측우기, 세종대왕이 만든 게 아니었다?…과학업적 재조명

김슬기 서울대 과학학과 박사과정 연구원,김태희 기자 2023. 7. 29.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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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대왕은 32년의 재위기간(1418~1450) 동안 무수히 많은 업적을 남겼다. 과학동아 제공

조선의 4대 임금인 세종은 태종의 셋째 아들로 1418년, 22세의 나이로 즉위했다. 그는 32년의 재위기간(1418~1450) 동안 한글을 창제하는 등 ‘대왕’이라는 칭호가 붙을 정도로 많은 업적을 남겼는데 그중에는 과학 분야의 업적도 많았다. 

세종 23년(1441)에는 당시 세자(훗날 문종)의 아이디어로 강우량 측정기인 측우기를 발명했는데 이 측우기를 세종대왕이 장영실과 함께 직접 만들었다고 잘못 알려지기도 했다. 

세종 24년(1442)에는 중국과 이슬람의 역법을 참고해 한반도 기준으로 시간과 날짜를 구분할 수 있는 조선의 역법을 완성했다.  세종대왕은 왜 이토록 다양한 과학 연구를 진행했을까.
 

측우기는 세종이 만든게 아니다. 과학동아 제공

● 의혹1. 측우기는 세종대왕이 만든 게 아니다?

그렇다. 측우기는 세종이 만든 게 아니다. 측우기는 훗날 문종이 될 세자의 아이디어로 제작됐다. 측우기는 강우량을 측정하는 측정기구다. 단순해보이는 측우기가 왜 중요한 발명으로 칭송받는지 이해하려면 조선이 벼농사를 중심으로 하는 농경사회였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당시 풍작과 흉작은 국가 재정과 곧바로 연결되는 중요한 일이었다. 벼농사를 잘 짓기 위해서는 비가 적절히 내려야 한다. 조선 조정에서는 각 지역에 비가 얼마나 내렸는지 비가 내릴 때마다 확인하면서 농사 현황을 파악할 필요가 있었다.

측우기가 발명되기 이전에도 강우량을 측정하는 방법은 있었다. 손가락을 활용하는 방법이었다. 비가 온 뒤 축축하게 젖은 땅에 손가락을 꽂아보면 비가 얼마나 왔는지를 가늠할 수 있다. 많이 온 경우 손가락이 깊게 들어가고 적게 온 경우엔 손가락이 얼마 들어가지 않는다.

이 방법은 누구나 손쉽게 따라할 수 있지만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사람에 따라, 지역에 따라, 땅의 습성에 따라 측정값이 달라졌다. 이런 부정확한 방법으로는 각 지역에 비가 내린 양을 정확히 측정하기 어려웠다.

이를 알고 있었던 세자(훗날 문종)가 세종 23년(1441) 4월 말, 구리 그릇을 만들어 궁정에 설치한 뒤 비가 온 양을 측정해봤다. 구리 그릇에 모인 물의 깊이를 자로 재는 방식이었다.

실험은 성공적이었다. 그로부터 4개월 후 국가의 재정을 담당하는 호조에서 빗물 그릇을 제작해 사용하자는 건의가 나왔다. 당시 제작한 빗물 그릇은 직경이 8촌(대략 16cm), 길이가 2척(대략 41.4cm) 가량 되는 쇠로 만든 원통 모양이었다. 호조는 빗물 그릇을 중앙 관청뿐만 아니라 전국 관청의 뜰 가운데에 설치해 도별로 자료를 얻는 방안도 함께 건의했다.

그로부터 약 1년 뒤 세종은 호조에 빗물 그릇 제도를 확정하라고 명했다. 그리고 이때 빗물 그릇의 이름도 정해졌다. 바로 모두가 알고 있는 측우기다. 측우기의 규모는 원래 기획했던 것보다는 약간 작아졌다. 직경이 7촌(약 14cm), 길이가 1.5척(약 31.1cm)인 그릇을 쇠로 제작했다.

