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광훈의 산인만필(散人漫筆) <28>] “나는 장강(長江)의 머리에 살고, 그대는 장강의 꼬리에 살고”

홍광훈 2023. 7. 24. 1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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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구한 세월 동안 수많은 사람의 애환이 서려 있는 장강. 사진 셔터스톡

북송 후기의 이지의(李之儀·1048~1127)는 단 한 편의 사(詞)가 인구(人口)에 회자(膾炙)됨으로써 저명 사인(詞人)의 대열에 들었다. 그는 불과 20세의 어린 나이로 과거에 급제해 관계에 첫발을 디뎠다. 1083년에는 고려의 문종(文宗)이 죽자, 조문 사절단의 서장관(書狀官) 신분으로 고려에 다녀간 적도 있다.

그의 벼슬길은 순탄하지 않았다. 범순인(范純仁)이나 소식(蘇軾) 등 구법당(舊法黨)의 인사들과 친분이 두터웠기 때문이다. 특히 소식이 당쟁에 휘말려 누차 수난을 당하자, 그도 신법당(新法黨)으로부터 많은 박해를 받았다. 50세가 넘어 감옥에 갇히기도 했다. 그는 이렇게 자조(自嘲)했다. “동파가 먼 곳으로 내몰린 것은 말이 많았던 탓인데, 나는 아무 말 않으려 했는데도 온전하지 못하구나(東坡流落坐多言, 我欲無言亦未全)!”

감옥에서 풀려난 이지의는 태평주(太平州)라는 지방의 관리로 좌천됐다. 장강 하류의 남쪽 연안에 있는 지금의 당투(當塗) 지역이다. 그와 교분이 두터웠던 황정견(黃庭堅)이 마침 그곳의 지주(知州)로 있어서 그나마 위안이 됐다. 그러나 여기서 그는 더 큰 불행을 당해야 했다. 그곳에서 살던 4년 동안 아들 부부, 딸, 손자가 차례로 죽고 마지막에는 아내마저 떠나보냈다. 그리고 자신도 온몸에 피부병이 생겨 고통이 심했다.

홍광훈문화평론가, 국립대만대학 중문학 박사, 전 서울신문 기자, 전 서울여대 교수

어느 날 황정견이 혼자 남은 벗을 위로하려고 주연을 마련했다. 이 자리에 아직 20세가 안 된 가기(歌妓) 양주(楊姝)가 부름을 받고 와서 거문고를 타며 노래를 불렀다. 삶의 의욕조차 잃어버린 것 같았던 그는 새 희망을 얻었다. 가슴을 울리는 거문고 소리와 노래를 들려주는 젊은 가기의 아리따운 모습이 그의 마음을 움직인 것이다. 그의 사 중 ‘양주의 거문고 소리를 듣다(聽楊姝琴)’라는 부제가 붙은 ‘청평악(淸平樂)’의 마지막에 “저절로 가려운 곳도 모두 사라져 버렸네(自然癢處都消)”라는 구절이 있다. 양주가 그에게 얼마나 큰 힘을 주었는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고백이다. 이 인연으로 두 사람은 꽤 많은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서로 마음이 통하는 사이로 발전하게 된다.

얼마 뒤 이지의는 조정의 명으로 지금의 쓰촨성(四川省) 청두(成都)로 부임했다. 당투에서 서쪽으로 수천 리나 먼 곳으로, 역시 장강 상류의 큰 지류인 민강(岷江)을 끼고 있다. 거기서 그는 양주에게 편지와 사를 써 보냈다. 그중에 천고절창(千古絶唱)으로 칭송되는 ‘복산자(卜算子)’가 있다.

“나는 장강의 머리에 살고, 그대는 장강의 꼬리에 살고. 날마다 그대 생각해도 그대는 볼 수 없지만, 함께 장강의 물을 마신다오(我住長江頭, 君住長江尾. 日日思君不見君, 共飲長江水). 이 물은 언제나 그치고, 이 한은 어느 때나 끝나리오. 다만 그대 마음이 내 마음 같기를 바라오니, 정녕코 그리워하는 뜻 저버리지 않으리(此水幾時休, 此恨何時已. 只願君心似我心, 定不負相思意).”

