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수관 팠다가 ‘11세기 보물’ 54개 든 솥단지 발견

노형석 2023. 7. 6. 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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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로 옆 하수관을 팠다가 옛적 절집의 보물 단지를 찾았다.

아기 몸체보다 큰 쇠솥단지 안에는 11~12세기 고려 장인들이 정성껏 만든 향로와 촛대, 금강저 등 최고 수준의 불교 제례용 공예품들이 가득했다.

안에 청동 향로, 촛대, 밀교의식에 쓰는 제례도구인 금강저(金剛杵), 물을 따르는 용기 등이 빽빽하게 담겨있었다.

육안으로 유물 54점이 확인되는데, 이들 가운데 향로와 촛대 등 26점 정도만 꺼내어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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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사정동서 청동향로 등 최고 수준 유물 54점
촛농받침 꽃잎 모양은 문화재청장도 “본 적 없다”
지난달 발굴 당시 철솥 내부의 불교 공양구들. 이들 중 위에 보이는 향로 등 20여점은 수습돼 밖으로 꺼내어졌다. 춘추문화재연구원 제공

도로 옆 하수관을 팠다가 옛적 절집의 보물 단지를 찾았다.

아기 몸체보다 큰 쇠솥단지 안에는 11~12세기 고려 장인들이 정성껏 만든 향로와 촛대, 금강저 등 최고 수준의 불교 제례용 공예품들이 가득했다. 신라 고도 경주 시내에 있는 고찰 흥륜사터 부근에서 지난달 초 벌어진 일이다.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는 경주 사정동에 있는 국가사적 ‘흥륜사지’ 서쪽 도로가에서 금속공양구들이 들어간 철솥 등의 청동 공양구 54점이 최근 나왔다고 5일 발표했다. 유물이 나온 장소는 1980년대 지어진 현재의 흥륜사가 자리한 곳으로부터 약 22m 떨어진 지점이다. 철솥 단지를 파낸 이들은 사설 발굴 조사기관인 춘추문화재연구원 조사원들이다.

조사원들은 지난달 초 도로가를 발굴하기 위해 1m 정도 발굴갱을 파고 들어가다가 뜻밖의 수확을 올렸다. 앞서 경주시 쪽은 인근 남천에서 나온 물이 잘 빠지지 않는다는 주민들의 민원이 제기되자 지난 2~3월 금성로 도로변 지하에 하수관로를 설치하기 위해 구덩이를 파는 굴착공사를 벌이기 시작했다. 연구원 관계자들이 현장을 살펴보다 통일신라 유적층이 나온 것을 발견하고 사전 조사가 필요하다고 건의해 발굴작업이 시작됐다.

솥안에서 아직 꺼내지 못한 유물들. 향로뚜껑과 밀교 의식도구인 금강저 등이 흙덩이, 녹과 엉켜있다. 노형석 기자

공양구를 담은 철솥은 지름 약 65㎝, 높이 62㎝의 크기다. 안에 청동 향로, 촛대, 밀교의식에 쓰는 제례도구인 금강저(金剛杵), 물을 따르는 용기 등이 빽빽하게 담겨있었다. 육안으로 유물 54점이 확인되는데, 이들 가운데 향로와 촛대 등 26점 정도만 꺼내어 놓았다.

금강저와 향로뚜껑을 비롯한 나머지 유물들은 솥 내부에서 흙덩이, 녹과 엉켜있어 수습하는 과정에서 더 많은 유물들이 확인될 것으로 보인다. 수습된 공양구들은 만듦새가 뛰어난데다 상당한 물량이 나와 고려 금속공예사 연구에 요긴한 사료가 될 것으로 보인다.

향로들의 경우 주둥이나 몸체의 기형이 각이 진 고려 초기 11~12세기의 양식 특징을 보여준다. 특히 촛대에 꽂아 쓰는 촛농받침은 화려한 꽃잎 모양을 하고 있다는 점이 눈길을 끄는데, 이런 모양새는 처음 본다는 게 최응천 문화재청장의 설명이다. 얼핏 아령 형상을 떠올리게 하는 금강저는 경주권에서 처음 확인되는 유물이다.

