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페 2030] 92세 총무과장의 조언

이정구 기자 2023. 8. 4. 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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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조선디자인랩·Midjourney

돌아가신 할머니는 세 손주가 학교에 가면 더러워진 운동화를 빨아주시곤 했다. ‘아직 더럽지 않으니 괜찮다’고 해도, 학교에 다녀오면 어김없이 마당 한편에서 말끔해진 녀석들이 햇빛 아래서 마르고 있었다. 하루는 집에 돌아오니 한 켤레가 짜글짜글 망가져 있었다. 처음 사 본 ‘스웨이드’ 재질 운동화였다. 할머니는 “그게 ‘세무’인지 모르고 빨았다”며 미안해하셨다. 물론 속상했지만, 이후 할머니의 세탁법에는 한 가지가 추가됐다. 늘 깨끗한 ‘세무 운동화’를 신게 됐음은 물론이다.

할머니와 함께 살았던, 여전히 농사를 짓는 집이 많은 고향 마을에 갈 때마다 ‘노인’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된다. 정신없는 도시에 있다가 청년은커녕 중년도 발견하기 어려운 마을을 찾으면 처음에는 후퇴라는 단어만 떠오른다. 관리도 하지 않아 무너져가는 빈집도 여럿이다.

그런데 찬찬히 보면 더디지만 작은 변화가 하나씩은 꼭 있었다. 젊은 축에 속하는 환갑 앞둔 주민이 새로운 농기계 사용법을 배워 오면, 여든 넘은 노인들도 그 기술에 맞춰 함께 일한다. 감자 심는 작업을 몇 배나 쉽게 도와주는 ‘다목적 씨앗 파종기’ 사용법은 유튜브에도 올라와 있다. 내가 몰랐던 방식으로 배우고 나아지고 있었을 뿐, 후퇴는 아니었다.

최근 번역 출간된 ‘오늘도 일이 즐거운 92세 총무과장’이라는 책이 있다. 1930년생으로 25세에 일본 산코산업에 입사해 66년간 경리와 서무 업무를 맡아온 총무과장 다마키 야스코 할머니의 조언을 담은 책이다. 초고령 사회인 일본이 2021년 정년을 70세로 늘렸다지만, 아흔 넘은 총무과장은 이례적이다. 최고령 총무부원으로 기네스북에도 올랐다. 책에선 신입 시절 격무에 일주일 무단 결근하고 잠적했던 사연, 쉰 넘은 나이에 처음으로 컴퓨터를 접했던 기억, 어린 직장 동료에게 ‘5G’ 개념을 설명할 수 있게 공부했던 사연들이 할머니가 머리맡에서 들려주는 이야기처럼 이어진다.

주판으로 일을 시작했던 야스코 할머니는 1970년대 전자계산기를 배웠고, 컴퓨터를 익혔다. 그는 “컴퓨터라는 하드웨어보다 엑셀 같은 소프트웨어에 익숙해지기 더 힘들었다”고 하지만 장부와 전표를 정리하는 업무에선 젊은 동료들과 비슷하게 엑셀을 다루게 됐다. 주식에는 관심이 없지만 시사 주간지 이코노미스트를 정기 구독하고 매일 아침 신문도 빼놓지 않고 읽는다고 한다. 버스와 지하철 출퇴근길에는 전자책으로 책을 읽는다. 합격률이 8% 수준인 국가 공인 자격인 ‘사회보험 노무사’ 시험에는 여러 번 낙방했지만 계속 도전하는 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 여전히 공부하고 있다.

최근 한 정치권 인사의 발언으로 ‘노인’이 또 화제였다. 노인 세대를 가리켜 “미래가 짧은 분”이라고 했다가 “저도 곧 60, 노인 반열(班列)”이라고 횡설수설하다가 뒤늦게 사과했다. 미래가 짧다는데, 야스코 할머니는 ‘오늘도 손톱만큼 자라볼까’ 하는 신념으로 100세에는 수필을 쓰겠다는 새 목표를 세웠다. 곧 예순이라 노인이라는 정치인과 ‘손톱만큼’이라도 성장하겠다는 아흔셋 총무과장 할머니 중 미래 세대에 누가 더 훌륭한 조언을 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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