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물의 창자로 만든 콘돔을 썼다고?…세상에 환희와 평화를 가져다 준 이 물건 [김기철의 역사를 바꾼 사물들]

김기철 기자(kimin@mk.co.kr) 2023. 7. 29. 06: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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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 둥근 공이 없으면 인생이 얼마나 심심할까.

축구공, 야구공, 농구공, 테니스공, 럭비공, 골프공.

통통 튀는 이런 공들이 없으면 세상은 얼마나 삭막할까.

아이들은 친구들이랑 뭐하고 놀고, 어른들은 남는 시간을 뭐하면서 보낼까.

아마 즐거움은 사라지고 갈등과 싸움은 늘어날 것이다.

사실 인류가 공을 갖게 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1843년 미국의 찰스 굿이어가 생고무에 황을 첨가해 온도에 상관없이 고무의 성질을 안정시키는 가황처리기법을 발견한 뒤에야 가능한 일이었다.

고무는 인류에 즐거움과 평화를 가져온 소중한 물건이다.

어디 그뿐인가. 고무로 인해 바퀴는 비로소 완전해져서 인간이 탈 수 있는 이동수단이 됐다.

굿이어타이어의 창업자 폴 리치필드(Paul W. Litchfield)는 근대산업구조를 생명체에 비유해서 “금속이 뼈대, 석유가 피라면 고무는 생명체의 유연한 근육과 힘줄”이라고 했다.

축구공을 돌리고 있는 손흥민
바운스! 바운스! 세상을 뛰게 만든 재료, 고무
고무는 구대륙에는 없는 물건이었다.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처음 히스파뇰라섬(지금의 아이티)에 도착했을 때 원주민들이 통통 튀는 둥근 공을 가지고 노는 것을 봤다. 유럽인이 고무를 처음 접하는 순간이었다. 당시 유럽의 공은 보통 가죽으로 만들어서 안에 양털이나 깃털을 채워 넣어 만들었는데 원주민들의 공은 유럽인들의 공과는 차원이 달랐다.

1535년에 출간된 스페인의 아메리카 진출에 대해 쓴 최초의 공식기록서인 <인디언 일반사와 자연사>에 아메리카 대륙 원주민들이 갖고 노는 고무 공에 대한 기록이 있는데 당시 스페인어에는 없던 단어 ‘바운싱(bouncing)’을 설명하려고 애를 썼다.

“그 공들은 우리의 공보다 훨씬 높고 길게 점프했다. 단지 손에서 미끄러져 바닥에 살짝 닿기만 해도 시작점보다 훨씬 높이 솟아오르며 점프를 했다. 튀어오르기를 몇 번이나, 자꾸자꾸, 높이를 점점 줄여가면서, 마치 속이 빈 공처럼, 아니 그보다 훨씬 가볍게.”

1743년 프랑스 과학자 샤를-마리 드 라 콩다민은 아마존 탐험 여행을 했다. 이때 그는 두가지 중요한 발견을 했다. 한 가지는 말라리아 치료제인 퀴닌의 원료가 되는 신코나 나무이고 다른 한 가지는 현지의 원주민인 오마구아족이 사용하는 고무였다. 오마구아족은 나무에서 나온 액체를 이용해서 바구니 같은 것을 만들어 사용했다.

콩다민은 귀국 후 프랑스과학아카데미에 “한 차례 절개하면 나무에서 우윳빛 액체가 분비되는데 액체는 일단 공기와 만나면 점차 검게 굳어진다”고 고무에 대해 보고했다.

하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방수용 코팅 재료로 쓰이는 등 고무의 사용이 지극히 제한적이었다. 고무는 날이 더우면 끈적끈적해지고 냄새가 나며, 추울 때는 돌처럼 딱딱해지고 부서지기 쉬운 치명적 결함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고무가황법을 발견한 찰스 굿이어
미국의 파산한 실업가인 찰스 굿이어(Charles Goodyear)가 이 문제 해결에 매달렸다. 1839년 천연고무덩어리와 황을 혼합한 물질로 실험을 하다가 실수로 뜨거운 난로 위에 떨어뜨렸다. 난로 위에 떨어진 고무 덩어리가 내구성이 뛰어나고 탄성이 커질 뿐 아니라 절연성까지 갖춘 물질로 변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하지만 굿이어는 특허를 도둑맞았다. 자신이 개발한 고무줄 샘플을 한 청년에 주며 투자자를 알아봐 달라고 했는데 그 고무줄이 여러 사람의 손을 거쳐 1842년 영국 맨체스터에서 고무 처리법을 연구하던 토마스 핸콕의 실험실에 배달됐다. 그 고무줄의 가치를 단번에 알아차린 핸콕은 수백 차례 실험을 통해 방법을 알아냈다. 핸콕은 1844년 고무가황법에 대한 특허를 신청했다.

