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 못 들어오게 하더니 분실 신고까지”…성남 아파트서 또 ‘택배대란’ [밀착취재]

김수연 2023. 7. 16. 2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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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성남 중원구 대단지 아파트서 '입주민 VS 택배사' 갈등
차량 지상통행 금지에 택배사 사비로 천막 마련...기사 “문앞 배송 거부했더니 분실 클레임” 호소
입주민 “저상형 차량 도입 외 타협안 없다”
국토부 “대응책 검토”
입주민과 택배기사 간 갈등에 지난 6월 경기도 성남시 중원구의 한 대단지 아파트 정문 앞에 택배가 쌓여 있는 모습. 택배노동조합 제공
 
“단지 내로 택배차 들어오지 말라고 해서 경비실 앞에 두고 갔더니 입주민들이 조직적으로 분실 신고를 하더라고요. 그거 다 저희가 사비로 물어내야 하거든요. 장마철도 오고 결국 택배기사들끼리 돈 모아서 일단 천막을 구입했습니다. 지금 폭염에 폭우까지 근무 환경도 열악한데 이 아파트만 계속 이러니까 너무 스트레스죠.”
지난 7일 찾은 경기도 성남시 중원구의 한 대단지 아파트. 낮 최고 33도까지 치솟아 경기 일부 지역에 폭염주의보가 내린 이날 정오쯤 아파트 단지 옆 공터에 위치한 파란색 천막 안은 흡사 도떼기시장을 방불케 했다. “몇 동이세요?” “어디 어디?”를 외치는 택배기사들의 물음에 입주민들은 “XXX동이요!” “한진!” “CJ!”를 답하기 바빴다. 택배기사들은 벌겋게 익은 얼굴로 땀을 뚝뚝 흘리면서 100여개가 넘는 상자 중 하나를 찾아 건넸고, 주민들은 가지고 온 수레나 가방에 받은 택배를 챙긴 후 떠나갔다.
경기도 성남시 중원구의 한 대단지 아파트 인근에 택배기사들이 사비로 구매한 천막이 설치돼있다.
 
16일 전국택배노동조합 등에 따르면 해당 아파트에서 택배기사와 입주민 간 택배 갈등이 한 달 이상 지속 중이다. 양측 갈등이 좁혀지지 않으며 과거 남양주 다산신도시와 인천 송도 국제도시 등에서 벌어졌던 ‘택배 대란’이 재현되고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갈등은 아파트 입주자대표회의가 지난 5월 투표를 통해 지난달 1일부터 단지 내 보행자 도로에 구급차 등 긴급 차량을 제외한 모든 차량 진입을 전면 금지하기로 결정하면서 시작됐다. 입대의 측은 어린이 안전 문제 등을 이유로 택배사 측에 “지하주차장을 통해 택배를 배송해 줄 것”을 요구했다.
경기 성남시 중원구의 한 대단지 아파트 지하주차장 주차구역 높이가 2.1m로 건설돼 있다.
 
그러나 해당 아파트의 지하주차장 높이는 2.1m. 일부 택배 차량 높이는 2.6m로 기존 택배사들의 차량으로는 지하를 통한 배송이 불가능했다. 총 6개 단지로 이뤄진 해당 아파트는 입주한 지 1년이 채 안 된 신축 브랜드 아파트로, 지상에 주차장이 없는 이른바 ‘공원형 아파트’다. 국토교통부는 지난 2018년 ‘주택건설 기준 등에 관한 규정’을 개정하면서 지하주차장 층고 하한선을 기존 2.3m에서 2.7m로 상향한 바 있지만, 해당 아파트는 2018년 이전에 건설 허가를 받아 이 규정을 적용받지 않았다.
이에 택배기사들도 ‘등·하교 시간을 피할 테니 지상에 택배차를 댈 수 있도록 해달라’거나 ‘단지 내 특점 거점을 만들어주면 그곳으로만 조심히 다니고 손수레를 사용해 이동하겠다’ 등의 중재안을 제시했지만 입대의 측에서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한다. 임대 단지를 제외한 2, 3단지와는 중간 합의를 이뤄 지상 택배가 가능해졌으나 1, 4, 5단지에서 여전히 강경한 입장을 취해 택배 대란이 이어지고 있다.
경기도 성남시 중원구의 한 대단지 아파트 내 곳곳에 걸린 저상형 택배 차량 촉구 현수막.
 
