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과 현장] "중국·북한에도 있는 게 우리만 없더라고" 44년 전, 그렇게 식물원의 아버지가 됐다

손현덕 기자(ubsohn@mk.co.kr) 2023. 7. 12. 1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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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승-전-식물' 이택주 한택식물원장

◆ 매경 포커스 ◆

순대로 유명한 경기도 용인시 백암면 야산에 자리 잡은 20만평 규모의 한택식물원. 1979년 조성된 우리나라 최대 사립식물원이다. 이택주 원장은 이곳에 태곳적부터 우리나라에서 태어나 지금까지 생명을 이어오는 자생식물 구역을 별도로 조성했다. 그 입구에 지금은 원추리꽃이 샛노랗게 피었다. 용인 이승환 기자

20년 전 개봉한 '위대한 정복자(Master and Commander)'라는 영화가 있다. 나폴레옹에게 맞설 상대는 영국 함대밖에 없었던 1800년대 초. 대영제국 서프라이즈호에 해군 본부로부터 프랑스함 아케론호를 침몰시키라는 명령이 떨어진다. 어떻게든 이기면 그 배를 포상금으로 가져가라고까지 했다. 함포 28문에 선원 197명이 탑승한 서프라이즈호 함장이자 최고의 해양 전투 전문가 잭 오브리(러셀 크로 역). 영국의 운명을 걸고 싸우는 그는 그러나 아케론으로부터 대규모 공격을 받고 절체절명 위기에 빠진다. 그걸 이겨내는 스토리를 담은 영화.

이 영화에 의사 겸 박물학자인 스티븐 마투린(폴 베터니 역)이 나온다. 새를 쫓으려고 쏜 선원의 총에 맞아 수술을 해야 할 처지에 놓인다. 함장은 당초 계획엔 없었으나 친구인 의사를 살리기 위해 잠시 갈라파고스 섬에 머물게 된다. 그런데 여기서 의사가 하는 짓이 좀 엉뚱하다. 날지 못하는 가마우지를 찾아 나선다. 그러다가 어마어마하게 거대한 바다거북을 만나 목길이와 둘레, 머리 크기 등을 잰다. 박물학자의 호기심이 극도로 발동돼 신지식을 탐구하는 장면. 나는 함장 러셀 크로보다 폴 베터니가 오히려 주인공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래서 해가 지지 않는 나라 대영제국의 전성기가 구가되는구나 싶었다.

그 당시 유럽 대륙은 물론 영국도 인간의 이성을 존중하고 지식을 통해 새로운 진보의 시대를 열자는 계몽주의(Enlightenment)가 휩쓸던 때였다. 이성과 지식의 기본은 분류하고 카탈로그하는 것(Classification and Cataloging). 이 동물, 이 식물, 이 돌덩이가 어떤 부류에 속하는지 파악하는 게 문명을 발달시키는 출발점이다. 폴 베터니가 한 일이 바로 분류였다. 영국 런던에 가는 관광객이라면 꼭 들르는 곳이 대영박물관이다. 입장료 무료. 1753년 한스 슬론 경의 개인 소장품 전시를 목적으로 시작된 박물관은 영국의 품격을 유지시켜주는 국보다. 통상 이곳에 가면 반드시 두 개는 봐야 한다고 가이드가 추천한다. 이집트의 로제타스톤과 그리스 파르테논 신전의 조각품.

그런데 대영박물관의 진수는 그 옆에 있는 '계몽주의 전시관'이다. 여기엔 1680년부터 1820년까지 진행된 세상의 모든 지식을 분류한 대기록이 있다. 각종 동물부터 곤충, 별의 분화구, 공작기계의 각 부품에 이르기까지 세세하게 분류하고 이름 지었다. 과학과 지식의 출발점. 인류를 계몽시킨 현장이다.

그중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일까. 그게 바로 식물(植物)이라고 확신하는 사람이 있다. 그냥 식물과 함께 사는 사람. 30대에 시작한 대한민국 유일의 식물원. 그걸 44년간 고집스럽게 가꿔온 이택주 한택식물원 원장이다. 일단 그의 말부터 들어보자.

