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만한 당신] 특별한 이웃, 아름다운 풍경

최윤필 2023. 7. 24.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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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거대한 변화가 1938년 미국의 만 5세 소년 도널드 트리플릿(Donald Triplett, 1933.9.8~2023.6.15)에게서 시작됐다고 해야 할지 모른다.

트리플릿은 캐너의 논문에 'Case 1' 또는 'Donald T'라고 소개된, 최초의 공식 ASD 증상자였다.

캐너는 트리플릿을 통해 자폐증의 차별성을 확인했고, 뒤이어 만난 아동 10명의 사례를 비교해 논문을 완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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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널드 트리플릿(Donald Triplett, 1933.9.8~2023.6.15)
현대의학계가 자폐스펙트럼장애(ASD)를 독자적인 정신건강의학적 증상으로 이해하게 된 것은 꼭 80년 전인 1943년부터다. ASD 진단 첫 케이스인 당시 만 5세 소년 도널드 트리플릿은 이후 ASD의 진단과 연구의 토대를 제공했고, 만 89년의 자립적이고 건강한 삶으로 ASD에 대한 학문적-통념적 오류와 편견을 극복하게 하는 데 기여했다. 그는 ASD 증상자 및 가족에게 희망을 선사했고, 사회에는 숙제를 안겼다. 2016년 1월의 트리플릿. Flickr, 위키피디아 사진.

자폐증이라 흔히 불리는 자폐스펙트럼장애(이하 ASD, Autism Spectrum Disorder)는 1943년 처음 정신건강의학적 진단명이 됐다. 레오 캐너(Leo Kanner, 1894~1981)라는 미국 아동정신의학자가 그해 2월 Nervous Child’란 저널에 ‘정서적 접촉의 자폐성 장애(Autistic Disturbance of Affective Contact)’라는 논문을 발표했다. 그는 아동 11명에게서 공통적으로 확인한 특이한 행동패턴과 성격적 특징을 기존 질환들과 구분, 자폐성 장애라 명명했다.

자폐증이란 용어는 20세기 초 스위스 정신의학자 오이겐 블로일러(Eugen Bleuler 1857~1939)가 일부 조현병 환자의 극단적인 자기몰입(total self-absorption) 증상을 설명하기 위해 만들었고, 이후 조현병 진단-치료의 근거가 됐다. 1930, 40년대는 나치 뿐 아니라 다수 일류 과학자들까지 유전학적 권위를 업은 우생학적 사회진화의 전망에 들려 있던 때였다. ‘조현병 인자를 지닌’ 발달장애 아동을 ‘시설’ 등에 격리 수용하는 건 당연시됐다.

유아 자폐증이 조현병의 전조가 아니며 증상도 다르다는 캐너의 주장은 자녀의 이상 징후에 민감했던 젊은 부모들에게 희망과 불안을 동시에 안기며 사회적으로도 큰 반향을 일으켰다. 자폐증 연구도 본격화했다. 그 과정을 통해, 캐너를 비롯한 50년대 초기 연구자들이 제기한 ‘냉장고 어머니(refrigerator mother) 이론’ 즉 어머니의 냉담함이 유아 자폐의 원인이라는 주장이나 괴담 수준의 백신(수은 중독) 원인설 등이 의학적으로 부정됐다. 대신, 유전적-신경학적 원인과 다양한 환경적 요인이 원인의 일부일 수 있다는 게 가능성 수준에서 확인됐고, 증상을 완화하기 위한 다양한 요법들이 시행착오를 거치며 거듭돼 왔다. 현대 정신의학계는 자폐증이 아동의 지능과 언어습득 정도에 따라 얼마간 개선될 수 있지만, 핵심 증상은 평생 지속된다고 판단한다.

근년에는 자폐증을 질병이나 장애가 아니라 신경인지적 변이에 따른 존재의 한 형식으로 봐야 한다는 이른바 ‘신경다양성(neurodiversity)’ 패러다임도 등장했다. 신경다양성 옹호론자들은 자폐 증상을 ‘비정상’으로 낙인 찍어 ‘정상화’하려는 시도가 윤리적으로 부당하며 현실에서도 자폐인의 정서감을 저해해 총체적 삶의 질을 악화할 뿐이라고 주장한다. 그들은 사회가 자폐인들의 삶의 방식을 이해하고, 안전하고 독립적으로 살 수 있는 최소한의 교육과 환경을 제공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미국정신의학협회 ‘정신질환진단통계편람(DSM) 3차 개정판(DSM-3,1980)에 처음 등재된 자폐증이 2013년 개정판(DSM-5)에서 질병이 아닌 스펙트럼 증후군으로 수정된 것도 그런 관점을 절충적으로 반영한 결과였다. 미국 질병예방통제센터(CDC)는 지난 3월, 미국 8세 아동의 ASD 유병률(2020년 기준)이 무려 36명 중 1명꼴이라고 밝혔다. 지난 80년 자폐의 세계가 그렇게 달라져 왔다.

