故 안정호, 전문 번역 시대를 연 ‘K문학의 효시’
김욱동 서강대 영문과 명예교수
“난 인터넷을 안 봅니다. 쓸데없이 정보가 많으면 오히려 상상력을 흐리게 만들어요. 정보적 가치는 있으나 사상적 깊이와 체계는 없는 동네라고 생각해요.”
지난 1일 세상을 떠난 안정효(82) 선생이 15년 전 한 매체와 인터뷰하며 한 말이다. 그가 쓴 컴퓨터는 인터넷에 연결된 적이 없다. 빛의 속도로 정보를 주고받는 시대에 시대착오적이라고 할 만하지만, 그는 번역가로 소설가로 누구보다 많은 업적을 쌓았다. 1975년 콜롬비아 출신 노벨 문학상 수상 작가인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백 년 동안의 고독’을 시작으로 그가 번역한 작품은 모두 150여 권에 이른다. 1985년에 베트남전 경험을 담은 ‘하얀 전쟁’을 발표하며 등단한 이후 내놓은 소설도 20권이 넘는다.
40여 년 전 안정효 선생으로부터 ‘백 년 동안의 고독’의 해설을 맡아 달라는 부탁을 받았던 기억이 생생하다. 중남미 특유의 ‘마술적 리얼리즘’의 열풍을 몰고 온 20세기의 고전 중 하나였던 작품 해설을 내게 맡긴 것은 영광이었다. 그러나 난해하기로 유명했고, 중남미 문학이 국내에 번역된 적이 없었기 때문에 도전과도 같았다. 누군가 걸어야 했던 그 길을 선생이 걸은 것이다.
그는 무엇보다 우리 나라에서 전문 번역의 전통을 세운 인물이다. 1970년대 이전까지만 해도 일제강점기 일본에서 영문학을 전공한 학자들이 주로 번역에 종사했다. 대부분 대학에 재직 중인 교수여서 번역은 본업이 아니라 부업이었다. 하지만 안정효 선생은 이윤기 선생과 함께 번역을 부업이 아닌 본업으로 끌어올려 명실공히 전문 번역의 전통을 확고히 했다. 1982년에는 존 업다이크의 ‘토끼는 부자다’로 제1회 한국 번역문학상을 받았다.
그가 번역한 외국 작품 중 가장 찬란한 빛을 내뿜는 것으로 나는 마거릿 미첼의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와 콜린 매컬로의 ‘가시나무 새’를 꼽는다. 순수소설이니 통속소설이니 하는 것에 얽매이지 않고 그는 세계 명작 반열에 오른 작품들을 완역해 한국 독자들에게 소개했다. 더구나 그는 적절한 한국어 단어 선택과 내용에 가장 걸맞은 문체를 구사해 모국어의 가능성을 높이는 데 크게 기여했다. 이 점이야말로 안정효 번역의 가장 돋보이는 부분이라 할 것이다.
그의 영어 실력은 대학 시절부터 정평이 나 있었다. 선생은 내게 대학 시절 일화 한 토막을 전해준 적이 있다. 서강대 영문과 시절, 영어로 소설을 쓰는 학생이 있다는 소문이 퍼졌는지 하루는 한국펜클럽 회장이던 문학평론가 백철 선생이 학교로 찾아왔다고 한다. 백 선생은 그에게 한국펜클럽에서 내는 잡지에 영어 단편소설 번역을 맡겼다는 것이다. 또 ‘코리안 리퍼블릭’(지금의 코리아헤럴드)의 문화부장이 만나자고 해서 가 보니, 신문사에 들어와 함께 일하자고 하여 곧바로 그 신문 기자가 됐다. 아직 졸업도 하기 전이라 교수들이 1년 동안 출석을 면제해 주었다.
청년 안정효의 첫사랑은 번역이 아니라 창작이었다. 창작 데뷔가 여의치 않자 번역가가 됐지만, 덕분에 오랜 습작 기간을 거친 숙성된 작품을 내놓을 수 있었다. 특히 그는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전쟁과 같은 거대한 현실을 그려낸 작품들로 주목받았다. 1985년 ‘전쟁과 도시’(이후 ‘하얀 전쟁’으로 제목을 바꿈)는 백마부대 소속으로 베트남 전쟁에 참가한 경험을 바탕으로 집필했다. 완성에 10년이 걸렸다. 그는 “1년 동안 쓴 책은 1년간 팔리고, 30년간 쓴 책은 30년간 팔린다”고 말한 적이 있는데, ‘은마는 오지 않는다’는 대학 시절인 1963년에 초고를 완성하고 1990년에 출판했으니 무려 27년이 걸린 셈이다. 이 작품들은 모두 영화로도 만들어져 크게 흥행했다. 두 작품은 저자가 직접 자기 작품을 번역하는 ‘자가 번역(self-translation)’을 처음 시도한 작품이기도 했다. ‘하얀 전쟁’은 ‘White Badge’로, ‘은마는 오지 않는다’는 ‘Silver Stallion’으로 미국에서 출간해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동명 영화로도 제작된 두 작품을 이른바 ‘K-문학’의 효시로 봐도 크게 무리가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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