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에 팔려가고, 포탄에 상처입고… ‘비운의 탑’ 112년만에 귀향

박세희 기자 2023. 7. 31. 09:03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 지광국사탑, 1975㎞ 돌아 내일 원주 법천사지로 이송
국보 제101호
고려 때 건립된 해린 스님 승탑
화려한 조각·독특한 구조 뽐내
파란만장 생애
1911년 일본인이 서울로 옮겨
명동 등 거쳐 日오사카로 반출
1년후 경복궁으로 돌아왔지만
한국전쟁 포탄 맞고 크게 파손
5년간 대수술
야외 복원땐 추가 훼손 우려
설치 위치 둘러싸고 대립 중

대전 = 글·사진 박세희 기자 saysay@munhwa.com

112년 전 일제에 의해 반출된 뒤 서울 명동과 경복궁 등 이곳저곳을 떠돈 비운의 유물, ‘원주 법천사지 지광국사탑’(국보 제101호)이 오는 8월 1일 마침내 고향 땅으로 돌아간다.

31일 문화재청에 따르면 보존처리를 완료한 지광국사탑 부재(部材·석탑을 구성하는 다양한 석재) 31점이 1일 원래 지광국사탑이 있던 강원 원주의 법천사지 유적전시관으로 이송된다. 지광국사탑을 구성하는 부재는 총 33점이나 옥개석(屋蓋石·지붕처럼 덮은 돌)과 탑신석(塔身石·석탑의 몸체를 이루는 돌)은 추가 정밀 모니터링이 필요해 2점을 제외한 31점의 부재만 원주로 향한다.

◇사흘간 포장… 무진동 트럭 6대에 실려 이동

1일 고향으로 향하는 마지막 여정을 떠날 부재 31점은 충격을 최소화하는 무진동 특수트럭 6대에 나뉘어 실린다. 속도는 시속 80㎞ 이하로, 다소 느리게 움직일 예정이다. 국보를 보호하기 위함이다. 원주 법천사지 유적전시관에 도착하면 이를 내리는 과정에 이틀이 소요될 것으로 보인다. 법천사지 유적전시관은 다음 달 10일 귀향식을 연 뒤 상설전시관에 부재들을 전시할 방침이다.

지난 27일 찾은 대전 유성구의 국립문화재연구원 석조복원실은 약 7년간 머문 지광국사탑 부재들을 무사히 떠나보내기 위한 포장 작업에 한창이었다. 포장의 핵심은 각각의 부재를 규격에 딱 맞춰 제작된 각각의 팔레트에 올린 뒤 단단히 결박해 이동할 동안 손상을 입지 않도록 하는 것. 포장을 하고 부재들을 옮기는 연구원들의 표정엔 긴장감이 가득했다. 기다란 석재가 천장의 호이스트 크레인에 매달린 채 움직였고 무사히 팔레트에 안착한 후에야 비로소 모두 한숨을 놨다. 연구원들은 이후 광목천, 타이백지 등 부드러운 소재로 부재를 꼼꼼히 감싸 포장했고 이를 자동바를 이용해 팔레트에 고정시켰다. 규모가 크고 무게가 많이 나가는 석조 유물의 특성상 한 점의 유물을 포장하는 데는 한두 시간 이상의 시간이 든다. 이 작업은 26일부터 28일까지 사흘간 이뤄졌다.

◇기구한 삶의 지광국사탑… 총 이동거리 1975㎞

독특한 구조와 빈틈없이 채워진 화려한 조각, 뛰어난 장엄 장식으로 역대 가장 개성 있고 화려한 승탑으로 손꼽히는 지광국사탑은 기구한 역사로 유명하다. 탑의 일생이 우리나라의 슬픈 역사를 그대로 담고 있다. 탑은 고려시대 국사(國師)였던 지광국사 해린(海麟·984∼1067)의 사리와 유골을 모시는 승탑으로, 건립 시기는 고려 때인 1070∼1085년쯤이다. 국보 제59호인 지광국사탑비와 함께 원주 법천사지에 세워진 이 탑의 운명이 기구해진 건 우리가 나라를 빼앗기면서부터다. 1911년 한 일본인이 이 탑을 해체해 서울로 옮겼고, 탑은 그해 서울 명동 무라카미 병원으로 옮겨졌다가 일본인 사업가 와다 쓰네이치(和田常市)의 서울 중구 남창동 저택 정원으로 또 한 번 옮겨진다.

이윽고 탑은 일본 오사카(大阪)에 사는 남작 후지타 헤이타로(藤田平太郞)에게 팔리며 1912년 일본으로 반출됐다. 그러다 그해 10월쯤 뒤늦게 이 소식을 알게 된 조선 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가 명령해 다시 국내로 돌아왔지만, 원래 있던 법천사지가 아닌 서울 경복궁에 놓였다. 경복궁 내에서도 같은 자리에 머물러 있을 수 없었다. 당시 자료들을 보면 탑은 경복궁 안에서도 계속 이동했다.

그러다 6·25전쟁 땐 포탄을 맞아 크게 파손됐다. 한동안 방치되다 1957년에 급하게 복원됐는데 치밀한 고증 없이 사실상 시멘트를 곳곳에 바르는 것으로 그쳤다. 탑은 이후 1990년 경복궁의 국립고궁박물관(당시 국립중앙박물관) 뒤뜰로 이전해 2015년까지 자리를 지켰고 그간 이뤄진 정밀안전진단 등에서 다수의 균열과 복원 부위 탈락 등이 확인돼 결국 국립문화재연구원이 2016년 5월부터 전면해체 및 복원작업을 벌여왔다. 지금까지 탑이 움직인 거리를 따져보면 총 1975㎞에 이른다.

