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 내준 강국 타이틀 뺏자” 사실상 日의 선전포고…30년 만에 반도체 한·일전 [반도체 新한일전]
[헤럴드경제=김지헌 기자] “한국과 대만의 지정학적 리스크 등을 피해 일본으로 세계의 반도체 기업들이 급속히 몰려드는 요즘입니다.” (후쿠가와 유키코 ‘한일·일한 미래파트너십 기금’ 일본 측 자문위원장)
‘반도체 리더십 회복’을 절체절명의 국가적 과제로 내건 일본이 30년만에 칩 생태계 내에서 매서운 행보를 보이고 있다. 글로벌 최첨단 반도체 칩 개발 뿐 아니라 세계적 반도체 기업의 유치를 통해 반도체 업계의 거대한 지각변동을 예고하고 있다. 사실상 ‘한국에 내준 반도체 강대국 타이틀을 다시 가져오겠다’는 선전포고라는 분석이다. 그동안 메모리 반도체의 초격차 우위를 다지고, 글로벌 파운드리(반도체 칩 위탁생산) 산업의 전장에서 맞서 싸운 국내 기업들이 일본의 저돌적인 추격 행보에 위협을 받고 있단 진단이 나온다.
1990년대 이후부터 최근까지 일본의 반도체 역사를 보면 살펴보면 그야말로 격세지감이다. 1990년 시장조사업체 IC인사이츠 자료에 따르면 당시 세계 10위권 내 일본 반도체 기업은 모두 6곳인 것으로 집계됐다. NEC, 도시바, 히타치, 후지쯔, 미쓰비시, 마쓰시타(파나소닉) 순이다. 당시 세계 10위권에 속한 한국 칩 기업은 단 한 곳도 없었다.
그러나 2022년 기준 시장조사업체 가트너의 세계 반도체 시장 통계(파운드리 기업 제외)에 따르면, 글로벌 반도체 시장에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1위와 3위를 기록 중이다. 매출 상위 10곳 중 한국 기업이 2곳, 대만 기업이 1곳, 미국 기업이 7곳이다. 일본 기업은 단 한 곳도 없다. 한국과 일본의 입지가 완전히 역전됐다.
세계 반도체 산업에서 일본의 점유율은 1988년 50.3%였으나, 2019년 이후 10% 내외로 떨어졌다. 그만큼 글로벌 위상도 추락했다.
일본 반도체의 ‘잃어버린 30년’의 주요 원인으로는, 해당 기업들의 시장 변화에 대한 오판이 지목된다. 1980년대까지 일본 기업들은 무려 20년 넘게 사용가능한 고품질 D램을 제조했다. 그런데 갑자기 PC 시장으로 세계 IT 시장의 동력이 급변했다. 기존 제품과 달리 ‘빠르게 교체 가능한 칩’ 시장이 대세를 이루게 된 것이다. 이때 일본을 추격하던 삼성이 앞선 원가경쟁력을 바탕으로 가격 경쟁 중심의 치킨게임을 주도하며, 기술과 마케팅 면에서 일본 기업들의 메모리 경쟁력을 빼앗았다.
미국이 일본 반도체 산업을 견제하며 주도권을 빼앗기 위해 강력한 제약을 가한 점도 원인으로 지목된다. 1980년대 말 일본이 세계 칩 시장의 80%를 점유하자, 미국 반도체 기업들이 고사 위기에 놓였다. 이에 미국이 반덤핑 소송과 보복관세에 이어, 일본 반도체 기업 가격 등에 영향을 미치는 미·일반도체협정 체결을 주도하며, 일본 기업의 글로벌 입지를 무너뜨렸다는 설명이다.
지난 5월 반도체 재료 전문 콘퍼런스인 ‘SMC 코리아’에서 공개된 글로벌 컨설팅 업체 맥켄지 앤 컴퍼니의 분석에 따르면, 일본 기업의 소재 공급망은 ‘타국의 도움없이 자국 내 공급이 충족’되는 수준인 것으로 나타났다. 반도체와 관련된 다양한 소재, 장비, 칩 기술 등이 글로벌 공급망으로 복잡하게 얽혀 각 국이 발벗고 다른 나라에 손을 뻗고 있는 가운데, 유일하게 일본만이 소재 분야에선 독자적인 생존이 가능하단 분석이다. 반도체 산업 내 일본의 저력은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일본은 1990년대에 메모리 산업에서의 리더십을 한국의 삼성 등에 빼앗겼지만, 소·부·장(소재, 부품, 장비)과 후공정(패키징) 분야에선 지속적으로 강소기업을 키워왔다. 세계적인 반도체 장비 기업 도쿄일렉트론(TEL)을 필두로 글로벌 시장 내 리더십을 확보한 상태다.
