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면 더 서러운 낙도 어르신들... 매달 하루, 외딴섬에 ‘병원’이 온다

통영/김은경 기자 2023. 7. 15.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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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주말]
섬마을 주치의 병원선 ‘경남 511호’의 하루
지난 10일 오후 경남 통영항, 병원선 의료진과 선박 직원들이 섬 진료를 마치고 돌아와 갑판 위에 모였다. /이건송 영상미디어 기자

낮게 내리 깔린 구름이 바다 너머 섬들의 산등성이를 두르고 있었다. 지난 10일 경남 통영항의 아침. 이곳에서는 여객선과 어선들 사이 눈에 띄게 새하얀 배 한 척을 볼 수 있다. 뱃머리에 녹십자가 그려진 이 배는 ‘경남 511호’, 다른 이름은 병원선(船)이다.

병원선은 병·의원은커녕 보건소도 없는 작은 섬을 찾아가 주민들을 무료로 진료하는 ‘떠다니는 병원’이다. 섬이 많은 경남·인천·전남(2척)·충남 등 전국에서 5척이 운항한다. 사람은 있지만 의사는 없는 무의도(無醫島)가 경남에만 40곳이다.

약국도 없는 섬 주민들에겐 구태여 육지로 나가지 않고 상처 연고 같은 상비약을 구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다. 그래서 태풍 같은 심한 악천후만 아니면 비바람이 쳐도 배를 띄운다. 1973년 처음 닻을 올리고 올해 50년이 된 경남 병원선의 하루를 ‘아무튼, 주말’이 동행했다.

◇비가 오나 바람이 부나... 오늘도 출항한다

조타실 앞유리에 후드득후드득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한 오전 9시, 병원선에 시동이 걸렸다. 20평쯤 되어 보이는 선내 1층에는 내과, 치과, 한방과, 약제실이 있다. 혈압계와 의료용 산소발생기, 한방 적외선치료기 등 기초 진단 장비와 치료 기기도 갖췄다. 몇 주 전에 새로 들인 치과 체어는 흔들리지 않도록 벽에 단단히 밧줄로 고정시켰다.

뱃길로 1시간쯤 달려 사량도 읍덕리 읍포선착장에 닿았다. 철커덩철커덩 닻을 내리는 쇠사슬 소리를 들으며 의료진이 진료실과 접수대, 약제실에 자리를 잡는다.

의사는 넷이다. 병원선은 군 복무를 대신해 3년간 농어촌 의료 취약 지역이나 공공 병원에서 근무하는 공중보건의(공보의)들이 1년 임기로 배치된다. 경남 병원선에는 의과(2명)·치과·한의과 공보의가 근무하고 있다. 간호사와 간호조무사, 병원선 업무를 총괄하는 보건사무관까지 의료진이 7명, 항해·기관사 등 선박 직원이 7명이다.

배가 도착하기도 전에 선착장에서 줄지어 기다리고 있던 주민들이 차례로 들어와 금세 선내가 찼다. 병원선이 오는 전날과 당일에 이장이 안내 방송을 한다고 했다. 병원선은 한 달에 15일 출항하지만, 매번 다른 섬을 순회하기 때문에 섬마을 입장에서는 한 달에 한 번 병원선을 만난다.

경남 병원선. /이건송 영상미디어 기자

“오늘도 한방 치료 받으시지예, 어머니?” “할아버지, 위 쓰린 거는 좀 어떠셔?” 안부를 물으면서 진료가 시작된다. 진찰과 치료에 필요한 장비가 부족하다 보니 고혈압·당뇨 등 만성질환 관리와 상비약 처방이 핵심 업무다. 경남 출신인 김대관 의과 공보의는 “한 달에 한 번 진찰을 봐드리고 말동무 해드리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좋아하시니까 할머니, 할아버지 뵌다는 생각으로 일한다”고 했다.