측우기는 당시 천문지리술수를 담당하는 관청인 서운관 앞마당에 설치됐다. 서운관 관원이 자로 빗물의 양을 측정해 날짜와 날씨를 함께 기록해 보고하도록 했다. 각 고을에서도 서울에서 주조한 측우기를 본따 만든 빗물 그릇을 관청에 설치했다.

자도 규격을 통일해 동일한 것을 사용했다. 고을의 사또는 비가 내리면 관청의 뜰에 설치된 측우기로 강우량을 측정해 보고서를 올렸다. 고을별로 올라온 강우량 자료는 각 도 감사들이 취합해 중앙 정부로 보고해야 했다. 즉 세종의 업적은 문종이 만든 측우기를 이용해 조정에서 조선 전역의 강우량 정보를 확인할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한 것이다.

세종은 조선만의 독창적인 과학을 하지 않았다. 과학동아 제공

●의혹 2. 세종은 조선만의 독창적인 과학을 했다?

세종 시기 이뤄진 과학 연구에 관해 읽다 보면 이때 일궈낸 연구가 중국 등 다른 나라의 영향을 받지 않고 오직 우리 힘으로 연구해 이뤄낸 독창적인 성과라는 표현을 자주 접하게 된다. 그 한 예가 세종 24년(1442)에 만들어진 조선 최초의 자주적 역법이라 불리는 ‘칠정산내편’과 ‘칠정산외편’(내편과 외편을 합쳐서 ‘칠정산’이라고 칭함)이다.

역법은 천체 현상을 기준으로 시간을 정하는 방법이다. 고려 말기까지 한반도는 중국에서 만들어진 역서를 받아 사용했는데 문제가 많았다. 중국과 한반도의 위치가 다른 만큼 해가 뜨고 지는 시각이나 낮밤의 길이 등에 오차가 생긴 것이다. 그런데 세종 시대에 완성한 칠정산을 적용해 역서를 계산한 이후부터는 이런 시간을 오차 없이 구할 수 있게 됐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정말 칠정산은 조선이 독자적으로 개발한 역법일까. 

세종 24년(1442) 한반도를 기준으로 일출, 일몰 시간과 낮밤의 길이를 계산할 수 있는 역법, ‘칠정산’이 완성됐다(좌), 간의는 세종 14년(1432) 만들어진 천문 관측기기다. 원나라 시기 만들어진 간의를 한양의 위치에 맞게 개량했다(우) / 서울대 규장각 한국학연구소, 문화재청 세종대왕유적관리소 제공

그렇지 않다. 칠정산은 중국의 여러 역법은 물론, 이슬람의 ‘회회력’ 법을 연구해 만든 계산법이었다. 세종은 등극 초기부터 조선 학자들이 중국의 여러 천문 역법서를 학습하도록 지시했다.

세종 12년(1430) 문신 정초가 원나라의 ‘수시력’을 연구해 일식과 월식의 계산을 그전보다 정확하게 할 수 있었던 것도 세종의 지시에 따른 결과였다. 세종 15년(1433)에는 문신 이순지와 김담에게 명나라의 ‘대통력’을 연구할 것을 지시했다. 이순지와 김담은 이즈음부터 제작되기 시작한 간의 등의 천문 관측기기로 실제 관측을 수행하며 ‘대통력’ 연구에 매진했다. 그 연구 결과가 칠정산내편의 초석이 됐다.

한편 이순지와 김담은 대통력을 연구하며 이슬람 역법도 함께 공부했다. 이슬람의 회회력은 일식과 월식 계산을 정밀하게 하는 역법이었다. 이순지와 김담은 회회력의 오류를 발견하고 고쳐나가며 한양의 경도와 위도를 반영해 칠정산외편을 편찬했다. 이 오류 교정은 명나라 천문학자들도 미처 하지 못했던 작업으로 두 학자가 각별한 노력을 기울였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완성된 칠정산은 조선의 달력을 만들고 일월식을 예측하는 데 활용됐다.

