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 "北의 엄마가 간암이래요, 제발 남한의 좋은 약 좀 구해주세요"

윤근영 2023. 6. 30. 0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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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처럼 죽지 않을 겁니다", "아버지 공개처형 직접 봤어요"
조명숙 여명학교 교장 "탈북 청소년, 엄마 간식 먹은 적 없어"

[※편집자 주= 조명숙 여명학교 교장 인터뷰 기사는 세 차례로 나눠 송고합니다. 원래는 두차례로 나눠 송고할 예정이었으나 인터뷰 분량이 많아 3차례로 나눠 송고키로 했습니다. 첫 번째 기사는 지난 26일 "아들아, 된장 물 한 사발만 있으면 나 이렇게 죽지 않을 듯한데"라는 제목으로 송고됐습니다. 오늘(30일) 송고된 기사는 두 번째 인터뷰 기사입니다.]

연합뉴스와 인터뷰 중인 조명숙 교장 [촬영 이건희]

(서울=연합뉴스) 윤근영 선임기자= "나는 엄마처럼 죽지 않겠다"

이는 남한에 온 북한 청소년들이 자주 하는 말이다. 남한의 청소년들처럼 "나는 엄마처럼 살지 않겠다"는 말은 하지 않는다.

조명숙(54) 여명학교 교장은 지난 14일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북한 출신 아이들은 부모가 굶어 죽고, 장마당에서 공개 처형되는 것을 목격했다고 전했다. 이들 아이는 어머니처럼, 아버지처럼 죽을 수는 없다고 판단해 목숨을 걸고 남한으로 왔다고 했다.

조 교장은 남한에 있는 청소년들이 북한에 있는 가족들과 통화하는 일이 있는데 어머니가 간암, 폐암, 유방암 등에 걸렸다면서 남한의 좋은 약을 보내달라고 하는 경우가 있다고 했다. 이 약들은 의사의 처방 없이는 구할 수 없기에 슬프고 안타깝다고 했다.

여명학교는 서울 남산 기슭에 있는 탈북청소년 중고등학교 과정 대안학교다.

연합뉴스와 인터뷰 중인 조명숙 교장 [촬영 이건희]

1970년 서울 노원구 상계동에서 태어난 조 교장은 대학생 시절인 1993년부터 외국인노동자를 도왔다. 1997년에는 탈북민 지원으로 전환했다. 탈북민 문제가 외국인 노동자 문제보다 훨씬 심각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는 남편 등과 함께 1997년부터 2년간 두만강 변, 백두산 자락 등에서 탈북민을 구호했다. 민간인으로는 처음으로 탈북민 13명을 이끌고 베트남 주재 한국 대사관에 도착, 이들이 한국에 입국하도록 도왔다.

2003년에는 탈북청소년 야학인 '자유터학교'를 열었고, 2004년에는 탈북청소년을 위한 대안학교인 여명학교를 제안해 이 학교가 문을 여는 데 기여했다. 그는 이 학교 교감을 거쳐 지금은 교장으로 일하고 있다. 남편은 난민을 위한 시민단체 '피난처'의 이호택(64) 대표다.

조 교장은 2012년 제9회 촛불상과 제24회 아산상 사회봉사상, 2014년 제8회 통일문화대상을 받았고, 2015년에 아쇼카 펠로우로 선정됐다. 저서로는 '사랑으로 행군하다', '여기가 당신의 피난처입니다', '꿈꾸는 땅끝' 등이 있다.

미얀마 아웅산 수치 석방 운동 당시의 조명숙 [본인 제공]

--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후회되는 일이 있다면.

▲ 내가 결혼할 때 어머니는 가난했다. 그런데도 매달 5만 원씩 모아서 나와 남편에게 결혼반지를 해주셨다. 금가락지였다. 우리 부부는 그 금가락지를 끼지 않았다. 어느 날 어머니는 반지를 왜 안 끼느냐고 물으셨다. 나는 그냥 장롱에 뒀다고 했지만, 사실은 결혼식 직후에 팔았다. 중국에서 탈북민 지원활동을 하려면 돈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북한에서 중국으로 넘어왔다가 되돌아가는 탈북민들에게 우리는 한국 돈으로 5만 원, 10만 원에 해당하는 달러를 손에 쥐여주곤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금반지를 팔지 않아도 활동에 큰 지장이 없었다. 반지에 담긴 어머니의 사랑을 간과한 것 같아 죄송한 마음이 든다.