굿이어는 빈털터리로 세상을 떠났다. 굿이어타이어는 그와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회사다. 1898년 타이어 회사가 굿이어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그의 이름을 가져와 쓴 것뿐이다. 그래도 그 덕분에 그의 이름은 역사 속에 남아있다.

고무, 산업화의 힘줄이자 근육
1844년은 고무가황법 특허 등록이 이루어진 해이기도 하고 미국 워싱턴과 볼티모어 사이에 최초로 전신을 위한 전선이 설치된 해이도 하다. 이 두가지 일이 같은 해 일어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고무가황법으로 고무가 절연재료로서 완벽해졌기 때문에 장거리 전선의 설치가 가능해졌다. 고무는 전기와 전신의 상용화를 가속시킨 것이다.

1845년 마그네틱 전신회사를 설립한 사무엘 모스는 본격적으로 전신선 가설에 나서 1850년에만 미국 전역에 2만km의 전신선을 깔았고, 1861년에는 미국을 황단하는 전신망이 설치됐다. 이로써 처음으로 미국의 국토가 온전하게 하나로 연결될 수 있었다. 고무가 있어서 가능한 일이었다.

​1861년부터 1865년까지 미국과 유럽을 잇는 대서양 횡단 해저전신선 설치를 시도했으나 매번 실패했다. 1866년에는 미국과 유럽이 대서양을 횡단하는 전신선으로 연결됐으며 아프리카, 아시아, 호주에도 전신 시스템이 구축됐다.

이처럼 세계를 하나로 연결한 것도 고무의 성능이 개선돼 해저케이블 설치가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해저케이블 설치 경쟁은 지금까지 진행 중이다. 전 세계 데이터의 99%가 해저 케이블을 통해 전송되기 때문이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에 따르면, 전 세계 바다 밑에는 450개 이상 140만㎞에 달하는 해저 케이블이 깔려 있다.

19세기 후반은 내연기관, 전기와 통신이 본격화되는 시대였는데 사실 고무가 없었다면 이런 발명품들도 보편화되지 못했다.

자동차의 보급이 고무 수요을 폭발시켰다. 사진은 포드자동차의 설립자 핸리 포드의 모습.
우선 내연기관의 안을 한번 들여다 보자. 모든 내부 연소기관에는 물, 기름, 가솔린, 그리고 배기가스가 파이프와 밸브를 고압 상태로 흐른다. 따라서 파이프와 밸브의 이음새가 완벽하지 않으면 내연기관은 제대로 작동하기 어렵다. 이 문제를 해결해준 것이 탄성이 있는 고무의 성능 개선이었다.

내연기관의 동력전달 역시 고무의 힘에 크게 의지했다. 옛날 방앗간이나 경운기의 고무밸트를 생각하면 쉽게 이해가 된다. 기계장치의 힘줄 역할을 고무가 맡은 것이다.

전기와 통신이 보급되기 위해서는 선로 확장이 기본이다. 전신선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내구성과 절연성을 갖춘 물질이 필요했다. 그 재료로 역시 고무만한 것이 없었다.

이뿐 아니다. 전기제품의 경우에는 내부가 여러 회로로 연결돼 있는데 이런 회로도 고무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무엇보다 고무 수요를 폭발시킨 것은 자동차의 보급이었다. 19세기 후반, 전기와 통신, 내연기관, 자동차의 발전이 비약적으로 발전한 데에는 고무의 힘이 크게 작용했다.

제국주의 세력의 고무전쟁
전기와 통신, 자동차의 보급으로 고무에 대한 수요가 폭증했지만 당시까지 고무를 얻을 수 있는 방법은 단한가지였다. 아마존 유역에 집중적으로 서식하고 있는 고무나무인 히비어 브라질리엔시스(Hevea brasiliensis)에서 채취하는 방법뿐이었다.