택배기사들은 “입대의 측에서 귀를 막은 채 ‘저상형 차량 도입 외에 양보는 없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며 답답함을 드러냈다. 이곳 담당인 40대 택배기사 A씨는 “저상 차량을 도입해달라고 해서 우리가 무턱대고 ‘예, 알겠습니다’ 하고 바꿀 수 있는 게 아니다”라며 “일단 교체 비용에만 200만원 이상이 드는데 우리 사비로 바꿔야 한다”고 토로했다.
이어 “백번 양보해 바꾼다고 해도 그 이후도 문제”라며 “우리가 이 아파트만 담당이 아니라 다른 아파트, 다른 지역도 도는데 저상 차량은 적재량이 40% 이상 줄어들게 된다. 터미널에서 최대한 많은 택배를 싣고 와서 배송을 해야 하는 입장에서 그게 다 비용이고 손해인 거다. 배송 터미널이 경기 광주, 분당 판교 등 시 외곽에 있는데 그곳을 언제 또 왔다갔다 하느냐”고 분통을 터뜨렸다. “저상 차량은 높이가 너무 낮아 허리를 계속 숙이고 작업해야 해 건강상의 우려도 빼놓을 수 없다”고도 했다.
경기도 성남시 중원구의 한 대단지 아파트 정문 앞에서 지난 6월 택배 문제로 입주민과 택배기사가 대치하고 있는 모습. 택배노조 제공
 
입주민들도 불편을 토로하는 건 마찬가지였다. 40대 입주민 B씨는 “문 앞 배송을 안 해줘 몇 번을 가지러 가야 하니 너무 번거롭고 힘들다”며 “더운 날씨에 뜨거운 천막 안에서 방치될까봐 신선 식품 배송 주문은 아예 생각도 안 하고 있다”고 말했다.
택배기사들은 강경한 아파트 입장에 지난달 초 문전 배송을 거부하고 정문 앞 경비실 인근에 택배를 쌓아두기도 했다. 이에 아파트 측이 쓰레기통 등으로 바리케이드를 치고 택배기사들 출입을 막아섰다. 입주자대표연합회에서 입주민들에게 “택배사에 전화해 사고 접수를 해라. 사고 내용은 ‘택배가 집 앞으로 오지 않았어요’다”라는 내용의 공지를 하기도 하며 갈등이 최고조에 달했다.
경기도 성남시 중원구의 한 대단지 아파트 입주자대표연합회에서 입주민들에게 “택배사에 전화해 사고 접수를 해라. 사고 내용은 ‘택배가 집 앞으로 오지 않았어요’다”라는 내용으로 한 공지. 택배노조 제공
 
관리사무소 직원들이 택배기사들을 몸으로 막으며 경찰이 출동하는 일까지 발생하자 결국 택배기사들이 한발 물러섰다. 3개 단지 인근에 사비로 천막을 구입해 설치 후 각자 돌아가며 택배를 지키기로 했다. 이곳을 지키고 있던 한 택배 소장은 “가져갔는지 안 가져갔는지 모르겠지만 분실 신고를 하면 다 물어줘야 한다. 근데 꼭 비싼 물품만 클레임을 건다”며 “우리끼리 따로 아르바이트를 고용해 택배를 관리하고 있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택배노조 경기지부 김상용 부지부장은 “우리는 후방 카메라 설치하겠다, 걸어서 이동하겠다 등 계속 타협안을 제시 중인데 아예 대화가 안 되는 상황”이라며 “지금은 일단 임시방편으로 택배대리점끼리 연합해 천막을 관리 중인데 언제까지 이 아파트만 특별 관리를 할 수도 없어 고심 중”이라고 말했다. 아파트 측은 “택배차 진입은 불가능하다”는 입장만 반복해 전했다.

한편 지난 5월 경기 수원시 팔달구의 한 대단지 아파트에서 발생한 택배 대란도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으로 파악됐다. 신축 아파트에서 택배 대란이 잇따라 발생하자 국토부도 관련 대책 마련을 검토 중이라고 밝혔다. 국토부 관계자는 “2018년 이전에 건설 허가를 받은 아파트들도 다시 주차장 공사를 하기 곤란하고 각자 어려운 부분이 있다”며 “구체적인 대응책 마련을 준비 중”이라고 전했다.

성남=글·사진 김수연 기자 sooya@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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