-- 가족들한테 이기적이라는 말도 들었다고 하던데.

▲ 빈민가에 살았던 우리 가족은 내가 대학에 갔으니 집안을 일으켜줄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나 나는 대학 졸업하기 전부터 외국인노동자와 탈북민을 위한 삶을 살았고, 8년간 급여가 없었다. 여동생이 "우리 가족보다 외국인노동자와 탈북민이 더 중요하냐. 그런 일은 경제적으로 여유 있는 부자들에게 맡기고, 언니는 우리 가족을 도와주면 안 되느냐"고 했다. 가족으로서는 충분히 할 수 있는 말이었다. 가족들에게 항상 미안하다.

2022년 2월 파주 식품공장 숙소 불로 외국인 노동자 1명 사망. 당시 화재 모습 [파주소방서 제공]

-- 중학교 때부터 난민을 도왔다고 하던데.

▲ 여중학교 시절에 내 짝꿍이 말을 하지 않았다. 내가 일부러 웃기는 이야기를 했더니, 그 아이는 웃었지만 내 말을 못 알아듣는 것 같았다. 사정을 알아보니 그는 베트남 패망으로 떠돌던 보트피플 난민이었다. 부산을 거쳐 서울로 왔다가 빈민촌인 상계동으로 밀려난 것이다. 나는 그 친구에게 공부를 가르쳐 주기 시작했다. 내가 공부를 잘하는 아이가 아니었기에 가르쳐 주려면 나 먼저 공부를 해야 했다. 그랬더니 그 친구의 성적이 많이 좋아지지 않았지만 내 성적은 점프했다. 선생님들은 내가 커닝을 한 것이 아닌가 하고 의심해서 나를 교무실에 앉혀놓고는 시험문제를 별도로 풀도록 했다.

-- 외국인노동자 지원활동을 하면서 고용주들한테 미움을 받았을 듯한데.

▲ 나는 대학교 3학년 때부터 외국인노동자 상담센터에서 일했다. 외국인노동자들이 겪는 임금체불, 산재 피해 보상 문제 등을 도왔다. 한번은 한 외국인노동자가 빨리 본국을 방문해야 한다고 했다. 부모님 중 한 분이 돌아가실 것 같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사장이 그 외국인노동자의 여권을 갖고 있으면서 내주지 않았다. 나는 그 사장을 찾아가 여권을 내주라고 요청했다. 그 사장은 "너는 예쁘장하게 생겨서 왜 외국인노동자와 붙어먹느냐. 저기 여관에 가 있으면 여권을 주겠다"고 했다. 대학생이었던 나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몰랐다. 나중에 알고 보니 성희롱이었다.

산재 문제 대책을 요구하는 외국인노동자들 [연합뉴스 자료사진]

-- 외국인노동자 산재보상 제도개선에 기여했다고 하던데.

▲ 지난 1995년에 23일간의 시위를 벌인 결과, 불법체류자라고 하더라도 산재보상을 받을 수 있도록 법이 바뀌었다. 그전에는 산재를 당해도 아무런 보상 없이 본국으로 쫓겨난 외국인노동자들이 많았다. 나는 필리핀, 남편은 중국으로 각각 가서 "법이 바뀌었고 3년 소급 적용이니 빨리 보상받으라"고 했다. 나는 필리핀에서 노동절 날 피켓을 들고 다녔는데, 이 나라의 한 방송국 프로그램 PD가 나를 두 차례 출연시켜줬다. 이 방송의 효과가 컸다. 나는 이 방송국으로부터 공로상까지 받았다.

-- 굳이 필리핀까지 가서 그런 활동을 한 이유는.

▲ 우리가 노력해서 이뤄낸 법 개정으로 많은 외국인노동자가 혜택을 받았으면 하는 마음에서였다. 소급 적용 기간인 3년이 지나면 영영 보상을 못 받으니, 한 명이라도 피해자를 찾아내서 보상받도록 하는 것이 국격을 높이는 것으로 생각했다. 외국에 사는 우리 교민들을 위해서도 이런 일은 필요했다. 한국에서 일하다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이 본국에 돌아가 한국 교민의 식당에 불을 지르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그게 아니더라도 그들이 평생 한국을 원망하며 사는 것은 우리한테 이롭지 않다.