고로쇠나무에서 고로쇠 수액을 채취하는 것처럼 고무나무에 상처를 내면 우윳빛 점액질 수액이 나오는데 그것을 그릇에 모아야 했다. 고무나무 한 그루에서 하루에 얻을 수 있는 양은 28그램이고, 1년에 100~140일만 수액이 흘러나온다.

고무 나무에서 라텍스를 채취하는 모슴
이렇게 생산량이 제한되다보니 고무값이 천정부지로 뛰었고 검은 금을 얻기 위해 경쟁적으로 아마존에 몰려 들었다.

초창기 대부분의 고무는 아마존 하구 항구도시 벨렝 근처에서 채취했다. 하지만 고무 수요를 감당할 수 없게 되자 점점 아마존 상류로 올라갔다. 브라질 역사학자 로베르토 산토스의 추산에 따르면 19세기 후반 아마존 일대에만 2만5000개의 고무 농장이 있었다. 포드자동차의 경우에는 아마존 중류인 산타렝에 포드랜디아라는 고무공장을 직접 운영하기도 했다.

19세기말이 되자 브라질은 연간 1400만 파운드 어치의 고무 2만 1500톤을 수출했고, 10년 후에는 수출량이 두배로 뛰어서 2460만 파운드 어치, 4만 2000톤이 되었다. 이것은 당시 브라질 무역액의 40%에 해당하는 규모였다.

고무 확보 경쟁 속에서 끔찍하게 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갔다. 노동자들이 작업을 해야할 곳이 말라리아를 포함해 각종 풍토병이 득시글거리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고무 수송 철도 건설을 위해 미국의 기업가 네빌 B. 크레이그가 1878년 2월 19일 700명의 인부를 데리고 산투안토니우에 도착했는데 1년 뒤인 1879년 1월까지 살아남은 사람은 120명에 불과할 정도였다.

이런 위험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아마존으로 몰려들었다. 계속해서 고무 가격이 미친 듯이 뛰었기 때문이다. ‘타임스’는 1910년 3월 20일자에 “제조업자의 공정을 거쳐 사용 가능한 원료가 된 고무 1온스(28그램)은 순은과 맞먹는 가격이 매겨졌다”고 보도했다.

브라질 아마존에만 의존하던 서구 제국주의 국가들은 새로운 방법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역시 제국주의의 선두 영국이 앞장섰다.

1873년 헨리 위컴이라는 젊은 영국인은 산타렝 인근에서 담배와 사탕수수 플랜테이션을 경영하고 있었다. 농장은 생각보다 잘 굴러가지 않았다. 그때 위컴은 본국의 명망있는 식물학자 조셉 후커 경으로부터 고무 종자를 구해달라는 편지를 받는다. ‘비용을 아끼지 말고 살아 있는 종자로, 상업용 진짜 파라 고무를 생산할 수 있는 나무의 종자들로만 구해주시오.’

위컴은 인디오를 고용해 아마존강 상류로 가서 종자를 모으기 시작했다. 그가 모은 씨앗은 모두 7만개가 넘었다. 문제는 통관이었다. 이때 영국 영사 토머스 그린이 나섰다. 그는 세관소장에게 “대영제국 큐왕립식물원으로 송달되도록 특별히 지정된 극도로 섬세한 식물 표본이 실려 있다는 설명을 들었다”고 말해 검역을 피했다. 이렇게 해서 영국은 고무나무 종자를 얻었다. 말하자면 위컴은 ‘고무 종자의 문익점’인 셈이다. 오늘날까지 위컴은 브라질에서 ‘도둑놈 중에서도 상도둑놈’으로 통한다.

이렇게 확보한 종자로 영국은 동남아시아 식민지에서 고무 플랜테이션을 시작했다. 먼저 1876년 런던의 큐왕립식물원에서 고무나무 묘목을 들여다 싱가포르에 이식하는 시험 재배를 시작했고 1890년대초부터 말레이 반도에서 고무 재배를 시작했다. 당시 싱가포르식물원에 주임으로 부임했던 리들리(H. N. Riddley)는 고무 재배를 독려해 ‘고무광 리들리’로 불리기도 했다. 영국 식민 당국은 법과 제도를 총동원하여 유럽 자본가들의 고무 플랜테이션 투자를 지원했다. 우선 말레이국연방에서 토지를 대규모로 100년간 장기 임차할 수있도록 토지임대차령을 제정했다. 이를 통해 유럽인 플랜테이션 투자자들이 쉽게 고무 농장 부지를 확보할 수 있도록했다.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가 말레이국연방 페락주의 경우에는 중국인과 말레이인이 소유한 나대지를 유럽인 투자자가 무상으로 이용할 수 있도록 했다.

