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급발진 책임 논란]② EDR 기록 공개 의무화됐지만…운전자에게 불리한 경우 더 많아

노자운 기자 2023. 6. 28. 1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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납득하기 어려운 EDR 기록
제조업체가 책임 안 질 여지 만들어
미국, EDR 추출 장비 단일화하고
사고 기록 시간 늘리는 법 개정 진행 중
2022년 12월 강원도 강릉에서 발생한 급발진 사고. /법무법인 나루

지난해 12월, 강원 강릉시 홍제동에서 대형 사고가 발생했다. 60대 여성이 몰던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 한 대가 빠른 속도로 질주하다 도로 위를 날아 지하통로에 추락한 것이다. 운전자였던 할머니는 크게 다쳤고 차에 함께 타고 있던 열두 살 손자는 현장에서 사망했다. 블랙박스에는 사고 당시 애타게 외치던 할머니의 목소리가 고스란히 녹음돼있었다. “도현아, 도현아, 이게(브레이크) 안 돼.”

할머니를 포함한 도현 군의 유가족은 올해 1월 KG모빌리티(옛 쌍용차)를 상대로 7억6000만원의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냈다. 차량이 급발진했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는 이유에서다. 현재 유족과 KG모빌리티 양측은 이 문제를 놓고 춘천지법 강릉지원 민사2부에서 치열하게 다투고 있다.

이 과정에서 주요 쟁점으로 떠오른 것이 차량에 설치됐던 사고기록장치(EDR)였다. EDR에는 할머니가 가속페달을 100%로 밟았으며 브레이크는 전혀 밟지 않았다고 기록돼 있었다. 그러나 이는 현실적으로 일어나기 힘든 상황이다. 할머니는 차량이 뒤집히고 벽을 뚫고 나간 순간 정신을 잃은 상태였는데, 그 상황에서 ‘풀 액셀’을 밟는 건 사실상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전에도 여러 차례 제기돼 왔던 급발진 사고시 EDR의 신뢰성 문제는 강릉 사건을 계기로 다시금 주목받고 있다.

◇“EDR, 급발진 판단 근거 못 돼…車 업체에 빠져나갈 구멍 만들어줘”

EDR은 완성차 제조사가 차량 엔진컨트롤모듈(ECM)에 연결하는 장치로, 충돌 전후 속도 변화나 브레이크 작동 여부 등을 기록해 사고 발생 정황 파악에 필요한 정보를 제공한다. 우리나라에서는 2012년 자동차관리법 일부개정법을 통해 차량 제조사의 EDR 기록 공개를 의무화하고 있는데, 이 같은 법적 장치가 있음에도 여전히 법정에서 급발진은 거의 인정되지 않는 분위기다. EDR이 오히려 완성차 업체의 ‘면죄부’로 쓰인다는 비판이 나올 정도다.

현행법에선 자동차에 EDR을 장착 하는 것은 의무 사항이 아니다. 하지만 “사고기록장치를 장착한 자동차 제작·판매자 등은 자동차 소유자 등 국토교통부령으로 정하는 자가 기록 내용을 요구할 경우 해당 자동차의 사고기록장치에 기록된 내용, 분석 결과보고서 등 정보를 제공해야 한다”고 규정한 자동차관리법 제29조의3에 따라 사고 차량에 이미 EDR이 달려 있을 경우, 사고 기록을 투명하게 공개해야 한다.

그러나 EDR 기록 공개 의무화는 급발진을 규명하는데 별 효과가 없다는 지적이 잇따르고 있다. 오히려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측정 기록이 나와 원고 측에 불리하게 작용하는 경우마저 있다. 강릉 SUV 사고의 경우 EDR 기록상 가속페달 변위량(가속 정도를 퍼센트로 나타낸 것)이 100%, 제동페달 작동 여부는 ‘off’로 나타나(운전자가 브레이크 대신 액셀을 세게 밟았다는 뜻) 차량 제조사에 유리한 증거가 되고 있는데, 운전자 등 원고 측은 이를 데이터의 왜곡으로 보고 있다.