미국 전문가가 공개한 북한 교화소 위성사진 미국의 북한 인권 및 수용소 전문가인 데이비드 호크 북한인권위원회(HRNK) 선임 고문이 2017년 10월 공개한 북한의 평안남도 개천1호 노동교화소 위성사진

-- 일부 탈북민을 한국에 데려오는 것은, 중국 공안당국의 검거 강화를 초래해 오히려 중국에 있는 전체 탈북민을 힘들게 하고, 이념적 선전 목적으로 탈북을 기획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는데.

▲ 현실을 모르고 하는 소리다. 중국 현장에서 탈북민을 직접 만나면 그런 이야기를 할 수 없다. 위험에 빠져 살려달라고 하는데, 모르는 체할 수 있나? 인신매매단에 붙잡혀 장기가 적출될 위험에 빠진 소녀가 남한에 보내달라고 하소연하는데, 외면할 수 있는가? 중국 농촌에 팔려 남편한테 두들겨 맞고, 공안에 언제라도 체포될 수 있는 탈북 여성에게 참고 살아보라고 할 수 있나? 중국 인신매매단에 의해 성매매 조직에 넘겨졌다가 목숨을 걸고 도망쳤는데, 중국의 다른 지역에서 그냥 숨어 살라고 할 수 있나?

-- 중국의 농촌 총각과 결혼하는 탈북 여성의 나이는.

▲ 다양하지만 15∼16세 아이들도 있다. 너무 못 먹어서 성장이 안 돼 초등학교 4학년 정도로 보인다. 굶주려서 생리도 안 하는 아이들과 잠자리하려는 것을 보고 나는 화가 치밀곤 했다. 어떤 아이는 인신매매단에 붙잡혀 농촌 총각에 팔려 갔는데, 인신매매단이 아이의 가슴에 양말을 집어넣어 성숙해 보이도록 했다고 한다.

2012년 7월 중국에 구금당했다가 인천국제공항을 통해 귀국하는 북한 인권운동가 김영환 [연합뉴스 자료사진]

-- 탈북민이 중국 공안에 붙잡히는 것을 직접 목격한 적이 있나.

▲ 한 할아버지가 포승줄에 묶여 끌려가는 것을 본 적이 있다. 탈북민은 굶주렸기에 행색이나 얼굴에 금방 티가 난다. 그런 쇠약한 할아버지를 건장한 공안들 여러 명이 둘러싸고 잡아갔다. 한번은 중국 공안들이 우리가 거주 중인 아파트를 빙 둘러싼 적이 있다. 탈북민이 있다는 제보를 받고 체포하기 위한 것이었다. 우리는 그 아파트 3층에 탈북민들과 함께 머물고 있었다. 우리가 타깃이 아니었지만, 위험한 상황이어서 도주해야 했다. 탈북 아이와 엄마도 데리고 있었는데, 내가 아이를 등에 업고 뛰었다. 탈북 엄마가 굶주린 탓에 아이를 업고 뛸 수 없기 때문이었다.

-- 탈북민을 체포하는데, 중국 공안들은 왜 인력을 대규모로 동원하나.

▲ 공포심을 조성하기 위한 것이다. 일종의 시위라고 볼 수 있다. 탈북하면 이렇게 붙잡혀 간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농촌에서는 인신매매에 의해 중국 남성과 사는 탈북 여성을 공안이 파악해 놓고도 잡아가지 않는 경우가 많다. 알고만 있다가 정부에서 포상금 공고를 내면 그때 잡아간다. 중국 공안은 생각보다 만만치 않다.

-- 중국이 탈북민을 잡아서 북한에 보내는데 열성적인 이유는.

▲ 북한 체제 유지를 위해 필요하다고 판단하는 것 같다. 탈북 사태가 커져 북한 체제가 붕괴하면 자국이 감당해야 할 비용이 클 것으로 계산하는 것이다.

북-중 접경에서 총 들고 경계 근무 서는 인민군 병사 중국 지린(吉林)성 창바이(長白) 조선족 자치 현에서 2020년 촬영한 사진

-- 탈북자들 출신 지역을 보면 함경북도가 많은데, 왜 그런가.

▲ 함북 출신이 80% 이상이다. 이 지역은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중국과 닿아있다. 압록강은 강폭이 넓어 넘어올 만한 곳이 적다. 두만강은 좁은 곳의 폭이 20m에 불과하고, 수심이 1m도 안 되는 곳이 있다. 강이 얼어붙으면 후다닥 뛰어가기도 했다. 함북 외의 다른 지역 출신이 탈북을 안 하는 것은 아니다. 강원도 출신이 탈북한 사례가 있다. 북한의 학교는 정기적으로 아이들을 데리고 김일성 혁명유적지인 백두산을 방문하는데, 이때 숲으로 내달려 도주한 아이가 있다. 인솔 교사는 60∼70명의 학생을 관리해야 하니, 이를 막기가 쉽지 않다고 한다.