고무 플랜테이션 농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도 식민 당국이 직접 통제했다. 특히 1907년 영국 식민 당국은 인도인이민위원회와 타밀인 이민기금을 각각 개설해 인도인 노동자들의 유입을 유도했다. 1940년까지 말레이반도에 유입된 고무 플랜테이션 노동자의 74%는 인도인이었다.

이와 같은 유럽 식민당국의 적극적인 투자와 지원으로 고무의 최대 생산지가 아마존에서 동남아시아로 바뀌었다. 1970년 설립된 천연고무생산국협회(Association of Natural Rubber Producing Countries)에는 인도, 방글라데시, 태국,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중국 등 12개 아시아 국가들이 회원국으로 가입돼있다. 이중 태국,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가 세계 천연고무 생산의 80%를 차지한다.

고무로 공이 만들어지고 세상이 즐거워졌다
멕시코를 정복한 에르난 코르테스는 1528년 스페인 궁정으로 전리품을 가져와 자신의 공적을 자랑했다. 그 중에는 끌려온 아즈텍인들도 있었다 이 아스텍인들은 두팀으로 나뉘어 작은 공을 사용한 전통게임 울라마(Ulama)를 시연해 보였다. 고무공을 활용한 스포츠가 유럽에 처음으로 소개되는 순간이었다.

세계 어느 지역이나 고대부터 축구와 비슷한 운동경기가 존재했다. 하지만 현대축구의 시작은 1863년 영국에 축구협회(FA·Football Association)가 창립된 때로 꼽는다.

왜 이 때 축구가 공식 스포츠 경기가 될 수 있었을까? 고무가황법의 정착으로 공기를 주입한 공이 세상에 선보였기 때문이다.

1872년 영국 축구협회는 축구공의 기준을 정하기도 했는데 공의 평균 둘레는 약 175~180mm, 무게는 369~425g이어야 했다. 이후 몇차례 변화를 거쳐 지금의 표준 축구공이 자리를 잡았다.

축구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지금 즐기고 있는 대부분의 구기 종목은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반에 시작됐다.

배구의 경우 1895년 미국 매사추세츠주 홀리오크시에 있는 YMCA 체육지도자 윌리엄. G. 모건이 처음 고안했고 농구도 1891년 미국의 메사추세츠주 스프링필드의 YMCA에서 겨울철에 즐길 수 있는 실내 스포츠로 창안됐다.

12세기 프랑스에서 시작된 ‘라뽐므(La Paume)’에서 유래했다는 테니스도 지금과 같은 모습의 스포츠가 된 것은 1873년 인도 주재군 소령이었던 윙필드가 경기 체계를 세운 뒤에 가능했다. 역시 고무로 테니스 공을 만들 수 있어서 가능한 일이었다.

야구와 골프처럼 딱딱한 공을 사용하는 스포츠도 마찬가지다.18세기 이전에 영국에서 배트와 볼을 사용하는 경기가 있었다지만 오늘날과 비슷한 경기로 발전한 것은 카트라이트(Cartwright,A.)가 1845년 뉴욕에서 세계 최초의 야구팀인 니커보커 야구협회를 조직한 뒤였다.

골프도 14세기 스코틀랜드의 양치기들이 시작했지만 당시에는 나무공이나 깃털로 만든 공을 사용했다. 나무공은 아무리 세게 쳐도 비거리가 70m 이상 날아가지 못해 지금의 골프보다는 진짜 자치기와 더 가까웠다. 역시 골프가 지금과 같은 스포츠가 된 것은 19세기 중반 고무공을 사용한 뒤부터였다. 1860년 제1회 영국 오픈 선수권 대회, 디오픈(The Open)이 시작됐다.

골프공 표면에 구멍(딤플)을 만들면 공기 저항이 줄어들어 비거리가 더 늘어난다는 점이 발견돼 1897년 이에 대한 특허 등록이 이루어졌다.