근년의 일부 의학계는 ASD를 정신의학적 질병이나 장애, 즉 치료-교정돼야 할 '비정상'이 아닌 다른 삶의 한 형태로 이해해야 한다고 판단한다. 미국 에머슨 칼리지 종신교수인 자퍠증 권위자 배리 프리전트는 '독특해도 괜찮아'란 책에 "우리가 세워야 할 목표는 (자폐증)아이를 고쳐서 '정상'으로 보이도록 만드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결정하는 능력을 키워서 자신의 삶을 통제할 수 있게 하는 것"이라고 썼다. kiubic.com

저 거대한 변화가 1938년 미국의 만 5세 소년 도널드 트리플릿(Donald Triplett, 1933.9.8~2023.6.15)에게서 시작됐다고 해야 할지 모른다. 트리플릿은 캐너의 논문에 ‘Case 1’ 또는 ‘Donald T’라고 소개된, 최초의 공식 ASD 증상자였다. 캐너는 트리플릿을 통해 자폐증의 차별성을 확인했고, 뒤이어 만난 아동 10명의 사례를 비교해 논문을 완성했다.

하지만 학계와 사회가 트리플릿을 뜨겁게 주목한 까닭은 그가 ‘처음’이어서가 아니라 이후의 삶 때문이었다. 중증 자폐인으로서, 그는 여느 일반인 못지않게 말년까지 자립적인 일상을 누렸다. 자폐증 연구의 토대가 됐던 그는, 삶을 통해 학계와 사회가 지녀온 자폐(인)에 대한 오해와 편견을 불식시키며 수많은 자폐인(과 가족)들에게 희망과 가능성을 선사했다. 물론 그는, 의지와 무관한 저 변화에, 자신의 기여에, 철저히 무심했다. 주민 수 3,000 명 남짓의 미시시피주 작은 마을 포레스트(Forest)의 “가장 아름다운 풍경 중 하나”였다는 ‘Case 1’, 도널드 트리플릿이 암으로 별세했다. 항년 89세.

어머니 메리(Mary, 1985년 별세)에게 장남 트리플릿은 “절망적으로 미쳐버린 아이”였다. 마치 인형처럼 웃지도 울지도 않고 눈을 맞추는 법도 없었다. 또래 아이들에게도, 산타클로스로 분장한 아버지(Beamon, 80년 별세)를 보고도 무심했고, 그네나 미끄럼틀에도 심드렁했다. 세발자전거에 앉히면 비명까지 지르며 공포감에 사로잡혔다. 좀체 말문도 열지 않았고, 다 자란 뒤에도 그의 말은 예 아니오 등 한두 마디에 그쳤다. 대신 특정 단어나 문장에 꽂히면 그 단어나 문장을 혼자 거듭 중얼거렸고(반향어, echolalia), 어떤 사물에 과도하게 집착해 둥근 물건만 보면 몇 시간이고 앉아 빙빙 돌리는 행위를 반복(자기자극행동,stimming)했고, 그런 행동을 저지당하는 등 정서적 감각적 자극을 받으면 과도하게 흥분하거나 전혀 반응하지 않았다(각성 편향, arousal bias).
한편 그는 노래나 연주를 한번만 듣고도 거의 완벽하게 선율을 재현해낼 만큼 음감과 기억력이 남달랐다. 만 2세 무렵 구약 시편 23절과 장로교 교리문답집을 귀동냥만으로 암송했다. 숫자에 특히 집착해 오래된 잡지나 미국 대통령 사진들을 발행일순 임기순으로 정리하는 게 그가 즐겨 한 놀이였고, 두세 자리 숫자의 곱셉 나눗셈쯤은 지체없이 암산했다.

1940년대 초 ASD 진단을 받을 무렵의 도널드 트리플릿(사진 위)과 유년기의 가족사진(아래).

