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평에 정원, 주차장, 작업실, 세입자…다 있다

신다은 기자 2023. 7. 29. 2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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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과 사람]협소주택
문방구 있던 점포주택 허물고 지은 3층 협소주택
거주자 곽재환·노기남 부부와 건축주 곽석준
마장동 협소주택에 거주하는 곽재환(왼쪽)씨와 노기남(오른쪽)씨가 대화를 나누고 있다. 두 사람 너머로 정원이 보인다. 박승화 기자

11평짜리 작은 집도 있을 건 다 있다. 넓은 침대와 컴퓨터 책상, 부엌 겸 거실에 작은 정원까지. 80대 노부부가 이곳에서 일상을 보낸다. 위층엔 아들의 사진 작업실이 있고 2·3층엔 세입자들도 산다. 흔히들 협소주택이라고 하면 젊은 부부가 자녀들과 함께 사는 집을 떠올리지만, 서울 성동구 마장동 협소주택은 노부부가 주로 거주하고 작업실과 임대 가구도 겸한다. 11.2평(37㎡·건축면적 기준) 작은 공간에 이런 기능을 어떻게 다 담았을까? <한겨레21>이 2023년 7월15일 마장동 협소주택에서 거주자 곽재환(83)·노기남(81)씨 부부와 건축주인 아들 곽석준(55)씨를 만났다.

비탈길 위에 세워진 집

서울 동명초등학교 앞엔 주택들이 다닥다닥 모여 있다. 그중에서도 초등학교 정문과 바로 마주 보는 집이 마장동 협소주택이다. 골목길과 이어진 출입구엔 꽃 화분이 늘어서 있다. 한 노신사가 집 문을 열고 나오더니 해바라기에 물을 준다. 이 집에 사는 재환씨다.

마장동 협소주택 맨 아래층은 재환씨와 기남씨 부부가 쓴다. 비탈길 앞 현관에서 반 계단만 내려가면 출입문이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햇빛이 드는 정원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다. 창문 너머로 활짝 핀 나리꽃과 붉게 익어가는 토마토가 보인다.

정원은 주로 재환씨가 가꾼다. 처음엔 건축사무소 추천대로 대나무 몇 그루만 심었는데 점점 원예에 관심이 생겨 이것저것 직접 심었다.

실내는 세로로 긴 원룸 형태다. 11평 남짓 공간을 책장으로 반씩 분리해 부엌 겸 거실과 침실로 나눴다. 작은 공간이지만 티브이(TV)와 컴퓨터 책상, 세탁기 등이 다 들어가 있다. 식탁 겸 탁자에서 두 사람은 식사하고 시간을 보낸다.

“사람들이 처음에 이 집에 들어오면 다 놀라요. 밖에서 봤을 땐 작은데 안에는 이렇게 잘해놨네, 하고요. 생각지도 않던 정원까지 있으니 그것도 신기해해요.”(재환씨)

“처음엔 이 터로 이렇게 지을 수 있다곤 상상을 못했어요. 조그만 터를 가지고 참 잘 지었어. 아들이 집 잘 지어줘서 이렇게 사는 게 너무 좋아요.”(기남씨)

2023년 7월15일 서울 성동구 마장동 협소주택 앞에서 아들이자 건축주인 곽석준씨(맨 왼쪽)가 부모님 노기남(가운데)·곽재환(맨 오른쪽)씨와 함께 서 있다. 박승화 기자

교장 선생님이 인사하러 오던 문방구를 닫은 뒤

마장동 협소주택이 초등학교와 바로 마주 보는 이유가 있다. 재환씨 부부가 30년간 문방구 하던 터를 그대로 헐어서 집을 지었다. 두 사람에겐 치열했던 삶이 고스란히 녹아든 동네다.

“곽씨 아저씨네 문방구에 가면 모든 게 다 있다고 사람들이 그랬어. 부지런히 살았지, 애들 셋 공부시켜야 하니까. 새벽 4시부터 눈코 뜰 새 없이 장사하고 살았어.” 재환씨 말이다.

동네에서도 알아주게 손이 빨랐다. 학생 준비물부터 종량제봉투까지 학교가 필요하다는 건 다 채웠다. “교장 선생님 바뀔 때마다 인사하러 오던” 동네 터줏대감 문방구였지만, 아이들이 줄어드는 데는 당해내지 못했다. 한때 7개나 있던 학교 앞 문방구는 모조리 문을 닫았다. 두 사람도 나이 들며 장사를 계속하기 어려워졌다. 부부는 2014년 남은 준비물을 학교에 모두 기부하고 문방구를 닫았다. 학교장이 직접 감사장을 건네며 두 사람에게 고마움을 표현했다.