"식물은 인류의 생존에 가장 기본이 된다. 먹고사는 게 식물에서 시작한다. 이곳에 어린이들이 교육받으러 오는데 이렇게 말하면 '고기도 먹잖아요. 고기는 동물이잖아요'라고 따진다. 그러면 '소나 돼지나 닭은 뭐 먹고 사는데'라고 되묻지. 꽃가루가 날리고 낙엽이 지는 게 다 유기물이다. 유기물은 미생물을 먹고 그 미생물은 땅을 기름지게 하고 그런 땅에 식물 씨가 떨어져 자란다. 지상의 모든 동물은 그걸 먹고산다. 먹이사슬이라는 말 들어봤지." 아이들에게 이렇게 말한다는 이 원장.

비가 오락가락 내리던 지난달 29일. 아침 일찍 한택식물원을 취재하던 중 식물원을 배회하던 하얀 사슴 한 마리가 카메라에 잡혔다. 용인 이승환 기자

자연보호가 뭐냐고 물으면 그는 식물을 잘 가꾸는 거라고 답한다. 농업이 뭐냐고 그에게 물으면 그의 답은 식물을 잘 키우는 거다. 이 원장은 '기-승-전-식물'이다. 식물원 얘기를 하면 80이 넘은 나이인데도 흥분을 감추지 못한다. 그를 처음 만난 게 10년이 넘었는데 그때도 그랬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식물원 있지. 아마도 어렸을 적 다 가봤을 거야. 온실 지어놓고 선인장 심어놓은 곳. 한국 사람들은 그런 곳을 식물원으로 알지. 그건 식물원 아니야. △△수목원 있지. 아주 예쁘게 단장했고 주말이면 나들이 온 사람들로 북적대지. 그런 걸 식물원이라고 하면 식물원에 대해 전혀 모르고 하는 이야기. 그건 그냥 가든이다."

이어지는 질문은 뻔하다. "식물원은 뭐하는 곳인가?"

답이 명쾌하다.

식물종자 확보하는 곳. 이게 전부다.

"외국 식물은 돈 주고 살 수 있다. 그런데 우리나라 식물은 돈 주고도 못 구했다. 왜냐고. 식물 재배하는 사람이 없었으니까. 내가 왜 식물원을 한지 아냐. 유럽 선진국에 가니 다들 제대로 된 식물원이 있었다. 심지어 중국도 있고 북한도 있었다. 한국만 없었다. 유엔 가입국 중 유일했다. 과학의 기초가 식물인데 그걸 안 했다. 1979년부터 그 일을 했다. 우리나라 식물 찾아다니느라 전국 방방곡곡을 누볐다. 미친놈 소리 들어가며." 30년 전 암벽에서 굴러 떨어져 목숨을 잃을 뻔한 이야기는 전설이 됐다. 그렇게 찾은 식물이 '둥근잎꿩의비름'이고, 그의 목숨을 구한 건 절벽 바위틈을 비집고 자란 소나무였다.

"식물원이 그것 말고도 하는 일이 있지 않냐"고 물으면 간단하게 답한다. "둘째는 수집한 식물을 전시하는 것이고, 셋째는 인류에게 유용하게 쓰이게끔 식물을 잘 연구하는 것. 넷째는 어릴 때부터 식물에 관심을 갖도록 교육하는 것. 그러면서 식물을 체험하게 하는 곳. 자연이 주는 힐링은 덤이다. 우리 삶을 여유롭게 하는 공간.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이 마지막을 식물원의 본질로 알고 있다."

태곳적부터 이 땅에서 태어나 지금까지 생명을 유지해오는 식물들이 있다. 그게 우리나라 자생식물이다. 대략 5400종. 거기에서 잡초를 빼면 약 2000종이 있는데 이곳 한택이 보유한 건 1500종. 다른 식물원과는 비교가 안 된다. 별도의 자생식물 구역이 있다. 여름이라 꽃들이 많이 졌는데 그래도 지금 피어나는 꽃들도 있다. 입구에 샛노란 원추리가 보인다. 이곳에 있는 원추리는 200가지가 넘는데 이 중 그냥 '원추리'라고 하는 저 꽃이 우리 자생식물이라고 한다. 가뭄이나 장마가 들 때 식용으로도 쓸 수 있어 근심을 잊는다는 뜻의 망우초(忘憂草)라는 꽃.