영문을 몰라 지쳐가던 부모는 의사 권유에 따라 37년 8월, 만 3세 된 그를 주립 수용시설(Sanatorium)에 입소시켰다. 가족 면회도 월 2회만 허용되던 폐쇄적인 곳이었다. 거기서 트리플릿은 시들어갔다. 사물이나 음악에도 흥미를 잃고 온종일 움직이지도 않는 지경에 이르렀다. 부모는 책임자의 만류를 뿌리치고 1년만에 아이를 퇴소시켜 38년 10월 레오 캐너에게 데려갔다. 오스트리아 출신 유대인 아동정신의학자 캐너는 존스홉킨스의대에 미국 최초 아동 정신의학클리닉을 개설하고 70년대 초까지 의대 표준교과서처럼 활용된 ‘아동 정신의학(Child Psychiatry, 1935)’이란 책을 낸 저명한 권위자였다.
아버지는 만 5년간 경험한 트리플릿의 행동과 반응 등을 22쪽 분량으로 정리해 캐너에게 전달했다. 그중 시설 측에서 전달받은 1년 기록은 반 페이지에 불과했다. 비먼은 “(아들이) 자기 껍질 속에 들어가 머물며” “타인에 대한 모든 것을 완벽하게 망각한” 것처럼 보인다고 썼다. 비먼의 노트와 캐너에게 보낸 부부의 편지 기록은 오늘날에도 자폐증 진단의 핵심 기준으로, 자폐 연구의 중요 참고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비먼-메리 부부는, 캐너의 조언에 따라 42년부터 약 4년간 아들을 이웃 마을 농가에서 간헐적으로 살게 했다. 아이가 없던 농부 부부는 트리플릿에게 비교적 손쉬운 농삿일, 예컨대 일정한 깊이로 구덩이를 파게 하거나 이랑 갯수를 세는 일 등을 맡겼다. 호기심을 보이는 일, 예컨대 간단한 말 쟁기질도 해보게 했다. 트리플릿은 그 ‘임무’들에 흥미롭게 임했다. 농가를 방문-관찰한 캐너는 훗날 한 논문에 “농부 부부는 대단히 지혜롭게 역할을 부여하며 아이를 보살폈다”고 적었다.

트리플릿은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어머니 메리는 마을 은행(Forest Bank) 설립자의 손녀로 당시 드문 대졸자였고, 비먼도 예일대 로스쿨을 나온 변호사이자 전 시장의 아들이었다. 마을 주민들과 학교 교사들, 또래 아이들이 트리플릿을 공동체의 일원으로 품어준 배경에도 가족의 재력과 영향력이 꽤 작용했을지 모른다. 트리플릿은 지역 중등학교를 거쳐 58년 밀샙스(Millsaps)칼리지를 졸업하고(수학- 불어 전공), 65년 아버지가 운영하던 가족 소유 은행에 취업했다.
그 사이 ASD 진단 사례는 80년 DSM 등재 이후 급격히 늘어났다. 트리플릿처럼 특정 분야에서 천재적 재능을 보이는 ‘서번트’ 증상자에 주로 국한되긴 했지만, 더스틴 호프먼 주연의 영화 ‘레인맨(1988)’ 등 자폐 소재 ‘감동 휴먼’ 드라마와 영화들이 심심찮게 만들어졌다. 그런 흐름들이 결과적으로 자폐에 대한 긍정적 이해와 자폐인 권리 의식 제고, 20세기 말 대두된 ‘신경다양성’ 패러다임의 확산에 기여했다. 하지만 ‘Case-1’의 일상은, 세상의 변화에 아랑곳없이 대체로 평온했다.

ABC뉴스 기자 캐런 주커(Caron Zucker)와 존 돈번(John Donvan)이 2007년 ‘Case-1’ 추적 취재에 나섰다. 그들은 그의 ‘현재’가 수많은 자폐인들의 ‘미래’일 수 있다고 판단했다. 더욱이 주커에겐 21세 자폐증 아들이 있었다.
그들은 43년 논문의 단서를 토대로 오랜 탐문 끝에 트리플릿의 존재와 소재를 확인, 현지 취재에 나섰다. 그리곤 놀라운 사실들을 확인했다. 중증 자폐인이 혼자 마트에서 물건을 구입하는 것도 대단하게 여기던 그들은 트리플릿이 대학을 졸업했고, 27세에 운전 면허를 따서 줄곧 혼자 차를 몰며, 버젓한 은행원으로 직장 생활을 하고 있고, 23세 무렵 골프를 익혀 쉬는 날이면 어김없이 필드에서 혼자 골프를 즐긴다는 사실. 마을 골프클럽 전통에 따라 다른 골퍼들과 팀을 이뤄 ‘스크램블(Scramble)’이란 팀 게임을 하는 날에도 그가, 비록 몸놀림은 어색해도 기량과 매너만큼은 흠잡을 데 없어, 두운 각운을 언어유희처럼 즐기던 습관대로 “안녕, 엘크 엘킨스!” “안녕 메리 체리!”라 인사하며 젊은 골퍼들과 게임을 벌인다는 사실. 그는 80년대 잇달아 부모를 여읜 이래, 가끔 동생 내외가 들러 안부를 확인하긴 했지만, 저축과 가족신탁에서 지급되는 돈으로 줄곧 혼자 생활해왔고, 36세 무렵부터는 단골 여행사에 직접 전화를 걸어 국내외 여행지와 일정 등을 직접 정해 여행을 다녔다. 알려진 바 그는 평생 미국 28개주와 유럽- 아프리카 36개국을 혼자서 여행했다. 아무리 먼 곳도 최장 5박 6일을 넘기지 않는다는 게, 주위 사람들이 이상해 하던 그만의 규칙이었다.