추억이 가득한 동네를 부부는 떠나기 싫어했다. “주변 사람들이 여기 명당자리니까 팔지 말고 오래오래 사슈, 그랬어요. 집터가 좋다고. 그래서 언젠가 집을 짓는다면 여기다 지어야지 했죠.”(기남씨) 부부는 문방구가 있던 점포주택에 계속 살기를 원했다. 하지만 30년 이상 된 구옥이라 그대로 쓰기엔 무리가 있었다. 아들 석준씨는 기존 집을 허물고 부모님을 위한 맞춤형 집을 새로 짓기로 했다.

마장동 협소주택 옥상에서 서울 동명초등학교가 마주보이는 모습. 박승화 기자

집주인 동선 고려한 맞춤형 공간

협소주택은 거주자 맞춤형 공간이다. 대지가 작아 집주인의 수요와 동선을 한층 더 꼼꼼히 공간에 녹여야 한다. 석준씨도 건축사무소와 수시로 소통하며 집 구조를 함께 그렸다.

“부모님이 계단 오르는 걸 힘들어하셔서 아래층 공간을 쓰시기로 했고요. 답답하시지 않도록 햇빛이 드는 공간을 따로 만들었어요. 마침 문방구가 있던 대지가 비탈길이라 절반은 지하로, 절반은 지상으로 만들 수 있더라고요. 저희 부모님이 문방구 하시면서 추운 거에 많이 지치셨는데 반지하는 다른 층보다 덜 춥고 덜 덥고요. 여러모로 저희가 원하는 부분과 잘 맞아떨어졌습니다.”

지상에서 반 계단 높은 1층은 취미로 사진을 찍는 아들 석준씨의 작업실이다. 대형 사진기와 조명은 물론 사진 현상에 필요한 싱크대까지 갖춰져 있다. 아들은 주말마다 여기서 사진을 찍고 학생들과 사진 수업도 한다. 작은 공간에도 화장실과 복층 다락방이 딸려 있다. 다락엔 안 쓰는 물건을 수납해둔다.

2∼3층은 세입자들이 들어와 있다. 복층 원룸 구조인데 두 명씩 한집에 산다. 주거용도라 일부러 복층을 넓게 지었다. 세입자들은 주로 복층을 침실로 쓰고 아래층을 거실로 쓴다고 한다. 지하 1층과 1∼3층의 출입구를 분리해 세입자와 집주인이 마주치는 일도 적다. 건물 안쪽엔 차량 한 대가 주차할 수 있는 작은 주차장도 있다.

“집이 예쁘게 지어져서 그런지 세입자 구하는 데 큰 어려움은 없었어요. 부모님이 문방구 그만두고 수입이 없으니까 월세를 놓으면 좋겠다 싶었죠. 처음에 계획한 건 아닌데 설계 중에 그렇게 됐어요.” 아들 석준씨의 말이다. “건축물에 요구되는 여러 법적 요건을 맞추려면 각 층의 용도를 잘 배분해야 하거든요. 건축주(석준씨)와 상의하다 마침 사진을 찍는다는 얘길 듣고 1층은 사진 스튜디오로 정했고요. 2∼3층도 상가로 분양하긴 애매한 공간이라 임대주택으로 제안했어요.” 황정현 건축사무소 에이치투엘(H2L) 소장의 말이다. 마장동 협소주택은 황 소장과 현창용 전 소장(현 중앙대 건축학부 교수)이 함께 지었다.

2층은 아들이자 건축주인 곽석준(가운데)씨의 사진 작업실로 쓰이고 있다. 박승화 기자

설계에 품 가장 많이 들여

처음부터 지금과 같은 건물 구조를 생각한 건 아니었다. 그저 부모님이 쓰실 작은 집을 구상했다가 점점 일이 커졌다.

“처음에는 주변 지인들에게 설계를 맡겼는데요, 땅도 작고 정해진 예산 안에서 설계도를 뽑다 보니 단순한 1층짜리 건물밖에 설계도가 안 나오더라고요. ‘돈을 좀더 들이더라도 괜찮게 지어야겠다’ 싶었어요. 그다음부턴 온라인으로 정보도 모으고 발품을 팔았죠.”

카페와 블로그에 올라온 협소주택 관련 정보를 수집하고 서울 시내 주요 협소주택은 직접 찾아가보기도 했다. 작은 공간을 창의적으로 구현하고 건축주 의견도 귀담아들어줄 사무소가 필요했다. 몇몇 설계사무소와 상담한 끝에 에이치투엘로 마음을 정했다. 비용이 싸진 않았지만 거짓 없이 설명해줘 마음을 열었다고 했다.