원고 측 변호인은 “자동차 전자제어장치(ECU) 소프트웨어 결함으로 급발진이 발생한 경우 ECU는 가속 명령을 내리게 되는데, 이때 스로틀(자동차 기화기 아랫부분에 설치하는 밸브)이 완전히 개방돼 가속페달 변위량을 100%로 인식하고 이 데이터를 EDR에 제공하게 된다”고 설명했다. ECU 소프트웨어 결함 때문에 사고가 발생했다면, EDR이 사고 원인을 운전자의 과실로 잘못 인식하는 오류를 범할 수도 있다는 얘기다.

EDR의 오류는 이뿐이 아니다. EDR엔 사고 발생 당시 운전자가 가속 페달을 4~5초간 밟았다고 기록돼있지만, 정작 차의 속력은 시속 110km에서 변하지 않은 것으로 드러났다.

작년 10월에도 EDR의 신뢰성을 의심할 만한 사고가 한 건 발생했다. 경기 의왕에서 한 50대 여성이 현대차의 고급 세단을 몰다 골목에 주차된 차량 여섯대를 연달아 들이받고 전복된 사건이다. 당시 차량은 출고한 지 한달 반 밖에 안 된 상태였으며, 브레이크가 전혀 작동하지 않았다는 게 운전자 측 주장이다. 차량이 큰 굉음을 내며 질주하는 동안 20대 딸은 아무 것도 하지 못한 채 공포에 떨고 있었다고 한다.

경찰 조사 결과, 이 차량 EDR에도 사고 당시 가속페달 변위량이 99%로 기록돼 있었다. 강릉 사고 때와 마찬가지로 제동페달 역시 작동하지 않았다고 기록됐다. 기록대로라면 차량이 붕 뜨면서 운전자의 몸도 함께 떴지만, 그 와중에도 일정한 강도로 가속페달을 밟고 있었다는 얘기다.

법조계 및 자동차 전문가들은 급발진 여부를 따지는 데 있어 EDR의 신뢰성이 상당히 낮다고 입을 모은다. 법무법인 나루의 하종선 변호사는 “차량이 급발진으로 벽을 뚫고 나가면서 운전자가 정신을 잃었음에도 EDR 기록에는 가속 페달을 밟았다고 나오는 경우가 실제로 많다”며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는 일”이라고 말했다.

김필수 대림대 자동차학과 교수는 “급발진 의심 사고가 발생할 때마다 약속이라도 한 듯 하나 같이 ‘100, 99, off’라는 결과가 나오는데, 공학적으로 절대 그럴 수가 없다”고 설명했다. 100이란 스로틀밸브가 100% 열렸다는 뜻이며, 99는 가속페달 변위량이 99%라는 것을 의미한다. 스로틀이 열리면 엔진 rpm이 올라가고 가속도가 붙는다. 스로틀은 운전자가 가속페달을 밟거나 ECU가 오작동할 때 열릴 수 있다. off는 브레이크를 밟지 않았다는 뜻이다.

김 교수는 “차량이 과속방지턱을 넘거나 공중에 뜰 때는 운전자의 몸이 뜨고 발이 페달에서 떨어지는 게 자연스런 물리적 현상”이라며 “20~30초 동안 가속페달을 밟는 건 불가능한 일”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국립과학수사연구원(국과수)은 EDR 기록을 볼 때 ‘장치의 이상 유무’만 판단할 뿐 그 원인은 검사하지 않는데, 이런 상황에서 EDR은 운전자를 위한 장치가 아닌 자동차 업체의 ‘면죄부’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실제로 EDR의 태생적 한계는 차량 제조사에 ‘빠져나갈 명분’을 만들어주는 경우가 많다. 일례로, 운전자가 브레이크를 세게 밟든 발만 살짝 올려놓든 EDR 기록상으로는 차이가 없다. ‘on’ 혹은 ‘off’로만 기록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브레이크 작동 여부가 ‘on’으로 기록됐다 하더라도, 차량 제조사 입장에선 “브레이크에 발만 살짝 올려놓은 것이다”, “가속페달과 브레이크를 동시에 밟아서 사고가 났을 것이다”라고 우기는 게 가능하다.