진료가 끝나도 선내는 한동안 잔칫날처럼 복작거렸다. 최복남(78) 할머니는 “병원선 오는 날은 마을 할매이들 다 모인다”며 “배가 와주니 고맙고 다 이삐다(예쁘다)”고 했다. 이날 읍포 마을에선 주민 131명 중 52명이 진료를 받았다.

◇최다 처방은 감기약, 한방과에는 줄 선다

김은년 간호조무사가 선내에서 진료 대기하는 환자를 살펴보고 있다. /이건송 영상미디어 기자

경남의 첫 병원선이었던 ‘보건 1호’의 뒤를 이어 2003년 7월부터 경남 511호가 운항한 지 20년이 됐다. 선박의 수명이 25년 안팎이니, 스물이면 노년이다. 배를 찾는 이들도 흰머리가 지긋하다. ‘어디가 불편해서 오셨냐’는 말은 인사치레. 열에 아홉(90.5%)이 60세 이상인 병원선 환자들은 그들 말마따나 “만신이” “전국적으로” 아프다.

가장 많이 나가는 약은 감기약, 둘째는 진통제다. 김지영 간호사는 “환자 대부분이 면역력이 약해진 고령이어서 감기약을 많이 찾고, 평생 밭일이나 바다 일 하시던 분들이라 진통제도 달고 사신다”며 “파스도 모든 환자에게 거의 매번 처방하는 품목”이라고 했다. 여름에는 물파스가 동난다.

한방과 앞으로는 줄이 늘어선다. 치료 기기가 부족해 약 처방과 주사 외에 다른 치료가 어렵다 보니, 침을 놔주는 한방과의 인기가 좋다. 임정임(74) 할머니는 “뭍으로 나가려면 한세월이고 이날만 기다린다”며 “침 맞는 날은 개운하니 잠이 잘 오는데 더 자주 와주면 안 되냐”고 했다.

오전 진료가 끝나고 점심 시간. 병원선 식구들이 저마다 챙겨 온 도시락을 꺼내 모여 앉는다. 공보의 넷은 즉석밥을 돌리고, 이재민 간호사는 컵라면에 뜨거운 물을 부었다. “컵라면은 너무 부실한 것 아니냐”고 물어보니 “멀미 때문에 속이 안 좋아서 간단히 먹는 게 낫다”고 했다. 병원선 출근 이틀째라는 이 간호사는 뱃멀미에 적응 중. 바다 날씨는 도깨비 같아서 화창한가 싶다가도 몇 분만 지나면 빗방울이 떨어지고, 배는 전후좌우로 꿀렁꿀렁 춤을 췄다.

/이건송 영상미디어 기자

짧은 식사를 마치고 사량도 금평리에 있는 사금마을로 뱃머리를 틀었다. 30분쯤 배를 몰고 마을 입구가 보이자 바다 한가운데 닻을 내리고 선미에 싣고 있던 이동정(1톤)을 내렸다. 남해 섬 대부분은 수심이 얕고 선착장이 작아 162톤 규모의 병원선은 댈 수 없다. 중간에 배를 정박하고 의료진이 이동정으로 옮겨 타 마을로 들어가야 한다. 구명조끼를 입고 28인치짜리 여행가방에 각종 약을 꽉 채워 싸들고 경로당으로 향했다. “왔나?” 주민 몇 명이 마을 어귀에서 의료진을 기다렸단듯 반긴다. 마을 회관에 가방을 풀어놓고 언뜻 소꿉놀이 같아 보이는 진료가 시작됐다.

양손에 지팡이를 짚고 찾아 온 김정만(89) 할아버지는 입구에서 “병원선이 오늘 온다는 방송을 못 들어 하마터면 모르고 지나갈 뻔했다”며 한바탕 역정을 내곤 약을 타 갔다. 사금마을에서 태어나 평생을 산 김 할아버지는 “육지는 인자 몬 가이(이제 못 간다)”라고 했다. “무릎도 재리고(저리고) 발도 재리고, 귀도 먹고 손도 시럽고(시렵고). 늙은 거이 병인데 큰 병원 간다고 고쳐줍니꺼?”