낙차가 있는 비탈길과 오각형 대지 면적 등 여러 제약을 건축사무소는 대폭 보완하고 활용했다. “현장 확인차 전에 살던 공간을 미리 방문했는데 두 분 평소 동선이 그리 넓지 않았어요. 거실과 부엌에만 주로 계시고 방은 거의 안 들어가신다기에 두 공간을 합쳐도 되겠다 생각했습니다. 또 계단을 오르내리는 불편이 덜하도록 비탈길의 낮은 경사면을 출입구로 만들었고요. 오각형 대지를 최대한 넓게 쓰려고 계단을 디귿(ㄷ) 자 대신 시옷(ㅅ) 자 모양으로 만드는 등 구상을 많이 했죠.” 황정현 소장이 말했다.

설계 비중이 커지면서 공사 비용도 늘었다. 공사하며 설계를 크고 작게 변경하다 보니 예산의 1.5배가 들었다. 공사 기간도 6개월에서 1년으로 늘었다. 집은 2017년 완공됐다.

그래도 석준씨는 작은 땅을 200% 활용해 만든 이 공간이 마음에 든다. “설계 비용만큼은 아끼지 않는 게 좋겠다 싶어서 많이 투자했는데 결과적으로 만족도가 정말 높아요. 22평(대지 면적 기준)밖에 안 되는 공간을 최적화할 수 있는 건 설계밖에 없거든요. 건축사무소 쪽에서 공간 활용을 많이 고민해줘 좋았죠.” 석준씨가 말했다. 황정현 소장도 “건축주와 이런저런 의견을 나누고 공간에 녹이는 과정이 즐거웠다”고 말했다.

거실 겸 주방으로 사용하는 공간에서 노기남(왼쪽)씨가 곽재환(오른쪽)씨와 이야기 나누고 있다. 박승화 기자

동네와 잘 어울리는 집

마장동 협소주택의 겉모습은 수수하다. 재색과 검은색만 사용해 외관을 꾸몄다. 서울 시내 협소주택을 돌아보면 낡은 건물들 속 화려한 외관을 뽐내는 건물이 많은데, 마장동 협소주택은 일부러 찾지 않으면 눈에도 잘 띄지 않는다. 위화감 없이 주변 동네와 어울리도록 짓고 싶었던 건축주와 건축가의 마음이 일치했다.

“건축사무소에서 이 색깔을 골랐는데 이 공간하고 참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동네 분위기랑도 잘 맞고요.”(석준씨) 다행히 부모님도 좋아했다. “부자 동네라는 강남도 우리 집과 비슷한 색깔의 집을 짓고 살더라고. 아주 마음에 드는 색깔이라고, 잘 골랐다고 그랬죠.”(재환씨)

거주하는 사람의 취향과 필요에 따라 집이 변하기도 했다. 깔끔한 멋을 추구하는 아들과 달리 꽃을 좋아하는 아버지는 현관 앞을 화분으로 가득 채웠다. 건물의 개성을 살리려고 계단 옆 공간을 창문 없이 비워놓았다가 비가 들이치자 결국 창문을 시공하기도 했다. 여러 시행착오를 거치며 공간을 사람에게 맞춰가는 과정이다.

재환씨 부부는 두 사람을 위해 맞춤으로 지은 집이 무척 마음에 든다고 했다. 무엇보다 익숙하고 편안한 동네에 계속 살 수 있다는 점도 좋다. “여기 하도 오래 사니까 (동네 사람들이) 어이, 부르거나 고개 끄덕하면 서로 다 알지. 그게 편해서 다른 데 가지를 못해. 여기 계속 살 수 있게 돼서 정말 좋아.” 요즘도 동네 주변을 매일 1시간씩 산책한다는 재환씨의 말이다. “내가 37살에 여기 와서 81살까지 살았으니 동네에 애정이 많을 수밖에요. 떠날 수가 없죠. 아파트도 잠깐 살아봤는데 오래 지내면 좀 갑갑하겠더라고요. 이 집은 아늑하고 편해서 마음에 쏙 들어요.” 기남씨가 말했다.

신다은 기자 downy@hani.co.kr

시사주간지 <한겨레21>의 특별한 변신, 한 가지 주제로만 제작하는 통권호를 아홉 번째 내놓습니다. ‘21이 사랑한 작가 21명’, ‘디지털성범죄 끝장 프로젝트 너머n’, ‘비거니즘의 모든 것, 비건 비긴’(Vegan Begin) 등에 이어 ‘집’을 열쇳말로 삼았습니다. 한옥, 농막, 협소주택 등 다양한 형태의 집에 깃든 사연, 반려동물을 위한 집, 미니멀리즘 등 새로운 삶의 방식을 담은 집 이야기를 다룹니다. 전문가들이 말하는 다양한 집의 존재 이유와 미래 전망도 더했습니다. _편집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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