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세대’ 뛰어넘은 전설의 디자이너들 찾아보니

2023. 7. 14. 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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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라거펠트부터 뎀나 바질리아까지…혁신과 변화 통해 브랜드 새로운 전성기 이끌어
“그 무엇과도 대체 불가능한 존재가 되기 위해서는 항상 남과 달라야 한다.” 프랑스 명품 브랜드 샤넬의 창업자 가브리엘 코코 샤넬이 한 말이다. 차별화에 대한 강조다.

다만 명품업계는 다르다. 창업 1세대의 정통성을 이어 가야 하는 만큼 혁신과 변화에 보수적이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명품을 이끄는 디자이너가 브랜드를 뛰어넘는 유명세를 얻기는 쉽지 않다. 이런 악조건 속에서도 전설이 된 디자이너들이 있다. 이들의 공통점은 ‘도전’이었다. 변화를 통해 브랜드의 새로운 전성기를 만들어 낸 이들이다. 

칼 라거펠트. (사진=한국경제신문)
칼 라거펠트
“내 소명은 샤넬의 명성을 유지하는 게 아니라 살아 있게 만드는 것이다.”
독일 함부르크 출신의 칼 라거펠트는 사망한 2019년까지 36년을 샤넬의 디자이너로 활동했다. 프랑스 명품 끌로에, 이탈리아 펜디 등을 거쳐 1983년 샤넬의 수석 디자이너에 선임됐다.

이전 브랜드에서 기성복을 만들었다는 이유로 라거펠트를 반대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1983년 1월 라거펠트의 샤넬 데뷔 컬렉션이 공개되자 ‘죽은 샤넬을 환생시켰다’고 평가했다. 성공적인 오트쿠튀르(판매보다 예술에 치중한 고급 의상) 데뷔였다.

라거펠트는 ‘젊은 세대가 입고 싶어 하는 샤넬’을 만들면서 영향력을 키웠다. 1970년대까지 샤넬은 ‘우아함’에 초점을 맞춘 디자인을 선보였지만 라거펠트는 몸매가 드러날수 있도록 딱 붙는 형태의 치마와 재킷 등을 선보이며 파격적인 시도를 했다. 또한 무릎이 가려지는 치마 길이를 무릎 위로 올리고 과거 샤넬의 대표적 원단인 트위드를 활용해 새로운 형태의 원피스를 만들면서 젊은 고객들까지 확보하기 시작했다. 샤넬의 대표적 로고인 알파벳 ‘C’ 두 개를 겹쳐 놓은 디자인도 라거펠트의 결정이었다. 이후 라거펠트는 ‘제2의 샤넬’을 창조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라거펠트는 ‘패션의 제왕', ‘디자이너들의 디자이너’로 불린다. 라거펠트가 샤넬뿐만 아니라 대중문화 산업 전체에 미친 영향이 지대하기 때문이다. 화려하고 웅장한 패션쇼를 연출하며 트렌드를 선도하는 것은 물론 쇼핑몰·공항·카지노·연회장·우주정거장 등 형식을 깬 콘셉트로 패션쇼를 개최해 단순 사치품 이상의 유산을 구축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가 타계한 2019년 프랑스에서 열린 추모식에는 베르나르 아르노 LVMH 회장, 프랑수아 앙리 케링그룹 회장뿐만 아니라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과 그의 부인 브리지트 여사도 참여했다.

샤넬은 당시 라거펠트 헌정 쇼를 선보이기도 했다. 쇼를 시작하기 전 라거펠트의 육성 인터뷰가 나왔고 참석자들은 묵념을 올렸다. 관객들은 라거펠트를 추모하기 위해 검은색 복장을 착용했고 런웨이를 마친 모델들은 눈물을 흘렸다.

라거펠트의 영향력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미국 보그 편집장 안나 윈투어는 올해 멧 갈라의 주제를 ‘칼 라거펠트’로 설정했다. 멧 갈라는 윈투어가 주최하는 자선 행사로 유명 인사들이 매해 콘셉트에 맞는 옷을 입고 등장해 큰 관심을 받는다. 올해 멧 갈라에서는 샤넬과 펜디 등의 부흥을 이끈 라거펠트를 기렸다.

마크 제이콥스. (사진=LVMH)
마크 제이콥스
“나는 정말로 예술이 세상의 풍경을 변화시킬 것이라고 믿는다.”
미국 출신의 패션 디자이너 마크 제이콥스는 1997년부터 2013년까지 16년을 루이비통의 수석 디자이너로 지냈다. 루이비통의 모회사 루이비통모에헤네시(LVMH)는 ‘여행용 명품’이라는 이미지를 탈피하기 위해 34세의 젊은 디자이너를 영입했다. 