안쪽으로 가면 계곡에 구상나무가 있는데 이 역시 전 세계에서 우리나라에만 자생하는 한반도 고유종이다. "한라산 웃세오름에 가면 이 나무들이 많다. 저게 원래 우리나라 나무인데 미국과 유럽으로 건너가서 정원용으로 적합하게 품종을 육종해서 정원식물로 대접을 받는다. 일부는 크리스마스트리로 사용되지."

"우리가 뺏긴 거네요"라고 하니 "뺏기긴 뭘 뺏겨. 우리가 제대로 활용하지 못한 거지"라고 말한다. 냉소에 뼈가 있다. "제주도에 왜 구상나무가 많은지 아나. 거기는 구멍 뚫린 현무암이다. 장마철에 비가 올 때면 넓적다리까지도 물이 차다가 30분이면 다 빠진다. 이 구상나무를 배수가 안 되는 데 심으면 다 죽는다."

다른 자생식물 이야기로 이어진다.

"우리 식물원에 동강할미꽃이라고 있다. 3~4월에 피는 꽃이니 지금은 졌지. 이게 강원도 영월 동강의 바위틈에서 자란다고 해서 그런 이름이 붙었지. 내가 처음 발견한 자생식물이지. 그런데 그게 알칼리성 토양, 석회석에서 자라는 꽃이다. 그래서 영월 정선 제천 이런 데 있지. 그걸 산성 땅에 심으면 당연히 죽는다. 석회비료를 줘야 한다."

길을 가다 손가락으로 저쪽 라일락을 가리킨다. 가서 보고 오라고. 꽃이 다 져서 뭐가 라일락인지 구분을 못하니 답답한 모양이다. 다가와서 설명해준다. "이게 원래 우리나라 자생식물이었는데 미국으로 반출돼서 개량돼 다시 들어온 거다. 향기도 진하고 병충해에도 강해 조경용으로 인기다. 그 라일락 이름이 미스킴라일락. 1947년 미군정 소속 식물채집가가 북한산 백운대 기슭에서 채집한 건데 그때 일을 도와준 한국인 여성의 성이 김씨라 이름을 그렇게 붙인 거다." 그는 "우리나라가 식물에 대해 너무나도 모르니까, 관심이 없으니까 이런 일들이 생기는 것"이라고 말한다. 역수입하니 이제 우리가 로열티 내고.

"산삼은 축축한 데서 자란다. 그게 산의 동북사면이다. 아침에 해가 반짝 떴다가 이내 그늘이 되는 곳. 인삼도 이런 데서 키워야 한다. 농약 치고 기르지 말고 산의 품에서."

몇 해 전 모 대학 약대교수 5명이 그를 찾아왔다. 제주도 수악계곡에 약초를 재배하겠다며 자문을 구하러 한택식물원을 방문한 것이다. 그러면서 하는 말. "우리가 나무를 다 베어놨습니다." 이 원장이 혀를 찬다. "다시 나무 심어라. 그 땡볕에 1000가지 약초 심으면 100가지밖에 못 산다"고 충고했다.

그는 "심지어 학자들도 그런데"라며 허탈하게 웃는다. 꽃 이름 좀 알면 식물을 아는 것처럼 얘기하는 사람들이 많다. 여기 한택식물원 와서도 사진 몇 장 찍고 가는 손님이 대부분이다. 그들을 나무랄 수는 없다. 그렇게 우리는 어려서부터 식물 공부를 안 했다. 그러고는 정작 중요한 식물 키우는 법을 안다는 건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식물을 키우려면 분류가 기본이다. 고등학교 생물시간에 배운 '과(科·family)-속(屬·genus)-종(種·species)'. 사람은 호모 속, 사피엔스 종 하는 식이다. 아닌 게 아니라 이곳 식물원을 돌아보면서 받는 첫인상은 그냥 자연스럽다. 예쁘고 깔끔하게 단장한 꽃동산을 생각하면 실망한다. 사람 눈에 보기 좋은 곳에 있는 게 아니라 식물이 가장 잘 자랄 수 있는 환경에 놓여 있다. 그늘이 많은 곳에 같은 속인 모란과 작약을 심고 축축한 땅에 비비추와 옥잠화가 있다. 그렇게 심어놓으면 더 사랑스럽게 성장한다.

