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꽃의 영화뜰] 박찬욱 감독이 '남의 나라' 얘기를 연출하는 이유

박꽃 이투데이 문화전문기자 2023. 7. 1. 2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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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오늘 박꽃 이투데이 문화전문기자]

1979년, 영국의 한 무명 배우가 알 수 없는 이로부터 '스파이' 배역을 제안받는다. 그런데 이 작품, 무대에서 벌어지는 이야기가 아니다. 무대 바깥 현실에서 진짜 간첩인 것처럼 비밀스러운 연기를 수행해야만 하는 위험천만한 '첩보 작전'의 일부다. 그를 섭외하려는 이들은 팔레스타인 무장 조직을 추적 중인 이스라엘 정보국. 수상쩍은 역할극에 알 수 없는 끌림을 느끼기 시작한 무명 배우는 결국 제안을 받아들이고, 연기하면 할수록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 사이의 복잡한 정치적 분쟁 사이에 끼어들게 됨을 직감한다.

작품을 잘 모르는 상태에서 들으면, 아마 이름을 발음하기도 낯선 유럽이나 중동 출신 감독이 연출한 첩보물로 짐작될 것이다. 사실을 알고 나면 좀 놀랄 수 있다. 이건 박찬욱 감독이 최초로 연출한 6부작 드라마 '리틀 드러머 걸(The Little Drummer Girl)'의 줄거리다. 2018년 영국 BBC와 미국 AMC를 통해 방송됐고, 2019년부터는 '리틀 드러머 걸: 감독판'이라는 제목으로 왓챠에서 공개돼 지금까지도 관람할 수 있는 작품이다.

▲ 드라마

'박찬욱'이라는 이름값에도 여전히 선뜻 시간을 내어주는 게 망설여지는 독자가 있을 수 있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이 아무리 수십 년간 첨예한 갈등을 벌이며 세계인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있다 해도, 우리나라에서 8000km쯤 떨어진 먼 나라의 사정에 큰 관심을 두고 있을 관객은 많지 않을 테니까. 2019년 '리틀 드러머 걸: 감독판'을 국내에 처음 공개하던 기자회견 자리에서도 비슷한 질문이 나왔다. 한국 사람들과는 그다지 접점이 없어 보이는 소재인데, 왜 시간을 할애해 이 작품을 봐야 하느냐는 말이었다. 좀 냉정하긴 해도 한 번쯤 연출자의 생각을 들어보고 싶은 질문이긴 했다. 그때 박찬욱 감독은 별 망설임 없이 이렇게 말했다.

“문학이나 영화의 좋은 점은 우리가 몰랐던 세계를 알게 해 준다는 거죠. (…) 우리나라가 분단, 냉전, 대결, 전쟁, 위험 등 여러 일을 겪고 있는데 세계 다른 나라 사람들이 아무도 관심이 없다면 얼마나 외롭겠습니까.”

그건 아마 박찬욱 감독이 생각하는 대중예술의 '역할'을 나타내는 답이었을 것이다. '범죄도시' 시리즈처럼 킬링타임으로 제격인 오락영화 또한 제 기능이 분명히 있겠지만, 창작물의 궁극적인 힘은 직접 겪어보지 않은 타인의 삶을 곱씹게 하는 데 있다는 이야기다. 남의 사정을 이해하는 게 인간으로 태어난 우리가 죽을 때까지 반복해야만 하는 필연적인 훈련이라면, 비교적 짧은 시간 안에 누군가에 대한 이해의 폭을 비약적으로 넓혀주는 영화나 드라마, 소설의 가치는 그의 말마따나 작지 않을 것이다.

▲ 드라마 '동조자 (The Sympathizer)' 포스터. 사진=나무위키

박찬욱 감독은 지난해 개봉한 '헤어질 결심' 이후 신작으로 HBO 드라마 '동조자(The Sympathizer)' 연출을 택했고, 이미 촬영을 마쳤다고 한다. 이 작품 역시 이중간첩으로 활동하는 베트남계 미국인의 이야기를 드라마화한 것이다. '리틀 드러머 걸' 만큼이나, 국내 관객에게는 '남의 나라 이야기'일 수도 있는 신작이다. 박찬욱 감독은 때마침 22일 공개된 넷플릭스 CEO 테스 서랜도스와의 대담에 참석해 잠시 얼굴을 비췄는데, 이때 '좋은 영화란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고는 4년 전 '리틀 드러머 걸' 기자회견 당시 전했던 것과 거의 다름없는 이야기를 들려줬다. 다시 들으니, 일일이 챙겨보기 버거울 정도로 수많은 영화와 드라마가 범람하는 시대에서도 살아남은 거장의 다짐으로 해석할 수도 있을 듯싶다.

“'좋은 영화'라는 건, 협소하고 편협한 자아를 넓혀주는 거라고 생각해요. 사람은 누구나 경험이 한정돼 있고 만나는 사람의 숫자도 뻔하잖아요. 영화가 나와는 다른 사람, 내 식구나 친구가 사는 곳과는 다른 종류의 세계를 실감 나게 보여주고 거기에 '연결'되게 할 수 있다면, 우리 자신도 좀 더 넓어질 수 있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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