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나카 맞은 마오 “회담은 싸움이다, 싸우다 친구 된다”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782〉
일본 자민당에는 친대만파가 많았다. ‘청풍회(淸風會)’를 중심으로 총리 다나카의 베이징 방문 반대목청이 만만치 않았다. 여론 주도층도 마찬가지였다. 대륙과의 관계정상화만 지지했다. 대만과의 단교는 지지하지 않았다. 다나카도 암살을 당할지 모른다는 예감이 들었다. 출국 전날 딸 마키코에게 유언 비슷한 말을 남겼다. “어느 나라를 가건 너를 데리고 다녔다. 중국은 함께 갈 수 없다. 대륙이나 대만의 자객들이 우리를 기다릴지 모르기 때문이다. 너는 나의 유일한 자식이다. 네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가업을 계승할 사람이 없다.”
중 “일본 인민도 전쟁 피해자들” 선전
중국도 다나카 방문이 임박하자 선전활동을 폈다. “일본 군국주의자 일부와 일본 국민을 구분할 줄 아는 지혜가 필요하다. 일본인민도 중국인민과 매한가지로 지난 전쟁의 피해자들이다.” 9월 25일 오전 베이징공항에서 열린 환영 장면도 닉슨에 비해 거창했다. 닉슨은 의장대 도열이 다였다. 환영 군중이나 헌화도 없었다. 다나카는 달랐다. 3000명이 꽃 수술 흔들고 총리 저우언라이(周恩來·주은래)와 예젠잉(葉劍英·엽검영)등 지도층의 영접을 받았다. 다나카는 저우와 악수 나누며 자기소개를 했다. “성명은 다나카 가쿠에이, 당년 54세, 현직 일본 총리다. 잘 부탁한다.”
인민대회당에서 환영만찬이 열렸다. 다나카의 답사 중 한 구절이 중국 측 참석자들의 심기를 건드렸다. “지난 수십 년간 양국 관계에 불행한 시절이 있었다. 중국 국민들에게 유감을 표한다”를 일본 측 통역이 “폐를 끼쳤다”로 옮겼다. 저우언라이의 영문전담 통역 탕원셩(唐聞生·당문생)이 당시 분위기를 구술로 남겼다. “큰 전쟁을 일으킨 일본이 ‘폐를 끼쳤다’는 한마디로 얼버무리는 것은 가당치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감정표현 자제하는 총리도 만면에 불만이 가득했다.” 일본 언론들은 저우가 다나카의 앞 접시에 음식 놔 주는 사진과 화기애애한 만찬분위기를 대서특필했다. 아사히신문은 달랐다. 다나카 총리의 치사는 길었다. 한 단락이 끝날 때마다 중국 측 참석자들의 박수가 요란했다. 저우언라이가 ‘재난’이라고 했던 전쟁을 다나카 총리가 ‘폐를 끼쳤다’고 하자 장내에 냉기가 돌았다. 박수는커녕 자리를 뜨는 중국인도 있었다. 두 번째 회담에서 저우가 다나카의 발언에 문제를 제기했다. 다나카는 솔직했다. “중국은 선거가 없어서 좋겠다. 우리는 무슨 일이건 선거를 통해 결판이 난다. 말 한마디 잘못했다가 암살당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일본의 친대만파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 변명도 곁들였다. “일본에선 ‘폐를 끼쳤다’는 말 속에 사죄의 의미가 있다. 내 생각을 말하겠다. 과거사에 책임을 통감하고 사죄한다.”
마오 “장제스가 이미 배상 요구 안 해”
마오가 직접 문 앞에서 다나카 일행을 맞이했다. 악수를 나눈 다나카의 첫마디가 모두를 웃겼다. “화장실을 빌리고 싶다. 소변이 급하다.” 마오가 화장실로 안내했다. 볼일 마치고 나온 다나카의 긴장을 풀어 줬다. “혁명시절 길바닥이나 논두렁에서 대소변 보면 정말 시원했다.” 다나카도 “나도 노가다시절 그랬다”며 웃었다.
자리에 앉은 마오쩌둥은 농담으로 대화를 시작했다. “최근 나는 대관료주의자로 변신했다. 손님을 오래 기다리게 하는 습관이 생겼다.” 니카이도에게 랴오청즈를 소개했다. “국민당 원로 랴오중카이(廖仲愷·요중개) 선생과 허샹닝(何香凝·하향응) 동지의 아들이다. 와세다대학 재학시절 야구부였다. 일본 사정에 훤하다.” 니카이도도 동의했다. “일본인 치고 랴오 선생 모르는 사람은 없다. 참의원에 나가도 쉽게 당선된다.” 다나카와 저우에게도 눈길을 줬다. “회담은 싸움이다. 싸우다 보면 저절로 친구가 된다. 평등을 유지하며 열심히 싸워라. 전 세계가 우리의 만남을 놓고 전전긍긍한다. 미국과 소련은 대국이다. 조심해야 한다. 방심은 금물이다.” 배상문제도 거론했다. “장제스가 이미 배상을 요구하지 않았다. 우리도 뒤만 보고 살 수 없다. 앞이 중요하다.”
니카이도도는 회고록에서 마오와의 만남을 한마디로 평했다. “회담이 아니었다. 1시간가량 마오쩌둥 혼자서 얘기했다. 우리는 듣기만 했다. 귀국길에 오른 다나카는 딸을 데리고 가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Copyright © 중앙SUNDAY.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