임기가 끝난 이지의는 다시 당투로 돌아갔다. 그리고 나이와 신분의 차이를 극복하고 양주와 정식으로 재혼, 아들과 딸을 하나씩 낳은 것으로 전해진다. 인생의 나락까지 떨어졌던 그가 뒤늦게 ‘운명의 여인’을 만남으로써 새로운 행복을 얻은 셈이다. 이후로도 관계에서의 우여곡절이 적지 않았던 그는 더 이상 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20여 년의 여생을 당투에서 보냈다.

후한 중기의 진가(秦嘉)와 서숙(徐淑)은 중국 최초의 부부 시인으로 유명하다. 남북조시대 양(梁)의 종영(鍾嶸)은 ‘시품(詩品)’에서 두 사람에 대해 “그들의 일은 가슴 아프고, 시 또한 처량함과 한스러움이 담겨 있다(夫妻事旣可傷, 文亦淒怨)”고 말했다.

지금의 간쑤성(甘肅省) 출신인 진가는 지역의 하급 관리로 재직하던 도중 도성 뤄양(洛陽)에 파견되기로 정해졌다. 그의 아내는 병이 들어 고향에 돌아가 있었다. 아내를 데려오기 위해 수레를 보냈으나 병이 깊어 도저히 함께 갈 수 없었다. 섭섭한 마음으로 혼자 떠난 진가는 얼마 뒤에 타향에서 아내보다 먼저 병으로 객사하고 말았다. 그 길지 않은 나날 동안 부부 사이에 여러 차례 편지와 시가 오갔다. 진가가 서숙에게 보낸 ‘증부시(贈婦詩)’ 3수는 이렇게 시작된다. “인생은 아침 이슬 같고, 세상살이는 어려움이 많소. 근심 걱정은 늘 일찍 오고, 기쁜 만남은 늘 늦어 안타깝소(人生譬朝露, 居世多屯蹇. 憂艱常早至, 歡會常苦晚).”

이어서 그는 아내와 만나지 못하고 떠나는 아쉬움과 외로운 마음을 하소연했다. “수레를 보내 그대를 맞이하려 했으나, 빈 채로 갔다가 빈 채로 돌아왔소. 그대의 편지를 보고 내 마음은 더욱 슬퍼져, 밥상을 앞에 두고도 먹을 수가 없소. 홀로 빈방 안에 앉아 있으니, 누가 내게 힘내라고 북돋아 주리오. 긴 밤 잠 못 이루어, 베개에 엎드려 홀로 뒤척인다오. 근심은 돌아가는 고리처럼 끝없이 밀려오는데, 돗자리가 아니라 말아버리지도 못한다오(遣車迎子還, 空往復空返. 省書情悽愴, 臨食不能飯. 獨坐空房中, 誰與相勸勉. 長夜不能眠, 伏枕獨輾轉. 憂來如循環, 匪席不可卷).”

서숙은 다음 시로 답했다. “이 몸이 좋지 못해, 병에 걸려 돌아왔어요. 집 안에 머물러 있으나, 날이 가도 나아지지 않아요. 곁에서 모시지 못하니, 그대 사랑하는 마음과 어긋나요. 그대는 지금 명을 받들어, 먼 도성에 가시는군요. 길고 긴 이별인데, 속마음을 풀 수 없어 안타까워요. 멀리 바라보며 달려가고 싶으나, 그냥 우두커니 서서 서성거려요. 그대 생각에 근심이 맺혀, 꿈에서도 멋진 모습 그려요. 그대가 먼 길 떠나면, 이 몸과는 날로 멀어지겠지요. 날개가 없어 한스러우니, 높이 날아 쫓아가지도 못하는군요. 그대 그리워하는 말 길게 되뇌며 깊은 한숨 내쉬니, 눈물이 흘러 옷을 적셔요.”

