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운형, 영하 20도에 별들이 속살거리는 고비사막을 지나

한겨레21 2023. 7. 12. 1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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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경석의 역사극장]국제공산당 회의 참석하려 자동차로 닷새 거리의 사막 횡단한 여운형… 추위도 잊고 한참이나 밤하늘을 쳐다봤다
여운형의 극동민족대회 대표 위임장. “고려공산당 중앙위원회는 1921년 10월20일자 결정에 의거하여 고려공산당원 여운형 동무가 11월11일 이르쿠츠크에서 개최될 극동민족대회에 파견된 대표자임을 증명함. 고려공산당 중앙위원회 의장 김만겸, 비서 안병찬.” РГАСПИ ф.495 оп.154 д.179 л.26a

몽골을 경유하는 여행길은 위험했다. 1921년 11월에는 그랬다. 광막한 고비사막과 초원 지대를 육로로 건너야 하는 험난한 여정이었다. 중국 북경에서 출발해 러시아 이르쿠츠크까지 가야 하는데, 철도는 놓여 있지 않았고 자동차길도 거칠었다.

여운형(35)은 그 길을 건너려 했다. 국제공산당이 개최한 국제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이르쿠츠크로 시간 맞춰 이동해야 했다. 동아시아 피억압 민족의 대표자들이 모여 해방운동의 주·객관 조건을 협의하는 ‘극동민족대회’가 11월11일부터 열릴 예정이었다. 여운형은 고려공산당 중앙위원회가 발급한 1921년 10월20일자 위임장을 지니고 있었다. 발각될까 우려해 천에다 인쇄해 옷깃 속에 넣고 꿰매버렸다.

정변의 몽골, 일제의 만주를 거쳐야

지형의 어려움만이 아니었다. 몽골 여행길은 치안도 불안정했다. 1921년 한 해에만 몽골의 국가권력이 두 번이나 뒤바뀌었기 때문이다. 첫 번째 정변은 그해 2월에 일어났다. 러시아 백위군 로만 표도로비치 폰 운게른슈테른베르크 남작이 이끄는 ‘아시아 기마 사단’이 몽골을 지배하던 중화민국 군벌 서수정(1880~1925) 군대를 패퇴시키고 수도 울란바토르를 장악했다. 그 덕분에 1911년 독립선언 당시 몽골 군주로 추대된 복드 칸이 복위될 수 있었다. 운게른 남작은 몽골 독립을 후원한다는 영예로운 이름을 얻는 데 성공했지만, 신흥 혁명세력과 사회주의자를 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그리하여 그해 7월에 두 번째 정변이 일어났다. 담딘 수흐바타르(1893~1923)가 이끄는 몽골 적위군이 국면을 반전시켰다. 운게른 군대를 격파하고 수도를 점령한 적위군은 7월10일 인민정부 수립을 선포했다. 인민정부도 복드 칸을 적대시하지 않았다. 그가 상징적인 국가주석직에 계속 있는 것을 반대하지 않았다. 복드 칸이 몽골 불교의 수장인 ‘젭춘담바 호탁트 8세’를 겸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몽골 인구의 압도적 다수로부터 존경받는 그는 민족 통합을 이끌어낼 수 있는 상징적 존재였다.

당시 고비사막은 두 차례 연이은 몽골 정변으로 혼란스러웠다. 언제 어디서 갑자기 백위군의 패잔병이 나타날지 몰랐다. 지배권을 되찾고 싶어 하는 중국 군벌 군대도 위험했다. 혼란을 틈타 여행객의 재산을 노리는 마적단도 출몰하곤 했다. 이 때문에 중국과 몽골 사이를 오가는 교통은 3개월 이상이나 두절된 상태였다.

꼭 그 노선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만주 경유 노선을 이용하는 것이 훨씬 더 편리했다. 천진역을 출발해 봉천역과 하얼빈역을 거쳐 러시아 치타역으로 나아가는 이 노선은 열차를 이용하는 문명의 길이었다. 하지만 당시 산해관 이북 지역은 일본 세력 범위에 속했다. 밀정들이 감시의 눈초리를 번득이는 만주철도에 탑승하는 것은 세심한 변장을 요하는 위험한 행동이었다.

여운형도 처음에는 만주 경유 노선을 택했다. 그러나 두 번이나 실패했다. 한 번은 중국인으로 변장한 채 값싼 좌석표를 구해 번잡한 삼등실 한구석에 몸을 실었다. 또 한 번은 일등실 비싼 좌석표를 끊었다. 하지만 어느 경우나 밀정으로 의심되는 사람들의 주목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말쑥한 중국 신사나 양복 차림을 한 낯선 자들이 정거장 구내와 열차간을 오가며 여객들을 감시했다. 틀림없는 ‘인간 사냥꾼’들이었다.1 가던 길을 멈춰야 했다. 산해관 전방 143㎞ 지점에 있는 당산역에서 하차했다.