칠정산 편찬에 관한 이야기는 과학 연구에서 문화 교류의 중요성을 보여준다. 중국은 물론 머나먼 이슬람의 역법이 칠정산 편찬의 바탕이 됐다. 그렇다면 그동안 왜 칠정산은 자주적인 역법으로 알려졌을까. 일제강점기의 1세대 과학사학자들은 조선과학사를 일제 식민 정책에 대항하는 수단으로 봤다. 특히 세종 대의 과학 성과는 민족의식을 고양하기 적합했고 ‘세종 대 연구는 자주적 성과’라는 관점이 만들어졌다.

칠정산은 조선의 독창적 산물이 맞지만 그 독창성은 또한 다른 문화권의 교류를 통해 태어났다.

세종은 역법은 물론 훈민정음, 금속활자 등 여러 국가적 사업을 진두지휘했다.또한 본인이 직접 산법, 역법, 음악, 의학 등 다양한 분야를 배우고 익혀 국가의 창의적인 과학 사업으로 연결시키기도 했다. 과학동아 제공

●의혹 3. 그렇다면 세종이 한 것은 무엇인가.

조선 역법인 칠정산을 편찬했고 간의, 앙부일구, 자격루, 측우기 등 기상과 천문 현상을 측정하는 기기를 제작했으며 농서인 ‘농사직설’과 의학 백과사전인 ‘의방유취’를 편찬하는 등 세종 시대에 이뤄진 과학적 사업은 매우 많다. 하지만 세종이 직접 제작자로 참여했다고 볼 수는 없다.

그렇다면 세종은 이런 과학적 사업에서 어떤 역할을 수행한 것일까.

우선 그는 국가적 과학 사업이 시작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진두지휘했다. 특히 칠정산은 중국에서 하사하는 달력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문제가 있어 조선의 실정을 반영한 역서를 만드는 방법을 갖춰야 한다고 세종이 최초의 아이디어를 제시한 것이 분명해 보인다. 등극 초기부터 학자들에게 역법 공부를 명령한 것에서 그 단초를 볼 수 있다.

세종은 국가적 과학 사업이 차질없이 진행될 수 있도록 전심으로 후원하고 조력하는 역할도 했다. 일례로 역법 공부가 한창이던 세종 13년(1431) 중국어에 능통한 사역원 김간을 명나라로 보내 역법 계산에 필요한 수학 지식을 배워오게 했다.

당시 역법 연구에서 가장 발목을 잡고 있었던 것은 산법 지식이었기 때문이다. 또 역법 연구를 집중적으로 할 수 있는 기관인 역산소를 설립했을 뿐만 아니라 역법 연구에 성과가 있는 사람은 품계나 관직을 높여주는 혜택을 베풀기도 했다.

세종이 이처럼 국가의 과학 사업을 진흥시키고자 한 이유는 과학이 백성들의 삶을 편안하고 풍족하게 만드는 방법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농사에서 기후만큼 중요한 것이 바로 시기이다. 때에 맞춰 씨를 뿌리고, 키우고, 거두는 일을 해야 풍성한 수확을 거둘 수 있기 때문이다. 백성들은 국가에서 매년 반포하는 역서로 농사의 적절한 때를 알았다.

달력을 만들어 반포하는 일은 정치적으로도 중요했다. 조선시대에는 하늘의 명을 받았을 때 한 나라의 국왕이 될 수 있다는 ‘천명사상’이 자리하고 있었다. 이러한 생각에 따라 조선의 국왕은 하늘의 운행을 잘 읽어내고 파악해야 했다.

그 결과 세종은 지금까지도 전해지는 과학 유산을 남길 수 있었다. 이것이 세종의 이름에 ‘대왕’이라는 호칭이 붙는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필자소개
김슬기.
 서울대 과학학과 박사과정 연구원. 동아시아 전통 천문학사에 관심을 가지고 공부하고 있다. 

※관련기사
과학동아 7월호, [과학사 극장] 세종대왕이 측우기를 만든 게 아니다?
 

[김슬기 서울대 과학학과 박사과정 연구원,김태희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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