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겉멋’이라 비난받던 청바지, 힘들었던 그 시절 허락된 유일한 무대 의상

윤수정 기자 2023. 7. 11. 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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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현대사 보물] [13] 가수 양희은
1970년대 ‘청바지에 꽃신 신은 여자 통기타 가수’로 통하며 당대 청년 문화를 대표했던 가수 양희은. 그는 “현재도 청바지를 자주 사모으고, 출퇴근 때마다 자주 입는다”고 했다. /장련성 기자

‘청바지 가수도 할 말 있다’.

1974년 9월 28일 자 조선일보 지면 ‘젊은이의 발언’에는 위 제목으로 가수 양희은(71)이 쓴 기고글이 실렸다. ‘청바지’와 ‘통기타’를 저항과 자유의 상징처럼 여기던 청년문화를 ‘겉멋’이라 비판했던 당시 세간 반응에 “생활이 담긴 진실한 이야기를 퇴폐로 모는 것은 이해할 수 없다”며 반박한 글이었다. 그가 청바지·청남방 차림으로 통기타를 옆에 세운 채 찍은 1971년 데뷔 음반 ‘양희은의 고운노래 모음 1집’ 표지는 당대 청년들의 가슴을 뜨겁게 만든 상징과도 같았다.

최근 서울 마포구에서 만난 양희은은 “내가 청바지를 좋아한 건 무엇보다 내 분수에 맞았기 때문”이라고 회상했다. 최근 발간한 에세이집 ‘그럴 수 있어(웅진지식하우스)’에서 그는 당시 자신의 수식어가 “청바지에 꽃고무신을 신은 여가수”였다고도 썼다. “어머니가 미8군 부대에서 일하던 지인을 통해 생일선물로 사다 준 생애 첫 통기타와 미제 청바지”가 그에겐 유일한 공연용 소품이었다. “미니스커트와 달리 공연장 철제 스툴(의자)에 올라 앉아도 속옷이 보이지 않는 차림”이었다. “당시로선 드물었던 ‘최첨단 이혼’을 한 홀어머니 밑에 세 자매가 자랐죠. 운동화 밑창이 떨어져 비가 새는데 새로 살 돈이 없었어요. 대신 그 시절 고등학교 연례 행사였던 ‘민속무용경연대회’에서 썼던 남자 고무신을 꺼내 신고 무대에 오른 거예요. 그나마 돈 좀 벌고 나서 꽃무늬 고무신으로 업그레이드된 거고.” 집에 온수가 나오지 않아 솥에 물을 데워 머리를 감던 그에겐 “청바지 뒷주머니에 목욕비로 빳빳한 500원짜리 한 장 들어 있으면 족했던 시절”이기도 했다.

양희은은 특히 1970년대 한국 미용계의 대모로 불렸던 헤어디자이너 그레이스 리(이경자)가 “당신은 청바지를 절대 벗어나면 안 된다”고 해준 말을 잊지 못한다고 했다. “제가 ‘이젠 뚱뚱해서’ 못 입는다고 했더니 강한 어조로 ‘당신의 처음을 기억하고 호감을 가졌던 사람들의 이미지를 뭉개버리려 하면 안 된다’고 했지요.”

양희은이 4일 발간한 새 에세이집 '그럴 수 있어(웅진지식하우스)'. 2021년 펴 낸 '그러라 그래'처럼 그의 평소 입버릇에서 제목을 따왔다. 1970년대 '청바지 가수'로 당대 청년들의 마음을 대변했던 데뷔 초 시절부터 최근 근황까지, 담담하면서도 공감가는 문체와 귀한 사진들로 담아냈다. 책 발간 당일 서울 마포구에서 만난 양희은은 "요즘 내 또래의 대화 주제는 '병원 순회 공연'이다. 이젠 건강 체크도 큰맘 먹고 날을 잡아, 하루에 다양한 진료과를 돌아봐야 한다"면서도 "그래도 여전히 난, 청바지를 즐겨 입는다"며 웃었다. /웅진지식하우스

◇ 라디오 방송국 겹치기 출연한 인기 청바지 가수

1974년 조선일보 기고 당시 양희은은 필자 소개를 ‘서강대 사학과 휴학 중, TBC 팝송다이얼 DJ’라 적었다. 이후 1976년부턴 오후 2~4시는 종로5가 CBS 기독교 방송국, 오후 4~6시엔 서소문 TBC 동양라디오에서 겹치기 출연으로 라디오 방송을 했다. “양쪽 방송국 국장끼리 합의를 봤다고 했어요. CBS방송 종료 음악이 흐를 때쯤 뛰쳐나가 종이 전철표를 끊고 TBC로 죽어라 달리곤 했죠.” 당시는 위수령 발동과 각 대학 휴교령으로 양희은과 또래 학생들이 자주 라디오 앞에서 시간을 보낼 때이기도 했다. “군인들이 학교를 장악해 갈 수가 없고, 그러니 라디오 방송국 LP도서실에서 살다시피 했어요. 또래들이 스프링 노트를 쭉 찢어 우둘투둘한 자국을 내가며 쓴 사연 종이가 잔뜩 쌓일 때였죠. 생방송 후 자정부터 새벽 4시까지는 통금 때문에 방송국 차가 출연진을 태워 가수 A네 집, B네 집을 들르며 내려줬어요. 방송국 사람들이 연예인 집을 다 알던 시절이었어요.(웃음)”

◇데뷔 음반 실린 ‘아침이슬’ 53년 갈 줄 몰랐다

인터뷰 당일 양희은은 “자신의 기억에 강하게 남은 음반”이라며 LP 네 장을 들고 왔다. 이 중 데뷔 음반에 실린 ‘아침이슬’은 당대 청년들의 삶을 뒤흔든 곡. 1987년 7월, 경찰 최루탄을 맞고 숨진 연세대생 이한열을 기리던 운구 행렬이 시청 앞 광장 도로를 가득 메웠을 때도 이 노래가 흘러나왔다. 양희은은 특히 “1972년 당시 하굣길에 신촌 로터리 저쪽에서부터 들려오는 아침이슬을 듣고 모골이 송연하고 소름이 쫙 끼쳤다”고 했다. “내 노래가 그렇게 (집회에서) 불릴 줄은 진짜 몰랐어요. 내 노래도 아니지. 이건 진짜 현장에 있는 그이들의 것이구나 했죠. 이게 53년째 수식어로 따라다닐 줄이야….”