몽골 경유 노선과 만주 경유 노선. 오미영 제공

영하 20도 어두운 사막에서 노숙을

동행자가 있었다. 두 사람이었다. 그중 하나는 2년 전 3·1운동 때 프랑스 파리강화회의에 파견된 대한민국임시정부 대표 김규식(40)이고, 다른 한 사람은 일본 도쿄 와세다대학 유학 중 2·8독립선언에 참가했다가 중국으로 망명한 나용균(25)이었다.2 모두 다 극동민족대회에 참가할 조선 혁명단체의 대표자였다.

고비사막을 종단하려면 잘 준비해야 했다. 여운형 일행은 중국 장가구(장자커우)에서 닷새간 머물며 갖가지 필요한 것들을 구했다. 먼저 이동 수단을 섭외했다. 다행히 미국인 콜맨이 경영하는 ‘외몽상사회사’(The Mongolian Trading Company)의 자동차 운송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었다. 이 회사는 장가구~울란바토르 구간에 자동차를 운행했는데, 자동차 한 대에 4명이 탑승해 요금 120달러를 받았다. 편도 1천㎞ 거리에 닷새가 걸리는 일정이었다. 비싼 운임이었지만 행운이었다. 자동차가 운행되기 전에는 같은 길을 가는 데 50일이 걸렸다고 한다. 동료 김규식이 1918년에 같은 노정을 경험했는데, 하루는 자동차로 갈 수 있었고, 11일 동안은 눈으로 길이 막혔고, 37일 동안 낙타를 타고서 사막을 건넜다고 한다.3

11월 하순의 고비사막은 이미 한겨울이었다. 영하 10도 이하의 추위가 몰려왔다. 여운형 일행은 방한용 의복과 침구를 챙겼다. 추위가 맹위를 떨치는 한밤에 노천에서 야영할 수 있어야 했다. 적어도 나흘 밤을 그렇게 견뎌야 했다. 여운형이 준비한 용품은 “털내의, 가죽옷, 낙타털로 안을 받친 장화, 긴 털이 그대로 붙어 있는 늙은 양가죽으로 만든 방한모자, 털가죽 제조의 장외투, 털가죽으로 가장자리를 싼 셀룰로이드 안경, 늙은 양의 털가죽으로 만든 침낭” 등이었다. 식료품 준비도 만만치 않았다. 여행 중의 피로를 쉬이 회복하고 에너지를 보존하기에 충분할 만큼 영양가 높은, 잘 부패하지 않는 음식물을 준비했다. 중국식 만두와 서양식 빵을 주식으로 하고, 부식으로 통째 삶은 닭 서너 마리, 러시아식 오이피클, 비스킷, 초콜릿 등을 챙겼다. 음료수는 커피와 차를 담은 수통 두세 개, 우유 서너 통, 약용으로도 쓸 수 있는 위스키 한 병을 준비했다.

호신용 무기도 갖췄다. 여행 중에 백위군이나 중국군 패잔병, 마적을 만나면 사용할 용품이었다. 험난한 전도를 앞두고서 생명의 위험에 대응하기 위한 것들이었다. 권총, 기병용 소총, 예리한 비수 등을 개인마다 챙겼다.

‘외몽상사회사’는 자동차 세 대를 편성했다. 탑승자를 가득 채웠을 테니 일행은 12명쯤 됐을 것으로 보인다. 조선인 세 사람을 제외하고는 다들 국경무역에 종사하는 중국인 상인이었다. 콜맨 사장은 각종 자동차부품과 가솔린을 가득 채웠다. 예비 연료도 누락 없이 준비했다. 마침내 11월 하순 어느 날 오후, 자동차 세 대는 일렬종대로 줄지어 사막을 향해 출발했다.4

몽골과 중국 국경 사이에 있는 고비사막은 동서 1500㎞, 남북 800㎞, 면적 130만㎢에 이르는 암석 사막이다.

별들이 삽시간에 온 하늘을 뒤덮고

고비사막의 첫날에는 다행스럽게도 실내에서 숙박할 수 있었다. 사막 가운데 자리한 조그만 마을에 덴마크 선교사 4명이 거주하는 숙소가 있었다. 2명은 남성이고, 2명은 여성이었다. 다들 미혼이었다. 일행 중에서도 영어를 자유롭게 구사하는 사람들이 환대받았다고 한다. 조선인 가운데는 여운형과 김규식이 그에 속했다. 사막의 고립된 환경 속에 지내는 선교사들은 외부 세계의 모든 최근 사건에 대해 쉴 줄 모르는 질문의 화살을 던졌다. 여행자들은 가지고 있던 최근 두 달치 영자신문을 모두 그들에게 줬고, 밤이 깊어가는 것을 잊은 채 담소에 열중했다. 여운형은 뒷날 여행기에서 쓰기를, “실로 유쾌한 밤이었다”고 회고했다.