촛농받침을 끼운 고려시대 촛대. 뾰족한 꽃잎 모양이 특징인 촛농받침은 이번에 처음 출현한 고려시대의 공예 디자인이다. 노형석 기자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전시관에 나온 경주 사정동 흥륜사지 출토 철솥의 불교 공양구 유물들. 고려초기인 11세기~12세기로 편년되는 향로와 촛대, 촛농받침이 보인다. 아래 작은 금동여래입상은 통일신라시대 작품으로 인근 조사구역의 교란된 지층에서 별개로 나온 것이다. 노형석 기자

왜 보물들이 솥에 들어있었을까. 전문가들은 급박한 전란이나 재난, 화재 등이 일어났을 때 절집의 귀중한 성보들을 지키기 위해 종이나 솥 안에 모아 땅에 묻는 퇴장(退藏) 유물들로 보고 있다.

퇴장 유물들의 사례는 국내 유적에서 간간이 나온다. 2003년 500점 넘는 불교 공양구들이 솥 속에서 발견된 경남 창녕 말흘리 절터 유적은 국내 최대의 퇴장 유물이 출토된 곳이다. 충북 청주 사뇌사터, 경북 군위 인각사터, 서울 영국사터 (도봉서원), 경주 망덕사터, 굴불사터 등에서도 병향로, 정병 등의 여러 퇴장유물들이 확인된 바 있다.

아직 추정이지만, 철솥에 유물을 넣고 묻은 역사적 배경으로는 13세기 경주 일대까지 들어와 황룡사탑을 불태웠던 몽골군의 침탈이 우선 거론된다. 이밖에 연구소 쪽은 조사과정에서 따로 출토된 통일신라 시대의 작은 금동여래입상과 ‘靈廟寺(영묘사)’로 새긴 것으로 판독되는 기와 조각 등도 공개했다.

철솥이 나온 사정동 국가사적 흥륜사지는 일제강점기에 ‘신라의 미소’로 유명한 사람얼굴 무늬 수막새 기와가 나온 곳으로 전해진다. <삼국유사> 등 사서를 보면 흥륜사는 3세기 미추왕 때 처음 지어진, 가장 오래된 신라 사찰로 6세기 이차돈이 순교한 뒤 법흥왕~진흥왕 때 승려 아도에 의해 큰 절로 세워졌다는 기록이 보인다. 사정동 절터는 일제강점기부터 흥륜사지란 제호의 사적으로 관리됐고 해방 뒤인 1963년 국가사적으로 등재됐으나 정작 이 장소에서는 흥륜사를 입증할 만한 근거는 나오지 않았다. 

춘추문화재연구원의 ‘흥륜사지’ 발굴조사 과정에서 출토된 통일신라~고려시대의 기왓장들. ‘영묘사’란 절집 이름을 초서풍으로 새긴 명문기와와 명문의 탁본도 보인다. 노형석 기자

그 대신 7세기 선덕여왕 때 창건돼 조각대가 양지 스님이 활동한 명찰인 영묘사의 명칭을 새긴 기왓장만 70년대부터 올해 발굴까지 계속 출토됐다. 그래서 상당수 학계 전문가들은 오래 전부터 이곳을 사실상 영묘사 터로 지목해왔고, 실제 흥륜사 터는 지난 2009년 ‘흥’(興) 자 새긴 신라 수키와 조각이 출토된 북쪽 경주공고 자리가 유력하게 거론된다.

김동하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연구사는 “이번에 발견된 철솥 안의 불교공양구 유물들을 보존처리하는 과정에서 옛 절의 명문이 드러난다면 흥륜사 위치를 둘러싼 혼선을 종식시키는 결정적 근거가 될 수도 있다”고 내다봤다.

경주/글 ·사진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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