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의 스타일이 된 스타 디자이너, 알폰스 무하 [송주영의 맛있게 그림보기]

2023. 7. 24. 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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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현대 일러스트, 그래픽디자인, 애니메이션의 출발
편집자주
아무리 유명한 예술작품도 나에게 의미가 없다면 텅 빈 감상에 그칩니다. 한 장의 그림이 한 사람의 삶을 바꿀 수도 있습니다. 맛있게 그림보기는 삶의 의미를 찾아가는 그림 이야기입니다. 미술교육자 송주영이 안내합니다.
알폰스 무하, 연극 '지스몽다' 포스터, 215x76cm, 1895년.

1895년 1월 1일 프랑스 파리, 사람들이 거리에서 “올해도 좋은 일만 가득하길 바란다”며 새해 인사를 나누고 있다. 서로에게 빌어준 행운 덕분이었을까? 그들의 눈에 건물 벽에 붙어 있는 커다란 그림 한 장이 들어왔다. “아니, 이 그림? 배우 사라 베른하르트 아닌가요?” “그러게요. 연극 지스몽다 포스터 같은데, 너무 아름다워요!” 그때 누군가 외쳤다. “앗, 저기! 이 포스터를 붙이는 사람이 있어요!” 그러자 사람들이 포스터를 붙이려는 소년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사라지자 기다렸다는 듯, 한 사내가 “자, 그럼 이건 내가 가져가야지”라며 조심스럽게 그림을 떼어낸다. “이건 포스터가 아니야. 이건 예술이야.”

알폰스 무하는 그렇게 하루아침에 유명 화가가 됐다. “연극 흥행을 일으킬 새로운 포스터가 필요하다”는 성화에 못 이긴 베른하르트의 비서가 부랴부랴 인쇄소로 달려갔던 날은 모든 직원들이 쉬는 크리스마스이브였다. 홀로 인쇄소를 지키고 있던 34세의 무하에게 찾아온 이 날의 뜬금없는 의뢰가 그의 인생을 바꾸었다. 사람들은 “누구나 살면서 세 번의 기회가 있다”는 속담을 인용하거나 ‘귀인’이라는 말을 떠올리기도 한다. 평범한 삽화가였던 무하가 하루 만에 유명인이 된 사건은 분명 흥미롭다. 그러나 기회와 행운은 준비된 사람의 몫이다. 무하는 ‘체코의 국민화가’라는 이름을 남기기에 충분했던 준비된 예술가였다.


준비된 사람에게 찾아오는 귀인과 행운

알폰스 무하의 1899년(왼쪽)과 1896년 모습.

무하는 1860년 체코 남부지역 모라비아에서 태어났다. 19세의 무하는 화가의 꿈을 안고 프라하 미술대에 지원했지만 낙방했고, 비엔나의 유명 극장 무대미술팀 견습생이 됐다. 그러나 화재로 극장이 소실돼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야 했다. 이때 그는 첫 번째 ‘귀인’을 만나게 된다. 모라비아 지역의 지주였던 쿠엔 벨라시 백작이 그의 재능을 알아보고 후원자가 됐다. 벨라시 백작의 지원 아래, 무하는 독일 뮌헨 미술대에서 공부했다. 그러나 바이에른 법령이 바뀌면서 거주에 문제가 발생하자 벨라시 백작은 27세의 무하를 프랑스 파리로 이주시켜 사립미술학교에서 교육을 받도록 지원했다.

벨라시 백작의 후원이 끊긴 30세부터 무하는 프랑스 슬라브 공동체의 도움을 받으며 삽화가로 생계를 유지했다. 두 번째 ‘귀인’이 된 사라 베른하르트를 만나기 전까지 그는 여러 잡지와 책의 삽화를 그리면서 꾸준히 실력을 키웠다. 모두가 쉬는 날에도 인쇄소에 나와 일했을 정도로 그는 근면하고 성실했다. ‘지스몽다’ 포스터는 당시로서는 아무도 시도하지 않았던 색채 혼합 판화 기법을 활용해 1미터 판본 두 장을 이어 붙인 2미터 높이의 새로운 형태였다. 혁신적인 색배합과 정교한 이음새 기술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질 수 없다. 준비된 사람이 찾아온 기회를 자기 것으로 만든다.

그렇게 유명 여배우의 전속화가가 된 이후, 무하는 몇 년 만에 300명의 직원과 20대의 인쇄기를 둔 거대 인쇄소의 대표가 됐다. 그는 담배, 샴페인, 초콜릿, 자전거 등 다양한 유명 제품의 광고 포스터를 만들었고, 그때마다 큰 화제였다. 1896년에 출판된 ‘사계절’과 1897년의 ‘조디악’ 별자리 달력은 초대형 히트작이었다. 약 10년 동안 그는 큰 성공을 이뤘고, 포스터 외에도 보석과 그릇 등의 공예품 디자인, 인테리어 디자인까지 영역을 확장하면서 이른바 ‘무하 스타일’을 확고히 했다.