둘째 날 이후부터는 비슷한 행운을 더는 맛보지 못했다. 온종일 차를 달렸으나 마을이라곤 흔적도 찾지 못했다. 사막에 어둠이 내려오면 하룻밤 노숙을 준비했다. 비교적 바람이 덜 부는 모래언덕 기슭에 자리를 마련했다. 일행은 꽁꽁 얼어붙은 식료품을 뜨겁게 끓인 차와 커피에 곁들여 근근이 먹는 흉내만 냈다.

그러고는 잠자리를 준비했다. 잠자리래야 침낭을 사막의 모래 위에 펴놓는 것 외에 달리 없었다. 가죽옷에 장화를 신고, 방한모와 방한안경을 쓴 채 그대로 침낭 속에 들어갔다. 권총을 머리에 베고 소총을 옆에다 끼었다. 손에서 총을 떼지 않은 것은 마적의 습격에 대비한 것이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먹을 것을 찾아 사막의 밤을 방황하는 맹수 떼를 염려한 까닭이었다. 방한모로 머리와 뺨을 가리고 방한안경으로 눈을 가렸으나 머리를 이불 밖에 내놓기 어려웠다. 사막의 밤은 추웠다. 온도계를 보니 영하 20도에 훨씬 못 미쳤다. 여운형은 침낭 속으로 머리까지 쏙 집어넣고 눈을 감았다. 호흡이 곤란했다. 이따금 침낭 밖으로 머리를 내놓고 숨을 쉬어야 했다.

그때마다 여운형은 주위에 전개된 고비사막의 밤 풍경을 볼 수 있었다. 하나둘 반짝거리던 별들이 어느샌가 삽시간에 온 하늘을 뒤덮었다. 아름답고 거룩했다. 여운형은 십수 년이 지난 뒤에도 그 밤을 잊지 못했다. 여행기에서 말하기를, 수많은 별이 “그 영원히 젊은 눈동자로 밤의 땅을 향하여 영구히 풀지 못할 수수께끼를 속살거리기 시작”하더라고 썼다.5 그는 추위도 잊어버리고서 한참이나 침낭 밖에 머리를 내놓은 채 밤하늘을 쳐다봤다. 유목민의 내면 의식을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들에게 삶의 에너지와 감격을 부여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 것만 같았다.

1921~1922년 극동민족대회에 참석할 때의 여운형.

울란바토르는 안전지대였다

장가구를 떠난 지 닷새 되던 날, 여운형 일행은 마침내 울란바토르에 도착했다. 시내에 들어섰을 때 새하얀 눈이 모든 것을 덮고 있었다. 사흘째 되는 날부터 내리기 시작한 눈이 아직도 계속 내리고 있었다. 나지막한 구릉과 벌판 위에도, 몽골 불교의 웅장한 사원 건축물 위에도 눈이 쌓여 있었다고 한다.

울란바토르는 안전지대였다. 수립된 지 5개월밖에 안 되는 인민정부지만 수도의 치안을 확고히 장악하고 있음이 뚜렷했다. 이제 여운형 일행의 극동민족대회 참석을 가로막는 위험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위험은커녕 몽골 인민정부의 지원 아래 안전한 여행을 계속할 수 있었다.

참고 문헌

1. 여운형, ‘나의 회상기’, <중앙> 1936년 3월. <몽양여운형전집> 1, 한울, 44~45쪽, 1991년.

2. 조선총독부 검사 이토 노리오(伊藤憲郞), ‘피의자(여운형)신문조서 제5회’, 1929년 8월5일. 고등법원검사국사상부, <조선사상운동조사자료> 제2집, 33쪽, 1933년 3월.

3. 오미영, ‘1910년대 한국독립운동과 몽골’, <한국독립운동사연구> 78, 독립기념관 독립운동사연구소, 167~171쪽, 2022년.

4. 여운형, ‘몽고사막 횡단기’(‘나의 회상기’ 제2편), <중앙> 1936년 4월. <몽양여운형전집> 1, 한울, 46~47쪽, 1991년.

5. 위의 글, 50~51쪽.

임경석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독립운동 열전> 저자

*임경석의 역사극장은 한국 사회주의 운동사의 권위자인 저자가 한국 근현대사 사료를 토대로 지배자와 저항자의 희비극적 서사를 풀어내는 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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