미국 CSET(안보신기술센터)의 자료에 따르면, 일본은 반도체 소재 부문에서 점유율 56%로 1위를 차지하고 있다. 장비 분야에서도 미국(44%)에 이어 2위(29%)이고, 후공정 장비(44%)에서도 1위이다.
일본이 소·부·장 육성을 넘어 첨단 반도체 생산으로 전략 수준을 한 단계 높인 시점은, 불과 2~3년 전세계가 코로나 팬데믹으로 혼란에 빠졌을 때다. 특히 자동차를 비롯한 정보기술(IT) 제품의 반도체 공급망 확보가 글로벌 이슈로 부각되면서, 파운드리(반도체 칩 위탁생산) 분야에서 노후 장비를 개선하지 못한 일본 내 위기감이 커졌다.
2021년 6월 일본 경제산업성은 ‘반도체 전략’을 내놨다. 일본은 ‘경제안보전략’의 일환으로 자국 공급망 강화를 위해 ‘외국 반도체 기업의 일본 투자’와 이에 대한 ‘일본 정부의 보조금 지급’을 전략으로 내걸었다. 당시 일본의 반도체 산업 회복이 쉽지 않을 것이란 회의적인 의견도 제기됐으나, 최근에는 이같은 기류에도 반전 기운이 감지된다. 글로벌 기업들의 일본 투자가 잇따르고 있어서다.
지난 5월 미국 마이크론 테크놀로지는 최첨단 반도체 개발·양산을 위해 최대 5000억엔(약 4조8514억원)을 투자하겠다고 밝혔다. 이미 일본 소니그룹, 덴소와 함께 구마모토에 반도체 공장을 건설하고 있는 대만 TSMC는 두 번째 공장 계획도 공개했다. 현재 TSMC는 총 86억달러(약 10조6000억원)를 들여 구마모토현 기쿠요마치에 반도체 공장을 건설하고 있다. 2024년 말 가동을 목표로 하고 있으며, 일본 정부로부터 약 4760억엔(약 4조5824억원)을 지원받는다.
기존의 40나노미터 수준의 기술에서 2027년 2나노미터 양산을 목표로, 정부와 민간의 공동지원 하에 첨단 반도체 기업 라피더스를 출범시키기도 했다. 한국을 추월하기 위한 고도의 산업 역량 확보에도 주력하는 모습이다. 라피더스는 토요타자동차, 소니, 키옥시아 등 일본의 주요 기업 8곳이 출자한 신설법인이다. 2027년까지 슈퍼컴퓨터, 자율주행자동차, 인공지능 분야 등에서 활용되는 로직 반도체를 개발하는 것을 목표로 향후 10년간 5조엔(약 48조원)의 설비투자 등을 할 계획인 것으로 알려졌다. ▷TSMC의 구마모토 팹 준공 등을 통한 일본 내 제조설비 확충(1단계) ▷미국과 일본의 협력을 통한 라피더스 2나노 칩 제작(2단계) ▷글로벌 협력을 통해 각종 기술이 융합된 신제품의 출시(3단계) 순으로 일본 정부의 전략도 구체화되고 있다.
삼성과 SK하이닉스 등 국내기업들도 일본 시장에 진출하며 맞불을 놓고 있는 모습이다. 삼성전자는 일본 요코하마시에 300억엔(약 3000억원) 이상을 투자해 새로운 첨단 반도체 R&D 시설을 구축한다. 일본의 4군데 지역의 투자 역시 검토하고 반도체 엔지니어 역시 일본에서 상당수를 뽑기로 한 상태다.
SK하이닉스는 SK스퀘어, 국내 금융사 등과 약 1000억원을 공동 출자해 일본과 미국 등 해외 유망 반도체 소·부·장 기업에 투자하기로 했다고 최근 밝혔다. 첫 투자 대상은 반도체 소·부·장 강자로 알려진 일본 내 하이엔드 기술 기업으로 범위를 설정했다. 현재 조성된 투자금 약 60%를 일본 관련 기업에 투자한다는 방침이다.
SK하이닉스 관계자는 “반도체 밸류체인을 강화하기 위해서는 반도체 설계와 생산, 패키징 공정별로 기술적 우위를 가진 소·부·장 기업에 진출해야 한다”고 말했다.
업계 관계자는 “양국 기업간 협력의 틀을 갖췄지만, 일본 내에서 치열한 경쟁을 피할 수 없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raw@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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