주커 등을 더 놀라게 한 건 마을 주민들이 트리플릿을 공동체의 당연한 일원으로 받아들인 점이었다. 주민들은 일정한 간격으로 가속-제동 페달을 번갈아 밟으며 출렁이듯 달리는 트리플릿의 차를 만나면 그의 리듬을 존중해 길을 비켜 주었고, 골프 클럽하우스에서 마주치면 먼저 인사하며 맥주를 사곤 했다. 주커 등은 2010년 ‘Atlantic’에 기고한 글에서, 취재 당시 주민들로부터 세 차례 받은 동일한 경고를 소개했다. “만일 당신때문에 돈(도널드)이 상처받게 된다면 각오 하시오. 우리는 어디 가면 당신을 찾을 수 있는지 압니다.” 트리플릿의 한 친구는 “돈은 다소 이상하게 행동하고 괴상한 면도 있지만, 그래도 그는 우리 편(our guy)”이라 말했다.
트리플릿은 이웃과 직장 동료 등을 이름 대신 숫자로 기억했다. 그가 부여한 주커의 번호는 549번이었다. 당사자가 자기 번호를 잊어도 그는, 아무리 오랜 세월이 흘러도 자기가 부여한 번호를 잊는 법이 없었다. 주민들은 그에게 번호를 부여받은 사실을 훈장처럼 자랑스러워했다.
또래 학교 친구들은 그를 ‘괴짜 수학천재’로 여기며 숱한 에피소드를 기억했다. 10대 시절 친구들이 그에게 카운티 법원 외벽의 벽돌 갯수를 세보게 했다고 한다. 트리플릿은 흘낏 훑어본 뒤 무작위로 큰 숫자를 말했고, 정답 여부를 확인할 길이 없던 친구들은 혀를 내둘렀다. 주커가 그 ‘전설’의 진실을 묻자 트리플릿은 눈을 감고 잠깐 생각한 뒤 “친구들이 나를 좋게 생각해주길 바랐다”고 대답했다. 그는 ‘자폐증은 5세 이전에 치료하지 않으면 나아질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그릇된 통념과 달리 평생에 걸쳐 나아질 수 있다는 사실, 자폐인도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뭔가를 꾸밀 줄도 안다는 사실을 그렇게 증명했다. 직장의 친한 동료들에게 그는 먼저 다가가 포옹도 하고, 고무줄 새총으로 장난을 치기도 했다.

도널드 트리플릿의 건강하고 자립적인 삶의 이야기는 저널리스트 캐런 주커 등의 기사와 2017년 책으로, PBS의 2022년 다큐멘터리로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 한적한 마을 길을 혼자 걷고 있는 만년의 트리플릿. 다큐멘터리 'In a Different Key)'의 한 장면이다.

포레스트 시에는 ‘커피클럽’이란 전통적 모임이 있다. 매일 아침 시간이 되는 시민들이 시청 강당에 모여 간단한 숫자게임을 한 뒤 진 사람이 커피 값을 내는 사교행사. 숫자를 좋아하던 트리플릿은 단골 멤버였고, 모임 매니저로도 몇 년간 봉사했다고 한다. 낸시 체임버스(Nancy Chambers) 현 시장은 “돈은 늘 말이 없었지만, 누가 누구의 친척인지까지 훤히 꿰고 있었다.(…) 그는 누구에게도 단 한 번도 불친절하게 행동한 적 없었고, 우리 마을에 사소한 해조차 끼친 적이 없다”고 말했다.
주커와 돈번은 트리플릿의 삶과 자폐증 일반을 소개한 ‘다른 음조로: 자폐증 이야기(In a Different Key: The Story of Autism)’란 책으로 2017년 퓰리처 논픽션부문 최종후보에 올랐고, PBS는 그 책을 토대로 제작한 같은 제목의 다큐멘터리를 지난해 12월 방영했다.

53년 고교 졸업 앨범에 트리플릿은 “내게 행운이 있기를”이란 메시지를 썼다. 그에겐 현명하고 따듯한 가족이 있었고, 5살 아래 동생 올리버(Oliver)마저 2020년 작고한 뒤로도 늘 곁을 지켜준 이웃들이 있었다. 저자들은 “포레스트 마을 주민들이 도널드에게 보여준 공감과 보살핌(support)을 병에 담아 나눌 수만 있다면 세상은 더 나은 곳이 될 것”이라고 썼다.

최윤필 기자 proos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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