고무가 발견되고 가황법으로 성능이 개선되지 않았다면 공을 이용하는 많은 현대스포츠는 탄생할 수 없었다. 고무는 우리에게 즐거움과 환희를 가져다준 소중한 물건이다.

고무가 가져다 준 안전하고 즐거운 성생활
고무가 인류에게 가져온 또 하나의 선물은 바로 콘돔이다. 콘돔은 원하지 않는 임신을 막고, 성병의 전염을 막는 등 인류의 성생활에 크게 기여한 물건이다.

사실 콘돔은 기원전부터 사용하던 대표적인 피임기구다. 하지만 고무가 나오기 전에 사람들이 쓰던 콘돔은 직물로 만들거나, 아니면 동물의 창자나 생선의 방광으로 만들었다. 당연히 피임 효과가 떨어질 뿐 아니라 사용하기도 꺼림직했다.

이런 문제를 해결해준 것이 고무가황법이었다. 고무로 만든 콘돔은 위생적인데다 효과적으로 성병과 피임을 막을 수 있는 수단이었지만, 문란한 성생활을 조장한다는 비판을 받았다. 이로 인해 콘돔을 판매하거나 광고하는 행위를 금지하는 국가가 많았다.

콘돔의 사용을 확산시킨 것은 1차 세계대전이었다. 전쟁 중에 참전 군인들 사이에 매독이 유행하면서 이를 막는 것이 전투력을 유지하기 위해 중요했기 때문이다. 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을 모는 참전국들 주저없이 병사들에게 콘돔을 의무적으로 보급했다.

일본은 1950년대부터 세계 콘돔 시장에 존재감을 드러냈다. 오카모토주식회사가 인구억제정책의 보조 수단으로 콘돔을 생산하고 판매해, 일본은 1960년대말 세계 콘돔 생산량의 35.5%를 차지했다.

1980년대부터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린 콘돔은 영국의 듀렉스로 지금은 영국과 네덜란드계 다국적 기업으로 통합되었다. 2000년 이후 세계 시장점유율 1위 콘돔 회사는 한국의 유니더스로 현재는 사명이 블루베리NFT로 바뀌었다.

콘돔은 고무 기술의 발전과 성생활의 변화에 따라 다양한 형태로 변모해왔다. 1929년 런던러버컴퍼니가 화학물질을 첨가하지 않은 라텍스를 사용하는 안전한 콘돔을 내놨다.

지금은 바나나, 딸기, 초코, 재스민향 등 취향에 따라 향을 선택할 수 있는 콘돔도 있고 어두운 곳에 가면 빛이 나는 야광콘돔, 크기를 가늠할 수 있는 눈금자가 그려진 콘돔도 있다.

성감이 떨어지는 단점 때문에 콘돔을 기피하는 사람들을 위한 제품들도 있다. 일반적인 콘돔의 두께는 0.05mm~0.08mm이지만 0.03mm인 초박형 콘돔, 이보다 얇은 0.02mm 이하인 극초박형도 있다. 또 겉표면을 다양한 모양으로 만든 콘돔도 있다.

콘돔 사용이 보편화됐지만 남아메리카와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지역에서는 여전히 콘돔을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고 한다. 특히 가톨릭에서는 인공피임 방법인 콘돔 사용을 여전히 금지하고 있다.

고무로 혁신을 이룬 꼬리에 꼬리를 무는 기업사
비록 굿이어는 창업자의 이름은 아니지만 고무로 혁신을 이룬 기업들은 대부분 창업자의 이름을 기업의 이름으로 사용하고 있다.

처음으로 공기압 타이어를 상용화한 사람은 영국의 의사 존 보이드 던롭(John Boyd Dunlop)이다. 세발자전거를 타는 아들이 엉덩이가 아파하는 것을 보고 고무를 이용한 공기압 타이어를 개발했다. 공기압 타이어로 자전거의 승차감이 획기적으로 좋아지면서 자전거 열풍이 불었다.

프랑스에서 고무로 된 방수재료 회사를 운영하던 형제의 가게에 한 손님이 던롭 타이어 펑크를 때워달라고 찾아온다. 자전거 타이어를 유심히 살피던 형제는 공기주입 타이어를 착탈식으로 만들면 효과적이겠다는 아이디어로 회사를 차린다. 그 형제의 이름은 앙드레 미슐랭과 에두아르 미슐랭이다. 1891년 자전거 경주대회에서 미슐랭의 교체형 타이어를 사용한 선수가 경주 중에 타이어가 펑크가 났지만 즉시 교체할 수 있었던 덕에 우승했다. 이 덕분에 미슐랭은 자전거 타이어 시장을 장악했다.