-- 탈북자들 대부분이 여성이라고 하는데, 그 이유는.

▲ 탈북자들 가운데 여성의 비율은 80% 이상이다. 북한에서는 유교적인 가부장적 문화가 강하다. 가족을 대표해서 식량을 배급받는 사람은 가장인 아버지였다. 아버지가 사라지면 금방 티가 날 수밖에 없다. 아버지가 중국에 와도 할 수 있는 일이 많지는 않다. 어머니는 가정부, 식당 등의 일을 할 수 있기에 취업이 훨씬 쉽다. 한국에 와서도 남성보다는 여성이 빨리 적응한다.

-- 북한에서는 왜 가부장적 문화가 강한가.

▲ 수령체제 자체가 가부장적 문화이기 때문이다. 가정에서는 작은 수령인 아버지가 권위를 갖는다. 학교에서도 남학생들이 지도자가 되고, 여학생들이 따르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한다. 남한에서 탈북 남성이 성희롱했다고 오해받는 경우가 있는데, 그런 문화의 영향도 있다고 본다.

2020년 북한 장마당의 모습 [연합뉴스 자료사진]

-- 탈북한 사람은 여러 번 탈북하는데, 그 이유는.

▲ 5∼6차례 탈북하는 사람도 있다. 중국에서 살아본 사람은 북한에서 지내기 힘들어한다. 중국에서는 굶주리는 일이 없고, 생활이 비교적 자유롭기 때문이다. 내가 아는 한 여성은 포승줄에 묶인 채 공안들에 둘러싸여 잡혀갔다. 그녀가 북한에서 살아남을 가능성은 희박해 보였다. 그녀의 사촌 언니한테 들은 바에 따르면 놀랍게도 그 후 7년 만에 그녀가 중국에 다시 나타났다고 한다. 그녀는 다리를 절면서 중국에 왔는데, 북한당국이 그녀의 다리를 꺾어놨다고 한다. 북한당국은 그녀의 의지를 꺾지는 못한 셈이다.

-- 북송된 탈북민은 어떤 처벌을 받나.

▲ 북한으로 넘겨지면 집결소를 거쳐 노동단련대 또는 교화소(정치범수용소)로 가게 된다. 처벌 강도에서는 중국 공안이 작성하는 문건이 중요하다. 그 문건에 남한행을 시도했거나 종교를 믿는다는 내용이 적혀 있으면 북한당국이 안 봐준다. 장마당에서 공개적으로 총살을 당하는 경우도 있다. 지금은 공개총살이 줄었는데, 이는 외국의 여론을 의식한 것으로 보인다. 생계형 단순 탈북자는 노동단련대에서 몇 개월 교육을 받고 나오기도 한다. 뇌물을 쓰면 처벌을 덜 받는 경우가 있다.

-- 공개총살을 직접 목격한 아이도 있나.

▲ 자신의 아버지가 총살당한 것을 본 아이가 있다. 아버지는 머리에 3발, 복부에 3발, 다리에 3발을 각각 맞아 몸이 산산조각이 났다고 한다. 이런 것을 목격하면 심각한 트라우마로 인해 오랫동안 정신적 고통을 겪는다.

2010년 군산항에서 북한 수재민에게 전달할 쌀을 선적하는 모습 [연합뉴스 자료사진]

-- 여명학교에서 힘들 때는 언제인가.

▲ 갑자기 아이가 울면서 학교 밖으로 뛰쳐나가는 경우가 있다. 엄마가 북한 또는 중국에서 붙잡혀 갔다는 소식을 들었다는 것이다. 엄마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아이는 바들바들 떨면서 울지만 나는 껴안아 주는 것 외에는 해줄 것이 없다. 이럴 때는 가슴이 아프고, 안타깝고, 미안하다.

-- 아이들이 엄마처럼 죽지 않겠다고 이야기한다고 하는데.

▲ 나는 어릴 때 "엄마처럼 살지 않겠다"고 한 적이 있다. 우리나라에서 딸로 태어난 청소년들이 이런 말을 많이 한다. 탈북청소년들은 이런 말을 하지 않는다. "나는 엄마처럼 죽지 않겠다"고 한다.