스웨덴의 유명한 식물학자인 칼 폰 린네의 이름을 딴 린네가든. 린네 탄생 30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를 세계 각지에서 했는데 한국에서는 한택을 택했다. 그게 2007년의 일이다. 한택식물원을 보고 간 스웨덴 학자들이 이듬해 이 원장을 스웨덴으로 초청했다. 당시 한택은 30년, 린네는 300년 된 식물원. 그런데도 기술 교류하자며 업무협약을 맺었다. 그러면서 조항 하나 넣은 게 '경험에 의한 교류'도 포함하자는 것. 대학에서 토목을 전공하고 건설회사에서 일하다 식물에 미쳐 고향 땅 20만평 사서 30대의 나이에 식물원을 시작한 이택주. 식물학자도 아니고 심지어 식물 전공도 안 했지만 그가 바친 44년의 삶은 그냥 식물원 그 자체다. 린네식물원 관계자는 그런 이 원장을 한눈에 알아봤다.

식물에 관한 한 이 원장이 1번이라면 2번이라고 할 수 있는 분이 한택식물원에 근무한다. 강정화 관리이사(53). 거제도 남쪽 외도보타니아에서 일하다 자생식물에 관심을 갖게 된 그녀는 정원 공부 좀 하겠다며 영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그런데 거기서 큰 깨달음을 얻는다. "내가 지금 영국에서 뭘 하지. 우리 것도 모르고 너무 한심한 거 아닌가"라며. 그래서 이 원장에게 전화를 걸어 배움을 청했다. 1년 정도 배우고 나서 다시 영국 가면 될 거라 생각하곤. 그렇게 한택에 제발로 걸어들어온 강정화. 그러나 그 1년이 26년이 됐다. 26년간 그녀가 한택식물원에서 한 가장 큰일은 풀 뽑고, 풀 심는 일. 이 원장이 하는 가장 중요한 일의 바통을 이어받아 그 일을 한다.

취재차 지난달 말 한택식물원을 가는 길에는 내내 비가 내렸다. 밤 9시면 잠자리에 들고 오전 6시면 어김없이 식물원에 출근하는 걸 아는지라 이른 아침 취재 일정을 잡았는데 운이 따라주지 않았다. 차가 주차장에 도착하니 우산을 쓰고 기다리는 그의 모습이 보였다. 다리가 좀 불편한 것 같았다. 그래도 식물원은 내가 직접 구경시켜줘야지 라며 카트를 타라고 한다. 살짝 안개가 낀 숲길 돌아보는 게 제법 운치 있다. 자세히 보려고 카트에서 내려 걷다보면 간간이 내리는 시원한 빗줄기가 더위를 식혀준다.

가파른 언덕길은 혼자 올라가 보라고 하는 이 원장. 자신은 저기로 돌아 카트에서 기다리겠다며. 세월이 무심하다. "좀 여위셨습니다"라고 하니 "나이가 있는데"라며 씩 웃는다. 이 세상에 그래도 자신을 알아주고 자신의 길을 이어가는 후계자를 만난 건 행운이다. 몸 고생, 마음고생하며 버텨온 44년 세월에 위안이고 보상이다.

사람과 현장은…

머리보다는 가슴, 가슴보다는 발로 쓰는 글을 좋아한다. 경제기사가 따분한 이유는 발로 쓰지 않고 머리로 써서 그렇다. 발품을 팔아 사람을 만나고 현장을 쏘다니다 보면 글이 나온다.

[손현덕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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