자전거 시장을 평정한 미슐랭은 1900년에 자동차 타이어 시장에 진출한다. 하지만 판매가 부진했다. 마케팅 차원에서 자동차여행 안내 책자를 만들자는 아이디어가 나왔다. 주요 여행지를 소개하고 그 사이에 미슐랭 타이어 서비스를 받을 수 있는 지점들을 안내하자는 것이었다. 여행 안내 책자에 여행지에서 믿을 수 있는 호텔과 식당도 소개를 했는데 이것이 발전해서 오늘날의 ‘미슐랭 가이드’가 됐다.

세계 최고의 자전거 경주대회인 ‘투르 드 프랑스’도 미슐랭과 관련이 있다. 드레퓌스 사건으로 프랑스가 양분되서 극심한 갈등을 겪을 때 드레퓌스가 유죄라는 주장을 널리 알리기 위해서 한 언론사가 개최한 정치적 이벤트가 투르 드 프랑스였다. 나중에 드레퓌스가 무죄로 밝혀졌기에 그 언론사의 주장은 분명 잘못된 것이었다. 이렇게 나쁜 동기로 시작된 대회였지만 투드 드 프랑스는 가장 권위있는 경주로 자리 잡았다.

세계 최고 권위의 자전거 경주대회인 투르 드 프랑스가 펼쳐지는 모습
자동차 회사를 시작했으나 투자자를 찾지 못해 전전긍긍하던 핸리 포드는 1901년 투자자를 찾기 위해서 자동차 경주대회에 출전한다. 이때 포드 자동차에 장착한 타이어는 하비 파이어스톤이라는 타이어 회사 영업사원 출신이 막 시작한 회사의 타이어였다. 그 자동차 대회에서 포드가 우승하면서 포드와 파이어스톤은 사업 파트너로 승승장구하게 된다.

일본에서 신발 고무밑창을 만들던 이시바시 쇼지로(石橋正二郞·1889~1976)는 일본에도 자동차 산업이 활기를 뛰자 타이어 회사를 만든다. 자신의 성인 ‘이시바시(石橋)’를 영문으로 회사이름을 만드는데 ‘석(石)+교(橋)’면 ‘스톤(Stone)+브릿지(Bridge)’가 되어야 하는데 이를 뒤집어 브릿지스톤(Bridgestone)이라고 했다. 당시 세계 최대 타이어회사였던 파이어스톤을 따라한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일본 경제가 쾌속 질주하던 1988년 브릿지스톤은 파이어스톤을 인수하게 된다.

브릿지스톤은 골프공으로도 사업 영역을 확장하는데 브릿지스톤 골프용품을 한국에 수입하는 회사의 이름은 창업자의 이름 그대로 ‘석교(石橋)상사’다.

일본 기업이 인수한 글로벌 타이어 회사는 파이어스톤만이 아니다. 최초로 공기압 타이어를 만든 던롭도 일본 기업에 인수됐다.

던롭은 일찍이 1909년 일본 시장에 진출해 일본의 재벌인 스미토모와 제휴해 던롭 재팬을 만든다. 1963년 던롭 재팬은 던롭으로부터 독립을 해서 스미토모고무공업(Smitomo Rubber Industry·SRI)입니다. 역시 일본이 제일 잘나가던 1986년 SRI는 경영난에 허덕이고 있던 영국 던롭을 인수해버렸다. 다른 고무 회사들처럼 SRI도 골프용품 자회사를 만드는데 그것이 바로 ‘스릭슨(SRIxon)’이다. 스포츠용품 기업이 ‘던롭 스릭슨’으로 묶여 있는 이유가 바로 이런 역사적 과정 때문이다.