북한 옥류아동병원 의료진들 북한 대외선전매체 '조선의 오늘'이 2023년 4월 평양 옥류아동병원 심장혈관외과 리철진 과장(가운데)을 보도한 사진

-- 북한에 있는 가족들이 약을 보내달라고 하는 경우도 있다고 하던데.

▲ 한국에 온 아이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북한에 있는 부모와 통화하기도 하고, 돈을 보내기도 한다. 북한에 있는 어머니가 아픈데 돈이 없어 병원에도 못 간다고 하는 경우도 있다. 엄마가 유방암, 간암, 폐암 등에 걸려 남한의 좋은 약을 보내달라고 한다면서 나한테 부탁하는 아이도 있다. 이럴 때는 난감하다. 암에 좋은 약은 항암제인데, 의사처방 없이는 구할 수 없기 때문이다.

-- 북한 병원은 도움이 안 되는가.

▲ 북한 병원에는 의사는 있으나 약이 없다고 한다. 치료받으려면 환자가 밖에서 약, 수술 도구, 주사기 등을 구해서 병원에 들어가야 한다고 한다. 의사들이 공식적 의료활동으로 먹고살기 어려워 집에서 몰래 불법 의료행위를 하기도 한다.

-- 한국에서 아이들이 피 뽑는 것을 싫어한다고 하던데.

▲ 건강검진을 위해 피를 뽑는 경우가 있다. 북한에서 온 아이들은 채혈을 무서워해서 도망치기도 한다. 북한에서 아이들은 수혈하지 말라는 이야기를 부모로부터 많이 들었다고 한다. 영양제가 없는 북한에서는 환자가 아프고 기력이 부족하면 공동체 단위로 헌혈하도록 해서 환자에게 수혈한다. 수혈이 누구한테 도움을 준다면 피를 제공하는 사람한테는 손해가 된다고 인식하는 것이다.

서울 남산기슭에 있는 여명학교 모습 [연합뉴스 자료사진]

-- 스트레스를 많이 받을 것 같은데 어떻게 푸나.

▲ 내가 다른 사람에 비해 스트레스를 덜 받는 성격인 것 같다. 학교 아이들과 정신연령이 비슷해서 아이들과 함께 떠들고 논다. 일반적으로 교장 선생님이라고 하면 근엄하고 진지한 인상을 주는데, 나는 아이들과 장난치고 먹을 것을 만들어주곤 한다. 이렇게 생활하니 스트레스가 덜 쌓이는 것 같다.

-- 교장 선생님이 먹을 것을 만들어주나.

▲ 교장실이 아주 작은데, 아이들의 사랑방과 같은 곳이다. 나는 여기에서 달고나도 만들어주고, 호빵도 만들어 먹인다. 간식 시간에 아이스크림도 나눠주곤 한다. 아이들은 엄마가 만들어 준 간식을 먹어 본 경험이 거의 없다. 그래서 나는 엄마가 자식에게 해 주듯 이것저것을 만들어준다. 아이들은 사랑을 받으면 밝아지고 예뻐진다.

연합뉴스와 인터뷰 중인 조명숙 교장 [촬영 이건희]

-- 본인의 삶의 원칙은 무엇인가.

▲ 잘살자는 것, 열심히 살자는 것이다. 나는 죽을 때 나의 삶이 부끄럽지 않고, 민망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 아이들 교육의 목표는.

▲ 나는 여명학교 아이들이 일류대학교에 진학하는 것을 목표로 삼지 않는다. 잘 나누고, 사랑받고, 사랑할 줄 아는 아이들로 키워나가는 게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 북한 아이들의 성향은 어떤가.

▲ 마음이 따뜻하다. 힘든 삶을 살아와서 그런지 고난에 빠진 사람들을 보면 도우려 한다. 튀르키예 지진이 발생했을 때 여명학교 학생들과 졸업생이 며칠 만에 500만 원의 성금을 모아서 주한 튀르키예 대사관에 전달하기도 했다. 어떤 아이는 자신이 받은 장학금을 모두 후원했다. 북한 아이들은 똑똑하다. 교육을 잘 받으면 한국의 좋은 일꾼이 될 수 있다. 남과 북을 모두 경험했기에 통일에도 좋은 인적자원이 될 것이다,

(취재지원 이건희 인턴기자)

keunyoung@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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