◇미국은 EDR 데이터 추출 장비 단일화…개방성·신뢰성 높여

그렇다면 우리나라보다 6년 앞서 EDR 관련 법안이 제정된 미국은 어떨까. 미국에서도 일찌감치 EDR의 신뢰성 문제가 도마에 오른 바 있다. 2006년 도로교통안전국(NHTSA)이 연방규정집 제49편 제563장(49 CFR Part 563)에 EDR에 관한 표준 규정을 정했지만, 불과 3년 뒤인 2009년 도요타 세단 ‘캠리’의 급발진 소송에서 EDR의 치명적 오류가 드러나며 논란이 일었다.

재판부의 명령으로 공개된 사고 차량의 ECU(전자제어장치) 소스코드에 따르면, 운전자가 브레이크 페달을 밟았음에도 EDR에는 밟지 않았다고 기록돼 있었다. 하지만 민간 소프트웨어 컨설팅업체 바(BARR) 그룹이 이 기록이 오류라는 사실을 입증했다. EDR 만으로는 급발진 여부를 알기 어렵다는 걸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EDR에 오류가 존재할 수 있음을 인정한 만큼 미국에선 EDR을 급발진 사고의 증거로 채택할 때 신중함을 기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선 차량 제조사가 일방적으로 공개하는 EDR 기록을 소비자가 받아볼 수밖에 없는 반면, 미국에서는 EDR 데이터의 신뢰성과 개방성을 보장하는 식이다.

김 교수는 “우리나라는 특정 브랜드 차량의 EDR 기록을 보려면 그 브랜드의 장비를 사용해 데이터를 추출해야 하지만, 미국에서는 단일 장비로 통일해 데이터를 뽑아내고 있어 신뢰성이 높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미국은 2014년 EDR 장착이 의무화된 이후 대부분의 차량 제조사들이 보쉬(Bosch)사의 데이터 추출 장비 CDR(Crash data retrieval)을 사용하는 반면, 국내 완성차 업체 현대차·기아는 VCI(Vehicle Communication Interface)라는 전용 장비를 쓴다.

EDR이 기록하는 사고 시간에도 차이가 있다. 미 포드사 등의 EDR에는 사고 기록이 최장 25초까지 저장되지만, 국내 차량은 그 5분의1인 5초 밖에 저장되지 않는다. 미국 도로교통안전국(NHTSA)은 아예 작년 6월 EDR의 사고 기록 시간을 기존의 ‘2헤르츠(Hz) 주파수에서 사고 발생 5초 전’ 에서 ‘10Hz 주파수에서 사고 발생 20초 전’까지 일괄적으로 늘리는 내용의 법 개정안을 입법 예고한 상태다.

또 미국교통연구회(TRB)와 자동차실험연구센터(VRTC) 등이 EDR의 신뢰성에 대한 실험과 연구를 지속적으로 수행하고 있다. 충돌 사고가 발생할 시 정확한 데이터를 얻기 위해 EDR을 어떻게 향상시켜야 할지 연구하고 개선 사항을 권고한다.

◇“페달 블랙박스가 대안…킬 프로그램으로 사고 방지도 중요”

EDR의 근본적인 한계를 보완하고 급발진 판단에 있어 우리 사법부의 보다 전향적 태도를 이끌어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지금처럼 블랙박스 영상을 분석하거나 급발진 상태와 가속페달을 밟았을 때 엔진 소리를 비교해보는 식으로 급발진을 입증해나가는 방법도 있지만, 이는 근본적인 대책이 되진 못한다.

EDR을 보완할 방법으로 많이 거론되는 게 바로 ‘페달 블랙박스’다. 차량 페달 주변에 카메라를 달아 운전자가 브레이크를 밟았는지 가속페달을 밟았는지, 또 페달을 얼마나 세게 밟았는지 녹화할 수 있다. 페달 블랙박스가 제대로 기능하기만 한다면 차량 제조사가 “브레이크에 발만 갖다댔는데 밟은 것으로 인식됐다”고 주장하긴 어려워질 것이라고 업계 전문가들은 말한다.

김 교수는 “다만 이 모든 것들은 사고 발생 이후에나 사용할 수 있고, 급발진 시 대형사고로 커지는 걸 방지하는 것도 매우 중요하다”며 “미국과 일본의 일부 차량 제조사들은 벌써 전자제어 엔진이 먹통이 됐을 경우 이를 인위적으로 중지할 수 있는 킬(kill) 프로그램을 설치해 급발진 사고를 미연에 막고 있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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