◇복원위치 미정… 당분간 부재 31점만 전시

지광국사탑 부재들은 1일 고향인 원주 땅을 밟지만, 곧바로 복원될 순 없다. 아직 복원 위치가 정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국립문화재연구원에 남은 2점의 석재는 복원 위치가 정해진 이후에야 원주에서 31점의 부재들과 만나게 된다.

현재 지광국사탑의 복원 위치에 관해선 본래 있던 자리 그대로 야외에 두느냐, 법천사지 유적전시관 내에 놓느냐를 놓고 대립 중인 상황이다. 본래 있던 자리에 복원하게 되면 지광국사탑비와 함께 옛 모습 그대로를 되찾을 수 있다는 시각이 있는 가운데 야외에 복원하게 되면 날씨 등의 영향으로 추가 훼손이 우려된다는 시각도 있다. 결정을 내려야 하는 문화재위원회 회의는 2021년 이후로 열리지 않고 있다. 결국 이 기구한 역사를 지닌 탑은 고향엔 돌아가지만 둘로 나뉜 채 수개월을 다시 기다려야 하는 상황이다.

지광국사탑 보존처리 과정을 설명하고 있는 이태종 학예연구사.

■ “복원과정, 내게도 큰 도전… ‘시멘트 상처’ 품었지만 고향선 평화롭길”

이태종 문화재硏 학예연구사

2016년부터 모든 작업 참여
복원 석재 찾기만 1년반 걸려
“1957년 시멘트 복원 부작용
눈·비 안맞게 보호각 씌워야”

“노부모를 떠나보내는 마음이 이럴까요. 기구한 일생을 살았던 만큼, 고향에 돌아가서는 편안하고 안정된 곳에 머물길 바랍니다.”

지난 27일 대전 유성구 국립문화재연구원 석조복원실에서 만난 이태종 학예연구사는 지난 2016년부터 함께했던 지광국사탑의 일부를 포장하며 이같이 말했다. 그는 지광국사탑 해체부터 보존 처리까지 전 과정을 담당해온 석조복원 전문가다. 망가진 부분을 도려내 병을 치료하는 외과 의사처럼, 파손된 부분을 수리하고 망가진 곳을 되살리는 일을 하는 문화유산의 외과 의사인 셈이다.

경주 감은사지 삼층석탑, 불국사 다보탑 등 석조문화재 수리를 전문으로 해온 베테랑 연구사인 그도 처음 지광국사탑을 마주하고는 ‘이걸 어떻게 해야 하나’ 싶었다고 한다. 생각보다 훼손의 정도가 심했고 미술사적으로도 가치가 높은 문화유산이라 섬세하게 접근해야 하는 부분이 많았기 때문이다. “지광국사탑은 저에게 정말 큰 도전이었던 탑이에요. 고민하고 결정해야 할 것이 많았습니다. 복원에 사용할 석재를 찾는 데만 1년 7개월이 걸릴 정도였으니까요. 시멘트 복원 부분에 대해서도 그 부분을 뜯어내야 하느냐 마느냐를 놓고 콘크리트 학회 등과 논의했습니다. 결정 하나하나가 참 어려웠습니다.”

실제로 전면 해체 및 보존 처리가 결정됐을 당시 이 탑의 상태는 심각했다. 1957년 복원 당시 시멘트 사용에 따른 부작용을 겪고 있었다. 이 학예연구사는 “60년 넘는 세월 동안 시멘트와 동고동락을 하다 보니 백화와 균열이 많이 진행됐었다. 표면은 처리를 마쳤지만 내부 깊숙이는 지금의 기술로는 하지 못하는 상황”이라고 했다. 이 때문에 그는 탑이 무조건 비를 피할 수 있는 곳에 복원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빗물 등 수분과 만나면 백화 현상 및 훼손이 다시 진행될 겁니다. 전시관 내부에 들어가든, 만약 야외에 복원된다면 탑이 비나 눈을 맞지 않도록 하는 보호각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는 가장 기억에 남는 일로 옥개석(屋蓋石·지붕처럼 덮은 돌) 남면에 자리한 두건을 쓴 인물상을 발견한 것을 꼽았다. 남면을 제외한 삼면에는 일반적인 부처상이 조각돼 있어 1957년 복원 당시엔 남면 역시 부처상을 조각해 넣었으나, 이후 발견된 유리건판 사진 덕에 남면의 두건을 쓴 인물상을 발견해냈고 그 모양대로 다시 조각을 해 넣은 것이다. 지금까지 전해오는 3만8170장의 유리건판은 일제강점기의 산물로, 당시 조선총독부가 고적조사사업의 일환으로 촬영했다. “일제강점기 때부터 고난을 겪어온 탑인데 일제가 찍어둔 유리건판으로 원래 모습을 되찾다니, 참 아이러니하죠.”

이 학예연구사는 탑의 부재들이 모두 원주로 돌아간 이후에도 계속 지켜볼 것이라고 말했다. “어느 위치에 복원되는지가 지금은 가장 중요합니다. 잘 보존될 수 있는 곳으로 위치가 정해져 어서 탑이 평화로운 나날을 보낼 수 있기를 바랍니다.”

Copyright © 문화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