‘무하 스타일’의 세 가지 의미

알폰스 무하, '예술-춤', 석판화, 38x60cm, 1898년(왼쪽), 알폰스 무하, '조디악 (황도12궁)', 석판화, 48.2x65.7cm, 1896년(가운데), 알폰스 무하, 모엣 샹동 임페리알 광고 포스터, 60.8x23cm, 1899년

무하는 현대 일러스트, 그래픽디자인, 애니메이션의 출발이라 불러도 좋을 만큼 그림의 역사에 큰 영향을 끼쳤다. 화려하면서도 단순화한 외곽선으로 담아낸 ‘예쁜 여인’의 모습은 어느 시대, 어느 지역의 사람이 봐도 눈길을 사로잡는다. ‘아는 만큼 보이는’ 고급예술이 아니라 ‘몰라도 느끼는’ 대중예술에 대한 요구가 높아졌고, 기술발달에 따른 산업구조 개편으로 응용미술이 각광받는 시대를 만난 것이야말로 무하에게 주어진 가장 큰 행운이다. ‘무하 스타일’은 세 가지 의미가 있다.

첫째, '스타 디자이너'의 시작이다. 유명인의 포스터로 그는 유명인이 됐다. ‘지스몽다’ 포스터를 처음 봤던 베른하르트의 비서는 “형편없다”며 폐기하려 했지만 시간에 쫓겨 어쩔 수 없이 길거리에 붙였던 덕분에 대중의 선택을 받을 수 있었다. 과거에도 대중의 사랑을 받던 창작품과 창작자는 존재했지만 고급문화와는 구별됐다. 그러나 19세기말 시장경제가 시작되던 때의 대중적 인기는 이전과 달라졌다. 사람들은 무하의 포스터와 달력에 열광했고 그에게 상당한 부와 명예를 안겨줬다. 그의 포스터는 여러 도시에서 ‘미술전시’라는 타이틀로 소개됐으며 무하는 1900년 파리만국박람회에서 ‘아트 디렉터(미술감독)’ 자격으로 활약했다. 그는 오늘날 명품 브랜드의 유명 디자이너와 같은 인기를 누렸다. 이러한 대중예술의 고급화는 현대미술의 ‘팝아트’와 개념적으로 이어진다.

둘째, 산업과 예술을 이어주는 디자인의 시작이다. 19세기말부터 유럽인들은 예술과 산업 사이에 위치한 창작자에 대해 고민했다. 대량생산되는 공장제품을 비판하며 장인정신을 강조한 영국의 ‘미술공예운동’과 프랑스의 ‘아르누보’, 생활 속 미술을 주장한 ‘독일공작연맹’, 그리고 공학적 예술교육기관 ‘바우하우스’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은 새로운 형태의 응용미술, 즉 디자인에 주목했다. 이때 형성된 디자인 개념은 지금까지도 유효하며 장인정신을 강조하는 명품브랜드가 유럽에 많은 이유이기도 하다. 디자인의 역사에서 무하는 ‘아르누보’를 대표하는 디자이너로 평가받고 있는데, 정작 본인은 이 말에 관심이 없었다. 위기의 여배우를 다시 스타덤에 올려놓은 무하의 포스터는 ‘감성 마케팅’의 대표적 성공사례다.

셋째, 새로운 형태의 미술전시 가능성이다. 무하는 “길거리를 미술 전시장으로 바꿨다”는 평가를 받았다. 미술전시의 효시는 17세기 프랑스 루이 14세의 베르사유 궁전 ‘살롱전’이다. 왕정 주도의 살롱전은 일반인들의 출입이 어려웠다. 서민들은 성당이나 관공서를 직접 방문해야 그림을 볼 수 있었다. ‘플랜더스의 개’의 주인공 넬로가 파트라슈와 함께 성당을 찾아간 이유다. 19세기 중반 인상주의 화가들의 ‘낙선전’을 계기로 유럽의 미술 전시회는 다양한 형태로 대중과 만나기 시작했지만 여전히 그림을 보는 일은 쉽지 않았던 때다. 무하의 포스터 소동은 미술작품의 감상 경로와 방식이 달라지고 있음을, 또 달라져도 된다는 것을 시사한다.