제이콥스는 고객을 확보하기 위해 다양한 시도를 했다. 이를 위해 루이비통 최초로 1997년 첫 기성복 라인을 선보였다. 라인업 역시 기존 가방에서 의류·신발·액서서리 등으로 확대하면서 고객들의 선택지를 넓혔다. 지금까지 판매되는 루이비통의 에나멜 핸드백 역시 제이콥스의 작품이다. 제이콥스는 루이비통의 올드한 이미지를 없애기 위해 에나멜 소재의 ‘베르니’ 라인을 론칭하며 업계를 놀라게 했다. 독특하고 과감한 디자인을 선보인 제이콥스는 ‘괴짜 천재’라는 수식어를 얻게 된다. 

제이콥스는 새로운 시도를 통해 고객 연령대를 낮췄는데 그중 하나가 ‘그래피티’ 작품이었다. 2001년 뉴욕 그래피티 아티스트 스테판 스프라우스와 협업해 모노그램 그래피티 시리즈를 선보였는데 미국을 중심으로 큰 인기를 얻으며 매진을 기록했다. 업계에서는 제이콥스의 그래피티 컬렉션에 대해 ‘획기적인 제품’, ‘기발한 아이디어’ 등의 호평을 내놓았다. 당시 패션 매체 보그는 2001년 컬렉션을 감상한 뒤 “제이콥스가 루이비통에서 예술과 상업 사이에서 완벽한 절충안을 찾았다”고 소개했다.

명품 브랜드로는 선제적으로 아티스트와의 협업 제품을 선보였다. 제이콥스는 일본의 예술가 무라카미 다카시, 힙합 가수 퍼렐 윌리엄스·칸예 웨스트 등과 협업해 한정판 제품을 선보이는 전략을 구사하며 인기를 얻었다. 
에디 슬리먼. (사진=LVMH)
에디 슬리먼
“남성도 조금 더 세련되고 조금 더 유혹적인 방향으로 진화해야 한다. 완전히 새로운 남성성에 대해 탐구해야 한다.”
프랑스 출신의 에디 슬리먼은 디올과 생로랑의 대표 남성복 디자이너로 꼽힌다. 2000년부터 7년간 디올 옴므를 담당했고 2013년부터 2016년까지 생로랑에서 크리에이티브 디렉터(CD)를 지냈다.

슬리먼은 ‘스키니의 창시자’로 불린다. 슬리먼의 대표적인 성과는 남성복에 대한 고정관념을 없앴다는 점이다. 슬리먼은 디올 옴므를 맡은 이후 극단적으로 마른 체형의 남성복을 디자인했다. 옷에 체형을 맞춰야 한다는 주장으로, 남성도 여성들처럼 다이어트가 필요하다고 말하기도 했다. 실제로 슬리먼이 런웨이에 세운 모델들은 190cm 가까이 되는 키에도 불구하고 몸무게는 70kg대에 불과했다. 

샤넬의 거장 칼 라거펠트가 다이어트한 일화는 유명하다. 라거펠트는 슬리먼이 디자인한 디올 옴므의 슈트를 입기 위해 약 1년 1개월간 약 42kg을 감량했다. 당시 라거펠트는 “내 나이대 남자들을 위한 옷은 아니지만 정말 입고 싶었다”고 말했다. 패션업계에서는 ‘남성복 가운데 컬렉션이 가장 기대되는 브랜드’라고 평가했다.

슬리먼이 디올에 오면서 디올은 남성들의 워너비 패션으로 등극했다. 사이즈가 매우 작게 나와 아무나 소화할 수 없어 돈이 있어도 못 산다는 말까지 나왔다. 실제로 디올 옴므의 바지 사이즈는 25인치부터 판매됐다. 한국에서는 배우 강동원 씨가 2000년대 초반 대부분의 공식 행사에서 디올 옴므의 제품만 착용해 ‘스키니한 브랜드’로 알려졌다. 

뉴욕타임스는 “2001년 슬리먼이 디올 옴므의 첫 컬렉션을 공개한 뒤 남성 패션의 지각변동이 일어났다”며 “그는 21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남성복 디자이너 중 한명이 됐다. 남성적 아름다움에 대한 기존의 개념을 재정의한 최고의 예술가”라고 전했다.

피비 파일로. (사진=한국경제신문)
피비 파일로
“나는 패션을 통해 내가 느끼는 것을 표현하려고 한다. 내게 옷은 언제나 나를 표현하는 방법이다.”
영국 출신의 피비 파일로는 2008년부터 10년간 셀린느의 디자이너로 재직했다. 셀린느 모회사 LVMH가 2006년부터 2년간 설득한 끝에 셀린느를 담당하게 됐다. 

파일로는 셀린느를 자신만의 패션 철학으로 재창조하며 ‘올드 셀린느’라는 단어를 만들어 냈다. 2008~2017년 출시된 셀린느의 제품들을 일컫는 용어다. 파일로는 극도의 미니멀리즘을 추구해 셀린느를 ‘쿨 미니멀리즘’의 대명사로 만든 주역이기도 하다. 