미국 매사추세츠주 아쿠쉬네트에서 작은 고무회사를 운영하던 필 영(Phil Young)은 치과의사 친구와 골프 라운드를 나갔다. 그린 위에서 퍼팅을 했는데 공이 생각하는 방향과 다르게 굴러갔다. 영은 자신의 퍼팅 스트로크가 아니라 골프공에 문제가 있다고 판단하고 친구 병원에 가서 골프볼을 X-ray로 촬영했다. 그는 치명적인 결함을 발견했다. 코어가 정중앙에 위치해 있지 않고 제각각이었던 것이다. 영은 MIT 동문이자 고무전문가인 프레드 보머를 초빙해 3년간 제품개발에 착수해 1935년 첫 작품을 탄생시켰는데 그 골프공이 바로 ‘타이틀리스트’다. 세계 1위 골프공인 타이틀리스트의 주인이 지난 2012년 휠라코리아로 바뀌게 된다.

합성고무의 시대에도 흔들리지 않는 천연고무의 위상
2차 세계대전은 고무 위기를 나았다. 우선 가장 중요한 고무 생산지인 동남아시아 지역이 일본과 미국간 태평양전쟁이 벌어지는 전쟁터가 됐기 때문에 고무 공급에 문제가 발생했다. 태평양전쟁 이후 일본이 동남아시아를 장악하면서 천연고무 공급의 90%가 끊겼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의 고무 모으기 운동 포스터
여기에 전쟁이라는 상황이 고무 수요를 폭발시켰다. 셔먼 전차 한 대에 들어가는 고무만 해도 0.5t이었다. 항공기에는 1.5t이었다. 전함 한 대를 만드는 데 소요되는 개별 부품 중 2만여 개에 고무 75t이 들어갔다.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데 턱없이 부족했다. 방수, 방풍, 방진, 방음, 신축, 유연의 기능을 두루 갖춘 재료는 고무 외에 다른 대체재가 없었기 때문이다.

미국 프랭클린 루스벨트(Franklin Roosevelt) 대통령은 2차 세계대전 중 고무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고무의 민간 사용을 제한했다. 그리고 합성고무 산업에 국력을 집중했다.

고무비축공사(Rubber Reserve Company)를 설립해 고무의 수입, 생산, 판매 등을 중앙에서 통제하고 경쟁관계에 있던 굿리치(Goodrich), 굿이어(Goodyear), 유에스고무공업(United States Rubber) 등의 회사가 기술정보 협력을 하도록 했다. 미 정부는 고무공장, 석유화학회사, 대학연구소를 통합해 개발을 지원했는데 하버드대와 매사추세츠공대(MIT)의 톱 브레인도 팀에 포함됐다. 초기 목표는 1941년 231t의 합성고무를 생산하기 시작해 1945년까지 매년 7만t을 생산할 수 있는 기술과 생산기반 시설을 갖추는 것이었다.

고무개발 프로젝트가 본격 가동된 지 8개월 만인 1942년 3월, 개발팀은 1933년 독일의 한 화학자가 개발한 스티렌-부타디엔 혼합방식(SBR)으로 합성고무를 만들 것을 제안했고 정부는 이를 승인했다. 정부 제시 기준을 충족하는 제품이 처음 나온 것은 1942년 4월 파이어스톤(Firestone)의 공장이었고 이후 합성고무가 보편화됐다.

화학산업의 발전으로 합성고무가 보편화됐지만 여전히 천연고무의 위상은 건재하다. 천연고무가 지닌 마모와 진동에 대한 저항성은 여전히 합성고무가 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천연고무의 시장점유율은 지금도 40%가 넘고 오히려 점유율이 오르는 추세다. 의료용 고무제품은 천연고무를 사용해야 의료용 살균기에서 스팀 살균이 가능하고, 유리와 강철의 완벽한 접지를 위해서는 역시 천연고무를 사용해야 한다. 대형 비행기와 트럭의 타이어는 아직도 100% 천연고무로 만들어진다. 이 밖에 하이테크 산업과 가스·수도·원자력발전 분야에도 고성능 호스, 개스킷, O링 재료로 천연고무가 쓰인다. 천연고무의 위상은 앞으로도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

역사의 행로를 사람들이 결정하는 것 같지만 사실 지구 위의 여러 생물들과 자원, 물건들이 결정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김기철의 역사를 바꾼 사물들>은 인류 역사의 방향을 결정한 사물들과 그것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사람들의 분투에 얽힌 재밌는 이야기를 들려드릴 예정입니다. 기자 페이지(https://media.naver.com/journalist/009/75254)를 구독하면 빼먹지 않고 이야기를 들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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