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던 경성]100년 전 내한한 美 야구 올스타팀, ‘조선軍’ 무참히 꺾다

김기철 학술전문기자 2023. 7. 1. 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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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라이브러리속의 모던 경성]1922년 12월8일 용산 철도운동장, 23대 3으로 격파
1922년 12월8일 경성에서 조선대표팀과 시범경기를 가진 미국 야구 올스타팀. 동아시아 투어를 출발하기 위해 캐나다 밴쿠버에서 기념촬영을 했다. 앞줄 양복입은 사람이 단장 겸 감독 허브 헌터. /위키피디아

1922년 12월7일 오후 7시50분 남대문 역(경성역 전신)에 미국 야구 올스타팀이 도착했다. 그해 월드시리즈를 석권한 뉴욕 자이언츠와 뉴욕 양키스, 보스턴 레드삭스 선수가 포함된 대표단이었다. 조선호텔에서 하룻밤을 보낸 이들은 다음날 오후 3시 용산 만철(滿鐵)운동장에서 조선 대표팀과 맞붙었다. 1904년 필립 질레트 선교사가 황성기독교청년회를 통해 처음 야구를 선보인 이래 20년도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문제는 날씨였다. 경기장인 용산 만철운동장엔 얼음이 한자(약 30센티미터) 가량 두껍게 얼어 얼음을 깨고 녹여야 했다. 다행히 경기 당일 추위는 잠시 수그러들었던 모양이다. ‘연일 사람을 괴롭히던 근일의 추운 일기도 멀리서 온 귀빈을 기쁘게 맞는 듯이 작일에는 특히 일기가 매우 완화하야 때아닌 봄바람이 불었으매…’(‘壯絶快絶한 국제적 경기’, 조선일보 1922년 12월9일) 한낮 영상 4.4도까지 기온이 올랐다. 입장료는 5원,3원, 2원, 1원으로 학생, 군인은 50전을 받았다. 상당히 비쌌지만 관중이 구름떼처럼 몰려들었다. 임시 전차 10여대를 증설했지만 만원사태를 이룰 만큼 성황이었다.

1922년12월8일 오후 용산 철도운동장에서 기념촬영하는 미국 야구 올스타팀. 그해 월드시리즈에 출전한 메이저리거들이 대거 포함된 정예팀이었다. 조선일보 1922년 12월10일자
미국 올스타팀과 맞선 조선대표단. YMCA와 학교 야구단 아마추어 선수들로 급조했다. 조선일보 1922년12월10일자.

‘미국에서 온 직업야구단은 세계에서 능히 당할 자가 없는 노련한 용장들이며 조선군도 조선안에서 이름있는 맹장으로만 조직되었음으로 양군(兩軍)의 승패는 어찌되었든지 용비호략하는 그들의 장쾌한 싸움은 한번 구경치 아니할 수가 없었다. 그럼으로 개전되기 전부터 모여드는 관중은 넓고 넓은 만철운동장내에 가득하야 조선에서는 별로 보지 못하던 대성황중에 양군은 수만명 관중의 천지를 진동할 듯 열광적 환호하는 가운데 서로 자기의 위대한 포부의 기능을 뽐내게 되었는데,조선 안에 있는 미국 사람들이 고국의 동포를 응원하기 위하여 쳔리를 멀다하지 아니하고 각지에서 모여들어 수백명의 떼를 지어가지고 각기 팔뚝을 휘두르며 굉장히 환호하는 것도 일대 가관이었더라.’(‘壯絶快絶한 국제적 경기’, 조선일보 1922년 12월9일)

미국 올스타팀의 내한 경기를 보도한 조선일보 1922년12월10일자 신문.

◇YMCA와 각학교 선수로 ‘조선軍’꾸려

조선 대표팀은 당초 주장 이원용에 박석윤 손희운(이상 중앙체육단) 이석찬(평양) 박천병 이태훈(이상 중앙) 안익조 김종문(이상 휘문) 마춘식 함용화장의식 박안득 김성환(이상 배재)등 13명으로 발표됐다. 하지만 실제 경기때 이원용은 누심(壘審)을 봤고, 김정식, 정원복, 김태술, 김종세가 뛰고, 이태훈, 김종문, 김성환의 이름은 빠졌다. 조선대표팀은 YMCA야구단과 각 학교 야구선수를 모아 꾸린 아마추어 연합팀이었다. 경기 스코어는 23대 3. 예상대로 조선군(軍)의 참패였다. 월드시리즈 결승전까지 오른 뉴욕 자이언츠, 뉴욕 양키스 등 메이저리그 최강팀 선수들을 상대로 겨룰만한 실력이 아니었다.

◇관객 몰려 임시전차까지 운행

조선일보는 이날 경기를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이 경기 주 후원사였기 때문이다. 미국은 보스턴 레드삭스의 좌완 허브 페녹(Pennock)이 투수로 나섰다. 조선팀은 메이저리거 위세에 눌려 7회까지 한점도 내지못했다. 반면 미국 팀은 1회부터 홈런을 날리면서 기선을 제압했다. 경기를 지켜보던 관중들은 풀이 죽었다. ‘그들의 기술과 능력을 비교하여 차이가 있던 우리 전 조선군들은 7회까지 한 점도 얻지 못하게 되었음으로 당일의 관람자들이며 선수들은 낙망의 빛을 가지고 있게 되었다.’(‘용장맹사의 전투’,1922년12월10일) 조선군은 8회에 반격에 나섰다. 김정식, 마춘식이 잇달아 안타를 치고 나가면서 1점을 얻었고, 9회엔 2점을 더 얻어 23대3으로 끝났다. 1시간 50분간의 대결은 마무리됐다.