파일로는 단순함·실용성·착용성 등 3가지를 중점에 두고 여성을 위한 옷을 만들며 ‘찐팬’을 확보했다. 액세서리를 최소화하고 패턴을 없애는 등 다양한 시도로 여성 고객들을 사로잡았다. 또한 편안함을 주기 위해 어두운 색상이나 채도가 낮은 색상을 주로 사용한 것도 성공 요인으로 꼽힌다. 

파일로는 고객들에게도 남을 위해 차려입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위한 제품을 선택하라고 강조했다. 그는 “자신을 위해 옷을 입어야 한다. 남을 위해 입어서 무력화되거나 성적 대상화된 여자들을 수없이 봤다. 셀린느의 고객이라면 우리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들을 공감할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 결과 파일로는 2014년 타임이 선정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100인’에 뽑히기도 했고 셀린느는 매출 침체기에서 벗어나 LVMH의 주요 브랜드로 올라서게 됐다. 패션 매체 보그는 “파일로가 10년 동안 셀린느를 전문 여성을 위한 브랜드로 재설정했다”며 “그가 만든 셀린느의 트렌치 코트와 가방은 멀리 떨어져 있어도 한눈에 알 수 있을 정도다. 그는 패션계의 조용한 혁명가”라고 평가했다.

알렉산드로 미켈레. (사진=한국경제신문)
알렉산드로 미켈레
“아름다움에는 경계도, 규칙도, 색깔도 없다. 아름다움은 종교와 같다. 그 안에 모든 것을 담을 수 있다.”
이탈리아 출신의 알렉산드로 미켈레는 2015년 구찌의 디자이너에 선임돼 지난해까지 7년간 구찌를 이끌었다. 업계에서는 무명 디자이너였던 미켈레에 대해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다. 구찌의 모회사인 케링그룹이 디자이너 자리를 공석으로 비워 둘 수 없어 전임 디자이너와 함께 일한 미켈레를 ‘임시방편’으로 발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첫 컬렉션 공개 이후 미켈레는 창업자 ‘구찌오 구찌’를 뛰어넘어 새로운 구찌를 창조했다는 평가를 받으며 구찌의 매출 성장세를 이끌었다. 

미켈레는 파격적이고 과한 로고 플레이로 소비자의 마음을 얻었다. 1970년대 유행하던 패턴이나 꽃무늬, 프릴 디자인을 재해석한 디자인을 내놓고 옷·가방·모자 등을 만들 때 절반 이상을 구찌의 로고로 덮는 등 적극적으로 로고를 활용했다. 또한 호랑이·뱀·벌 등 다양한 동물들까지 추가해 독특한 디자인을 선보였다.

미켈레는 구찌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데 가장 큰 영향을 미쳤다. 현재까지도 이어지는 ‘긱 시크’ 콘셉트는 미켈레의 손에서 탄생했다. 긱 시크는 괴짜를 의미하는 긱(geek)과 쿨하다는 의미의 칙(Chic)의 합성어로 헝클어진 머리, 큰 뿔테 안경, 정장과 운동화 조합 등을 의미한다. 미켈레는 자칫 촌스러울 수 있는 디자인에 다양하고 화려한 색감을 추가해 구찌의 부흥을 이끌었다. 

미국 매체 블룸버그는 “미켈레가 구찌를 거대 기업으로 만들었다”며 “화려하지만 시크한 디자인을 앞세운 덕에 구찌의 규모는 3배 이상 커졌다. 미켈레의 접근 방식은 상업적이면서 동시에 기발하다. 100년이 넘는 역사를 지닌 브랜드가 대규모의 젊은 팬을 확보하는 것은 전례없는 일”이라고 평가했다.
뎀나 바잘리아(사진 왼쪽). (사진=킴 카다시안 인스타그램)
뎀나 바잘리아
“‘패션’으로 살아남기 위해서는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조지아 출신의 뎀나 바잘리아는 메종 마르지엘라와 루이비통 등을 거쳐 2015년 발렌시아가 아티스틱 디렉터가 됐다. 전임 디자이너 알렉산더 왕이 실적 부진 등의 이유로 해임되면서 바잘리아가 새로운 디자이너가 됐다. 

바잘리아는 발렌시아가의 새로운 전성기를 만들어 낸 인물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바잘리아 특유의 실험 정신이 자유를 추구하는 젊은 세대에 통했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삭스슈즈 품절 대란’이다. 바잘리아는 2017년 양말 형태의 신발인 ‘스피드러너’를 선보였는데 출시 이후 바로 매진되며 큰 인기를 얻었다. 

이 밖에 바잘리아는 이케아의 1500원짜리 장바구니를 본떠 만든 ‘아레나 토트백’, 쓰레기봉투에서 영감을 받아 만든 ‘트래시 파우치’, ‘레이즈 감자칩’ 클러치백 등을 선보였다. 자본주의를 풍자하기 위해 출시한 제품들을 놓고 일각에서는 비싼 값을 매겨 소비자를 우롱한다는 비판이 나왔지만 젊은층의 지지를 받으며 출시 직후 품절됐다.

최수진 기자 jinny0618@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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