사람이 많았다)는 북극에서 38도 강에 위치한 나라입니다.”

그 소리에 세종은 이순지를 의심했던 것을 크게 반성하고, 역산에 관한 한 이순지의 말을 모두 인정하기 시작했다.

그의 역산에 대한 지식이 깊어지자, 세종은 그에게 고래의 역법을 상고하여 사실과 맞지 않는 부분을 수정하는 작업을 시켰다. 이후로 그는 3년 동안 역법 교정에 전념하였고, 이 기간 역산의 대가로 성장하게 된다.

그의 역산 능력을 높이 평가한 세종은 그를 서운관에 예속시켜 간의대 업무를 보게 했다. 간의대는 천문을 관측하여 별의 운행과 변화를 기록하고 그 원리를 파악하는 곳으로 요즘의 천문관측대 역할을 하는 곳이다. 이곳에서 장영실, 이천 등과 머리를 맞대고 간의(簡儀), 규표(圭表), 앙부일구(仰釜日晷), 보루각(報漏閣), 흠경각(欽敬閣) 등을 제작했다.

세종은 정4품 벼슬에 있던 그를 1443년에는 동부승지로 전격 발탁했다. 동부승지는 공조를 맡은 비서관인데, 이순지를 이 직책에 배치한 것은 과학, 특히 천문학 분야의 업무를 세종이 직접 챙기겠다는 의미였다.

이 시절에 세종은 이순지에게 천문학에 관한 새로운 서적을 편찬하라는 특별한 명령을 내렸는데, 이는 종래의 천문역서가 가진 문제점을 보완하고 중복된 부분을 삭제하여 긴요한 사항들만 한눈에 볼 수 있도록 하려는 것이었다.

1445년(세종 27년) 3월 30일, 드디어 이순지가 세종의 명령을 실천에 옮겼으니, 바로 ‘제가역상집(諸家曆象集)’의 편찬이 이뤄진 것이다. 4권 4책으로 이뤄진 이 책의 제1권은 천문, 제2권은 역법(曆法), 제3권은 의상(儀象), 제4권은 구루(晷漏, 해시계와 물시계)를 다루고 있다.

일월(日月)과 오성(五星·수성, 금성, 화성, 목성, 토성)의 움직임에 관한 책인 ‘칠정산 내외편’과 더불어 당대 최고의 천문역서인 ‘제가역상집’은 이순지와 세종의 천문학에 대한 열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역작이다.

천문학의 요점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하여 역산에 대한 깊은 지식이 없더라도 한눈에 알 수 있게 만든 점이 이 책의 강점인데, 이는 실용주의 정책으로 일관했던 세종의 면모와 고금의 천문역서에 통달했던 이순지의 지식 체계가 일궈낸 조선 천문학의 쾌거였다.

작가

■ 용어설명 - 제가역상집(諸家曆象集)

세종이 서운관(書雲觀)의 제도와 기구를 정비하고 역법(曆法)을 정리하여 ‘칠정산 내외편’을 편찬하게 하고 나서, 다시 이순지에게 명하여 고금의 천문·역법·의상(儀象)·구루(晷漏)에 관한 개요를 편찬하도록 한 것이다. 제1권에 천문, 제2권에 역법, 제3권에 의상, 제4권에 구루를 다루고 있는데, 각 권에선 여러 항에 해당하는 중국의 문헌을 적절히 인용, 기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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