경기를 마친 미 야구 올스타팀은 이날 저녁 8시 명월관에서 열린 환영연에 참석했다. 조선대표팀 주장인 이원용 등이 주선한 자리였다. 미국 선수들은 조선 기생들의 검무와 승무, 노래를 이색적으로 느낀 모양이다.(‘화기융융한 환영회’, 조선일보 1922년12월11일) 대표단은 다음날인 12월9일 오전10시 남대문역에서 중국 심양(당시 봉천)으로 가는 열차에 올랐다. 만 이틀도 안되는 짧은 체류일정이었다.

◇'명예의 전당’ 오른 메이저리거

메이저리그 올스타팀은 쟁쟁한 실력파였다. 뉴욕 양키스 우완투수 웨이트 호이트(Hoyt)는 1922년에만 19승(12패)을 거둔 스타였고 1923년, 1924년,1928년 뉴욕 양키스의 월드시리즈 우승을 이끌었다. 1928년엔 23승을 거둬 MVP로 선정됐다. 1922년 월드시리즈를 제패한 뉴욕 자이언츠의 1루수 조지 켈리(Kelly)는 팀의 주전 타자로 돋보이는 활약을 했다. 보스턴 레드삭스 투수 허브 페녹(Pennock)은 1923년 뉴욕 양키스로 옮겨 팀이 4차례 월드 시리즈를 제패하는 데 주역이 됐다. 뉴욕 자이언츠의 케이시 스틴겔(Stingel)은 그해 타율 3할6푼8리를 기록한 강타자로 훗날 뉴욕 양키스 감독으로 월드시리즈를 7차례나 거머쥔 명감독이 됐다. 이들은 모두 야구선수로서 최고의 영예인 ‘명예의 전당’에 올랐다.

1922년 10월 말 일본에 도착한 이 올스타팀은 대학 팀과 17차례 경기를 치렀다. 전승을 거둘 법한데, 이변이 일어났다. 게이오대 졸업생들로 구성된 미타 클럽(三田俱樂部)에 9대 3으로 졌다.미국팀 타자들이 오노 미치로(小野三千麿)란 투수에게 꽁꽁 묶여 타격이 살아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메이저리그 올스타 팀은 경성을 거쳐 상해, 마닐라에서도 경기를 가졌다.

체육기자 이길룡이 신동아 1934년3월호에 쓴 '운동기자열전'. 이원용을 '조선 야구계의 대선배로 자타가 공인한다'고 썼다.

◇이원용의 고군 분투

메이저리그 올스타팀 내한 경기를 주도한 사람은 이원용(李源容·1896~1971)이었다. 1920년 조선체육회 설립 주역인 이원용은 야구 선수이기도 했다. 체육기자 이길룡이 ‘군(君)은 현존한 조선야구계의 대선배로 자타가 공인한다’ ‘조선의 야구사를 알아낸다면 알아낼 사람도 군(君)이오, 또 가장 오랜 문헌을 들추자고 하여도 군(君)이다’(‘운동기자열전’, 신동아 1934년3월호)라고 쓸 만큼 초창기 한국 야구계의 전설이었다.

경성 출신으로 알려진 이원용은 오성학교와 중앙기독교청년회 영어과를 마쳤다. 1917년 오성학교와 중앙기독청년회 출신들로 고려야구구락부를 조직해 같은 해 5월 인천에서 원정경기를 가졌으며, 7월에 동경유학생야구단과 경기를 가졌다.

이원용이 창간한 스포츠전문잡지 '조선체육계' 창간호. 1933년7월호/국립중앙도서관

◇조선체육회 창립 주역

이원용은 1920년 7월 출범한 조선체육회 창립 이사 8명 중 하나였다. 이사 대부분은 교육 관계자나 실업인이었다. 조선체육회가 그해 11월4일 배재고보 운동장에서 첫 사업으로 ‘제1회 전조선야구대회’를 주최한 데는 이원용의 역할이 컸을 것이다. 이 대회는 전국체전의 효시로 꼽힌다.

그는 조선체육회에 미국 올스타팀 내한경기를 주최할 것을 제안했지만, 과반수 이사가 ‘야구 기술을 팔아서 밥을 먹는 직업선수를 초빙할 필요가 없다’(‘야구반세기의 야화’, 신태양 1956년6월호)고 반대했다고 한다. 이 때문에 미국 올스타팀 초청은 이원용, 박석윤 등 야구인 일부가 주최하는 행사가 됐다.

이원용은 박석윤을 앞세워 일본 투어중인 미국 올스타팀 감독 헌터와 만나 교섭을 진행했다. 조선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른다는 헌터를 졸라 승낙을 얻어낸 이원용은 “사재를 턴다”면서 개런티 1000원에 계약을 성사시켰다. 단 한번의 시합을 위해 일본서 배와 기차를 갈아타며 경성에 오도록 만드는 데 성공한 것이다.

작년 11월 메이저리그 월드 투어팀이 100년 만에 내한 경기를 추진한다는 뉴스가 나왔으나 무산됐다. 이 땅에 야구가 소개된 지 10여년만에 세계 최고 메이저리그 선수들을 초청해 경기를 선보인 이원용의 용기는 지금 봐도 무모할 만큼, 경이적이다. 이원용은 1930년부터 3년여 조선일보 운동부기자로 활약했고, 이후 ‘조선체육계’란 스포츠잡지도 냈다가 문닫았다. 여기저기 벌인 사업 때문에 빚에 시달려 고전했다고 한다.

◇참고자료

이길룡, 운동기자열전, 신동아 1934년3월호

이원용, 야구반세기의 야화, 신태양 제5권제6호, 1956년6월

대한체육회, 대한민국 체육 100년,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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