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IFAN의 밤 수놓는 브랜든 크로넨버그의 ‘인피니티 풀’ [영화와 세상사이]

송상호 기자 2023. 6. 30. 1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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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스크린에만 머물지 않습니다. 1895년 처음 인류와 만난 영화는 태생부터 혼자 존재할 수 없는 예술이었습니다. 스크린을 바라보며 반응할 사람이 없다면, 그 영화는 상영되는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제 한 편의 영화는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수도 없이 상영되면서 전 세계 어느 누구와도 만나는 소통의 창이 됐습니다. 영화는 영화 자체로도 이야기를 만들어내지만, 스크린을 벗어날 때 더 많은 이야깃거리를 품고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영화광장’은 영화를 통해 세상을 말하고 사람을 말하는 시간입니다. 격주 주말, 영화광장으로 모여드는 모든 분들을 환영합니다. 편집자주

‘인피니티 풀’ 스틸컷.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제공

지난 29일 개막한 제27회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이하 BIFAN)의 상영작 중에 유독 눈에 띄는 영화는 캐나다 출신 영화감독 브랜든 크로넨버그의 세 번째 장편 영화 ‘인피니티 풀’(2023년)이다. 오는 9일까지 이어지는 BIFAN에서 세 차례 상영된다. 30일에서 1일로 넘어가는 심야상영 섹션에서 객석과 만난 뒤 이어 2일과 9일에도 만나볼 수 있다.

‘인피니티 풀’이 주목받는 이유는 바로 ‘크로넨버그’라는 이름 때문이다. ‘크로넨버그’는 국내를 비롯한 유럽권 영화 애호가들의 발길을 붙잡는다. 그 주인공은 바로 캐나다의 영화감독 데이비드 크로넨버그다. 그는 신체 변형과 바디 호러 장르, 인간의 원초적인 폭력, 성욕 등 본능의 영역을 다루는 데 있어 자신만의 확고한 세계를 구축했다. ‘비디오드롬’(1983년), ‘플라이’(1986년), ‘엑시스텐즈’(1999년) 등을 비롯한 20편이 넘는 장편을 연출해 마이너한 장르 영화를 사랑하는 관객들, 특히 BIFAN을 찾는 관객들에게는 익숙한 존재다.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네이키드 런치’(1991년)도 이번 영화제에서 만나볼 수 있어 관심이 모이고 있다.

브랜든 크로넨버그 감독은 바로 그의 아들이다. 아버지의 영향을 받으면서도 자신만의 독특한 영화를 만들어가고 있는 연출가인 그는 현대인들의 뒤틀린 내면을 겨냥한 영화를 만들어왔다. 2012년 ‘항생제’에 이어, 2020년 ‘포제서’로 아버지와 함께 거론되기 시작했던 그는 올해에도 ‘인피니티 풀’로 영화계의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영화는 한 남자를 따라간다. 소설가 제임스 포스터가 글이 써지지 않아 창작의 영감을 얻고자 아내와 함께 어떤 섬의 리조트로 휴양을 가는데, 여기서 제임스는 섬에 얽힌 특별한 비밀을 마주한다. 이곳은 범죄를 저질러 감옥에 구금된 뒤 처형을 받아야 한다고 해도 돈만 지불하면 자신의 복제 인간을 대신 처형할 수 있는 법이 통용되는 곳이었다.

문제는 여기서 발생한다. 과연 내가 처형당하지 않았다고 확신할 수 있을까? 신체를 복제하는 과정에서 제임스는 환각상태와 무의식을 유영하는 신비한 경험 끝에 정신을 잃었다가 깨어난다. 이후 복제된 자신이 기둥에 묶인 채 끔찍하게 처형당하는 모습을 본다. 이 시점부터 영화는 제임스의 복제본이 죽었는지, 제임스가 죽었는지 명확한 해답을 제시하지 않은 채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마침내 제임스가 자신의 손으로 자신을 처리해야 하는 순간이 올 때를 생각해본다. 그는 제임스일 수도 있지만, 제임스와는 관련이 없어져 버린 무수한 복제품 중 하나일지도 모른다. 그가 과연 어떤 감정과 생각을 품고 있을까? 관객들은 그 존재에 관해 어떤 판단을 내릴 수 있을지 감독은 질문하고 있다.

‘인피니티 풀’ 스틸컷.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제공

브랜든의 영화에서 사람들은 프레임의 중앙보다는 가장자리에 위치할 때가 많다. 식당에서 마주 보고 저녁을 먹을 때도, 직장에서 상사와 업무로 대화할 때도 카메라는 사람을 왼쪽이나 오른쪽 하단으로 몰아넣는다. 그렇게 영화 속 사람들은 어딘가 불안한 상태에 놓이는 것처럼 보인다. 도대체 무엇이 이들을 불안하게 보이게 하는 것일까. 왜 이들은 불안한 상태에서 혼란에 직면해야만 하는 걸까.

그는 지난 작품들에서도 개인의 내면을 파고들었을 때 만날 수 있는 뒤틀린 사회상을 영화로 보여줬다. ‘항생제’ 속 대중들은 연예인을 동경하는 뒤틀린 팬덤 문화의 극단적인 예시를 드러낸다. 연예인이 앓았던 질병의 바이러스를 거리낌 없이 몸에 주입해서 그들의 고통마저도 함께 느끼려는 사람들의 욕망이 스크린에 맺힌다.

‘항생제’ 스틸컷. 한국영상자료원 제공

두 번째 영화 ‘포제서’에는 타인의 정신과 육체에 접속해서 그 사람을 조종하는 사람들이 나온다. ‘인피니티 풀’은 그런 점에서 전작에서 다뤘던 소재를 다시 한 번 불러낸다. 정신과 육체를 지배당하든, 복제가 되든 도대체 진짜 ‘나’는 어떻게 규정될 수 있는 것일까. 감독은 이때 원인을 들여다보는 대신 병들어버린 사람들의 모습을 묘사하는 방식에 특별히 집중했다. 질문에 구체적인 답변을 내놓는 대신 혼돈과 변형의 과정을 겪는 존재들이 어떤 상황에 놓이는지 묘사한다는 점이 그의 영화에선 중요해 보인다.

‘포제서’ 스틸컷. ㈜제이앤씨미디어그룹 제공

그렇다면 그는 왜 병든 인간들을 자꾸만 스크린으로 불러내고 있을까? 인간을 병들게 하는 건 문명에 깊게 뿌리내린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사회구조다. 현대사회의 구성원으로 멀쩡히 녹아들기 위해선 돈을 벌 수 있는 능력을 갖춰야 하고, 집단에 녹아들 수 있는 판단력과 융통성, 적응력을 끌어올려야 한다. 여기서 낙오된다면 사회는 이들을 받아줄 여유가 없다. 브랜든의 영화는 사회의 통념과 그 정신없는 속도에 적응하지 못한 채 혼자만의 세계에서 방황하거나 신음하는 영혼들을 담아내고 있다.

‘인피니티 풀’ 스틸컷.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제공

송상호 기자 ssho@kyeong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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