마지막 외지마을 진료까지 마치고 선착장에 세워 둔 이동정으로 돌아가는 길, 어르신들이 마을 어귀까지 나와 뒷짐을 지고 지그시 눈빛으로 배웅한다.

“다음 달에 다시 올게요.”

“오야, 들어가이.”

◇외딴섬 주민 절반은 고령층

이동정을 타고 사량도 사금마을에 도착한 의료진이 약품이 든 가방을 들고 내리는 모습. /이건송 영상미디어 기자

낙도(落島)는 노쇠해지고 있다. 경남 병원선이 드나드는 40곳 섬 인구 수는 2013년 3000여 명에서 2019년 2656명, 올해는 2489명으로 줄었다. 최근 5년 사이 65세 이상 고령층 비율은 39.7%에서 49.9%로 늘었다.

환자의 부고를 듣는 일이 드물지 않다. 김은년 주무관은 “남해 조도 섬에 진료 받으러 오실 때마다 잊지 않고 ‘병원선 가족들 고맙습니다’ 하시던 할아버지가 계셨는데, 얼마 전 진료를 갔다가 지난달에 세상을 떠나셨단 소식을 들었다”며 “눈물이 날 것 같아서 부인인 할머니를 애써 모른 척했다”고 했다. 거동이 불편해 집으로 방문 진료를 하기로 했던 외지마을 할아버지는 며칠 전 건강 악화로 뭍의 병원에 입원하는 바람에 진료가 취소됐다.

공보의는 병원선에서 1년 근무하고 나면 이듬해 근무지를 먼저 선택할 수 있는 우선권이 주어진다. 기피 업무란 뜻이다. 의과 인턴을 마치고 병원선에 자원한 오현근 공보의는 “이왕 의료 취약 지역에서 복무할 거면 가장 열악하더라도, 가장 의료가 필요한 곳에서 일해보고 싶었다”며 “마을회관이나 집으로 찾아가는 왕진 경험을 어디서 해보겠나 싶어 힘들 줄 알면서도 자원했다”고 했다.

찾아가는 사람도, 기다리는 사람도 정이 든다. 하현석 한의과 공보의는 유독 열심히 진료를 보는 섬이 있다고 했다. “마을 이장님 따님이 지체 장애가 있는데, 어떤 이유인지 자꾸 구역질을 하신다는 거예요. 정확한 진찰은 어려웠지만 침도 놔드리고 마음을 안정시켜 드리려고 했어요. 그다음 달에 갔더니 구역질도 멎고 부쩍 괜찮아졌다며 이장님이 연신 고마워하셨는데 그 뒤로도 특히 마음이 쓰이더라고요.”

병원선은 다른 배와 또 뭐가 다를까. 제행호 선장은 “기다리는 사람을 향해 항해한다는 점”이라고 말했다. 어선을 관리하는 어업지도선을 오래 타다가 병원선으로 옮긴 지 1년 반 됐다는 그는 “예전에는 감시나 단속을 하다 보니 만나는 어민들이 달가워하지 않았는데, 병원선은 저 멀리서부터 줄을 서 기다리는 분들이 보이니까 배 모는 보람이 있다”고 했다. 병원을 기다리는지, 사람을 기다리는지. 무엇이건 기다리는 이를 향해 한 달에 15일, 연간 180일 꼬박꼬박 출항한 지 반백 년이다.

진료를 마치고 귀항해 통영항 부두 쇠기둥에 홋줄을 걸고 나니 오후 4시 반. 때마침 지진이 났는지 땅이 위아래로 출렁거렸다. 배에선 멀쩡했던 머리도 어질어질. 휘청대는 모습에 병원선 식구들이 웃었다. “땅 멀미예요. 배 타는 게 체질이시네, 하하!”

아무튼주말 병원선의 하루 _이건송 (아무튼주말 게재 전 사용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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