알폰스 무하의 보석 디자인 도상과 식기 도안. 1901년

잊혔다가 다시 찾은 이름, 알폰스 무하

알폰스 무하가 '슬라브 서사시' 작업에 몰두하고 있는 모습, 1920년대

이렇듯 무하는 서양미술사, 디자인사, 그리고 미술전시에 많은 이야기를 남겼다. 그러나 놀랍게도 무하는 192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잊힌 이름이었다. 스타 디자이너라더니 무슨 말인가 싶을 텐데, 이는 오히려 무하가 감동과 울림을 주는 이유다. 8세 나이에 예수의 모습을 그렸을 만큼 영적인 것을 추구하던 무하에게 삶의 의미는 ‘헌신’이었다. 부와 명예를 얻었지만 그것은 그의 목표가 아니었다. 그는 40대 중반 프랑스를 떠나 미국 뉴욕으로 건너갔다. 그의 꿈 ‘슬라브 서사시’를 실현할 토대를 마련하기 위해서다. 우여곡절 끝에 그는 세 번째 ‘귀인’, 미국의 백만장자 찰스 크레인을 만났다. 찰스 크레인은 ‘민족 자결주의’를 제창한 우드로 윌슨 미국 대통령의 친구로, 우리 임시정부 특사 여운형이 찾아갔던 인물이다. 크레인의 후원 아래 드디어 1910년, 무하는 체코 프라하에서 ‘슬라브 서사시’ 프로젝트를 시작한다.

‘슬라브 서사시’는 가로 8미터 크기 20점의 연작 시리즈로 전체 길이만 120미터에 달한다. 그가 1939년 나치에게 고문당하고 79세로 숨질 때까지 모든 것을 갈아 넣었던 ‘슬라브 서사시’에 당시 예술계의 평가는 냉담했다. 낡은 회화 양식에 과한 민족주의 그림이라는 비판이 일었다. 그의 명성도 사라진 지 오래였다. 무하의 작품은 다른 화가의 작품 전시를 위해 구겨진 채 거치대나 매트로 사용될 정도였다. 프라하의 시민들이 그의 장례식에 모여 “체코는 절대 잊지 않을 것”이라며 추모했지만, ‘슬라브 서사시’는 약 70년 동안 외면당했다. ‘슬라브 서사시’는 공산정권을 피해 버스조차 다니지 않는 체코 남부 모라비아의 낡은 고건물에 소장되어 있다가 2012년 마침내 프라하 국립미술관으로 되돌아왔다.

알폰스 무하, '슬라브 서사시 연작 1번 – 본향의 슬라브인들', 810x610cm, 1912년(왼쪽). '슬라브 서사시' 연작의 첫 번째 그림은 4-6세기 발트해와 흑해 사이의 습지에 살던 농민들이 게르만족의 공격을 받는 모습으로 시작한다. 알폰스 무하, '슬라브 서사시 연작 20번 - 슬라브 민족의 역사 찬미', 480x405cm, 1928년.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국가들 앞에 선 슬라브 민족의 번영을 기원하는 의미가 담겨있다.

무하가 다시 알려지게 된 것에는 그의 아들과 딸의 공이 컸다. 무하의 아들은 아버지의 전기를 썼고, 딸은 화가로서 무하의 작품들을 복원했다. 이 작품들은 특히 일본 만화가의 사랑을 크게 받았다. 최근 연구자들은 무하의 민족의식이 오늘날의 민족주의와는 다르다고 평가한다. 무하는 러시아, 우크라이나, 폴란드, 헝가리 등 발칸반도 전체를 직접 여행하며 슬라브 관련 자료를 수집했다. 그에게 민족은 체코에 한정된 혈통이 아니라 외부의 지배와 핍박을 받아야 했던 슬라브 문화권의 모든 약자다. 이제는 명실공히 체코의 국민화가로 큰 사랑을 받고 있지만 ‘슬라브 서사시’의 예술성을 높이 평가하기 망설이는 견해도 있었다. 그러나 그를 예술가로 만들어 준 것은 “포스터가 형편없다”던 베른하르트의 비서가 아니라 길을 걷던 시민들이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DDP ‘알폰스 무하 이모션 인 서울’, 또 하나의 무하 스타일

서울 동대문디자인플라자 뮤지엄에서 이달 22일부터 10월 30일까지 개최되는 '알폰스 무하 이모션 인 서울'의 전시 모습.

앞서 살펴본 ‘무하 스타일’의 세 가지 의미, 그리고 ‘슬라브 서사시’에 담긴 의미를 국내 전시에서 직접 살펴볼 수 있는 기회가 있다. 10월 30일까지 서울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에서 열리는 ‘알폰스 무하 이모션(eMotion)’에서다. 앞서 무하의 그림으로 구성된 미디어 아트가 다수 나왔음에도 이번 전시는 차별성이 있다. 이는 체코의 아티스트 약 300명이 3년 동안 구성한 애니메이션과 체코의 뮤지션 미칼 드보르자크의 작곡, 프라하 오케스트라의 협연으로 탄생한 것이다. 가로 8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슬라브 서사시’를 거의 실제 크기로 만날 수 있다.

미술교육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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