양희은은 최근 에세이집에 이 곡을 쓴 김민기와의 사진을 실으며 “구겨지고 찢어진 악보에 적혀 있던 아침이슬은 꿈에도 가수가 되겠다는 생각이 없던 나를 가수로 만들었다”고 썼다. 서울 명동의 대학생 집결소였던 ‘YWCA’ 서울 지부에 마련된 ‘청개구리 다방’이 1970년 두 사람의 첫 만남 장소였다. 100원을 내면 1원을 기부금으로 낸 뒤 나일론 자루로 만든 신발주머니를 받아 들어가는 앉은뱅이 다방이었던 이곳에는 한 뼘 높이로 돋우어진 단상 무대가 있었다. “초록, 파랑, 노랑, 빨강, 색색의 셀로판지를 씌운 조명을 수동으로 돌려가며 학생들이 학예회처럼 공연을 했죠. 전유성 선배는 여기서 판토마임도 하고. 저는 재수생일 때 딱 두 번 갔고, 가자마자 노래를 시켜 팝송 ‘웬즈데이 차일드’를 부른 게 대학 재주꾼들을 헌팅하러 온 기독교 방송국 눈에 들어 데뷔 계기가 됐죠.”

노래 ‘아침이슬’이 실린 1971년 양희은의 데뷔 음반(왼쪽)과 그의 애독서인 김기찬 작가의 ‘골목 안 풍경 전집’(오른쪽). /양희은 제공

노래는 열아홉 때부터 가장으로 세상에 발을 디딘 양희은의 생계 수단이었다. “당시 내 나이 또래 여자애가 취직해 집안을 살리려면 뭘 많이 했겠어요. 공단에서 자신을 썩혀 거름이 돼가며 번 돈을 집으로 부쳐 오빠, 남동생들 ‘사’자 붙은 직업 갖게 하거나, 1970년대 관광붐이 일면서 많이 생겼던 유흥업소에 일하러 가거나. (그나마) 난 정말 드문 경우였죠.”

“3층에 신중현 밴드, 2층에 송창식·하남석 등 통기타와 발라드 하는 멋쟁이들은 다 모였다”는 명동 오비스캐빈에서 공연 후 받는 월급 ‘4만원’이 당시 그가 벌 수 있는 가장 큰돈이었다. 일개 맥주홀임에도 음향 엔지니어가 시민회관(현 세종문화회관) 외국가수 내한 공연 때마다 불려갈 만큼 “당대 최고의 공연장”이었지만, “술 취한 남자들이 ‘계집애가’란 눈초리로 쳐다보던 곳”이기도 했다. “(내 몸을) 만지고 도망가는 사람을 우리 웨이터 아저씨들이 잡아와 ‘우린 고소당하니깐 못 건드리니 희은양이 맘껏 때려’ 하곤 했죠. 당시 (여성 포크 가수가) 저와 이연실, 박인희, 방의경 정도? 다음 세대에 남궁옥분 등이 줄줄이 나왔지만 그 몇 년간 (환경) 차이가 컸어요.” 여가수 선배들이 그에게 든든한 길라잡이가 됐다. “패티김 선배님이 입버릇처럼 “립스틱 바르는 것 절대 잊지 말라”고 하셨죠. 흙 묻은 구두는 절대 무대에 안 신고 올라가셨고요.”

◇ 옛 서울 골목 찍은 사진집 “그리워 자주 본다”

양희은은 요즘 1938년부터 2005년까지 개발 이전의 서울 골목 안 풍경을 주로 찍은 사진작가 김기찬의 ‘골목 안 풍경 전집(2011)’을 자주 꺼내본다. 강아지를 품에 안고 있는 어린아이 사진이 유독 많이 나오는 전집 속 서울 옛 골목은 그가 “개집에 얹혀살 듯 개가 유독 많던” 곳으로 기억하는 서울 종로구 가회동 고향집 골목이기도 하다. 이곳에서 어린 시절 세 자매가 기르던 ‘백구’가 1972년 김민기가 붙인 음률을 만나 그의 대표곡 중 하나로 재탄생했다. “그 시절, 가난했기 때문에 오히려 너무나 정겹고 따뜻했던 이웃들이 그리워서 자주 봐요. 이제는 없는 서울 모습이거든요.”

“올해 하반기 새 음반을 발매할 계획”이라는 양희은은 특히 “요즘은 내 노래의 운명이 어찌될지 참 궁금하다”고 했다. “노래는 만든 사람, 처음 부른 가수가 아닌 불러주는 이들의 것임을 깨달았다”는 것. “만약 아침이슬을 처음에 (뭘 하고자) 작정하고 불렀으면 이렇게 오래 안 따라다녔을 거예요. 전 그냥 이 노래 후렴구가 좋았을 뿐인데. ‘서러움 모두 버리고 나 이제 가노라’ 가사처럼, 어렵고 답답했던 나의 현실을 모두 버리고 어디론가 그냥 훨훨 갈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했거든요. 결국 (모두의) 하루하루가 쌓여서 이 곡의 53년이 된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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