진가는 궁중 관리로 임명됐다가 지방 순회 길에 나선 황제를 시종하던 도중에 병사했다. 서숙이 직접 현지로 달려가 남편의 유해를 운구해 온 뒤 고향에 안장했다. 친정에서 재혼을 강요하자 서숙은 스스로 얼굴을 망가뜨리고 따르지 않았다. 그리고 몇 해가 지나지 않아 그녀도 세상을 떠났다. 이러한 서숙을 두고 당(唐) 초기의 사학자 유지기(劉知幾)는 그의 사학 이론서 ‘사통(史通)’에서 이렇게 평했다. “움직임이 예의에 들어맞고 말이 규범을 이루었으니, 얼굴을 망가뜨리고 시집가지 않다가 애통한 끝에 삶을 마쳤다. 이야말로 재주와 덕성이 함께 훌륭한 여성이다(動合禮儀, 言成規矩. 毀形不嫁, 哀慟傷生. 此則才德兼美者也).”

남북조시대 양(梁)의 서비(徐悱)와 유영한(劉令嫻) 두 사람 역시 부부 시인으로 꽤 알려져 있다. 이들도 서로 떨어져 있으면서 시를 주고 받았다. 남편이 보낸 시는 ‘증내시(贈內詩)’, 아내가 보낸 시는 ‘답외시(答外詩)’다. 서비가 일찍 죽자, 유영한이 직접 제문을 지어 애도함으로써 더욱 유명해졌다.

이백(李白)도 아내에게 보내는 시를 10여 편이나 남겼다. 그중 ‘증내(贈內)’라는 작품이 재미있다. “일 년 삼백육십일을, 날마다 진흙처럼 취했노라. 비록 이백의 아내가 되었다 하나, 태상의 아내와 어찌 다르리(三百六十日, 日日醉如泥. 雖爲李白婦, 何異太常妻).” 천하의 주선(酒仙)이 아니면 쓸 수 없는 시다. 남편의 도리를 제대로 하지 못하면서도 전혀 미안해하는 구석이 보이지 않는다. ‘태상처’란 ‘후한서’의 ‘유림(儒林)열전’에 보이는 주택(周澤)의 고사다. 주택은 종묘를 관장하는 태상을 맡으면서 직무에 충실하기 위해 매일 경건한 몸가짐으로 종묘에서 기거했다. 어느 날 병에 걸린 그를 걱정해 아내가 찾아왔다. 그는 아내가 금기를 범했다고 크게 노해 상소를 올려 아내를 감옥에 가두어달라고 청했다. 당시 사람들은 이를 다음과 같이 비꼬았다. “세상에 태어나 운이 좋지 못해 태상의 아내가 되었네. 일 년 삼백육십일에 삼백오십구일을 재계한다네.”

이에 비해 이상은(李商隱)의 ‘야우기북(夜雨寄北·밤비 속에 북쪽으로 부침)’에는 적이 애잔한 마음이 담겨 있다. “그대가 돌아갈 날 물으나 나도 그날을 모르니, 파산의 밤비에 가을 못물이 불었다오. 언제 함께 서쪽 창가에서 촛불 심지 잘라가며, 다시금 파산의 밤비 왔을 때를 말하리오(君問歸期未有期, 巴山夜雨漲秋池. 何當共剪西窗燭, 卻話巴山夜雨時).” 벼슬살이로 각지를 전전하던 시인이 서남쪽의 파산에서 수도 장안의 아내가 보낸 편지를 받고 써 보낸 시다. 그러나 그때는 아내가 이미 병으로 세상을 떠난 뒤였다. 아내에 대한 그리움이 너무 컸던 그는 홀아비로 살다가 7년 뒤 40대 초반의 젊은 나이에 아내의 뒤를 따랐다.

이 세상에 부부로 살아가는 모습도 각양각색이고 천태만상이다. 어떻게 사는 것이 가장 모범적이고 이상적인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그저 각자의 취향과 적성대로 살아갈 일이다. 그러나 적어도 기본적인 도리는 지키면서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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