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토록 애틋한 생명, 힘없는 존재들에게 인간은 도대체 무슨 짓을 저지른 거야[김유진의 구체적인 어린이]

기자 2023. 6. 26. 2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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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동물권, 타자로의 확장
<달팽이도 달린다>에는 새끼 복어를 장난감처럼 다루는 어린이가 나온다. 이 책은 어린이도 비인간 존재를 존중하는 데 해야 할 몫이 있음을 알려준다. 사계절 제공
동물의 시선에서 나를 바라보는 이야기는 나에게서 벗어나 타자로 나아가는 일
인간 중심 질서를 반성하며 모든 비인간 존재를 존중하는 건 어른의 몫

아파트에 사는 여우들은
닭을 매우 사랑합니다.
닭 다리만 좋아하는 여우
닭 날개만 골라 먹는 여우
닭 한 마리 통째로 좋아하는 여우.
출출할 때마다
통닭집으로 전화를 겁니다.
207동 703호
날개만 튀겨 주세요.
504동 201호
다리만 양념으로 해 주세요.
아저씨, 통닭 한 마리
빨리 와 주세요.
통닭집 아저씨
날마다 여우 아파트로 배달을 갑니다.

- ‘여우 아파트’ 전문
<삐딱삐딱 5교시 삐뚤빼뚤 내 글씨>
(김은영, 문학동네, 2014)

동시를 재미있게 읽긴 했는데, 문득 부끄러워진다. 닭을 잡아먹는 저 여우가 진짜 여우가 아니라 바로 우리 인간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고기가 되기 위해 ‘공장’에서 길러지는 닭에게는 A4 종이 한 장 크기의 면적이 허용된다고 들었다. 인간은 그렇게 키운 닭을 또 입맛에 따라 부위별로 골라 먹기까지 한다. 간혹 나는 생닭 한 마리를 손질할 일이 있을 때 고기가 하나의 생명이라는 사실이 너무 생생히 느껴져 육식을 되돌아본다. 하지만 그때 잠시뿐 대개는 부위별로 분류되고 깔끔하게 가공된 채 비닐 팩에 담긴 식재료로 만나니 곧 잊어버리고 만다. 슈퍼마켓의 위생적인 매대 위에는 공장식 축산이나 도살의 장면이 들어설 자리가 없다.

요즘 동물권에 대한 논의와 실천이 활발하듯 많은 아동문학 작품 역시 동물권을 이야기하고 있다. 사실 아동문학은 여느 문학보다 예전부터 더 많이 동물권을 말했다. 동물은 아동문학에서 아주 중요한 존재인데 동물이 착취당하는 현실을 외면한 채 동물을 마냥 세상에서 유일한 친구로만 그릴 수 없는 것이다. 김미혜의 동시집 <아기 까치의 우산>(창비, 2005), <안 괜찮아, 야옹>(창비, 2015), <꼬리를 내게 줘>(창비, 2021)는 일찍이 어린이의 시선으로 어른의 육식 탐식을 비판하고, 가축과 반려동물의 권리를 살폈다. 김태호의 동화집 <네모 돼지>(창비, 2015) 역시 처참한 환경에서 사육당하는 동물과 갑자기 버림받는 반려동물의 현실을 주저없이 담아냈다. 여러 동시와 동화가 동물권에 대해 이야기하는 다양한 방식을 보면 아동문학이라 해서 이야기 못할 주제는 없고, 매우 분명한 주제의식을 드러내면서도 저마다의 문학성을 지닐 수 있다는 점 역시 알 수 있다.

길을 걸어가다
노란 털 여우 아줌마와 마주쳤다
입이 뾰족, 눈이 쪽 올라가 있었다
사냥꾼이 나타날까 걱정하는 것 같았다
신호등 앞에서
검은 물소 아저씨를 보았다
초록불이 켜지자
북북거리며 건너갔다
사냥꾼이 나타날까 걱정하는 것 같았다

- ‘털가죽 옷’ 부분
<예쁘다고 말해줘>
(이상교, 문학동네, 2014)

시의 제목인 ‘털가죽 옷’은 거리를 활보하는 ‘노란 털 여우 아줌마’와 ‘검은 물소 아저씨’가 동물 가죽으로 만든 옷을 입은 인간이라는 사실을 가리킨다. 선사시대도 아닌데 동물 가죽으로 피복을 만들어 입겠다고 동물을 착취하는 일을 비판한다. 최근 다양한 소재의 ‘비건 가죽’을 개발하고 이용하려는 의지와 연결된다. 이렇듯 명확한 주제의식을 지니는데 형식까지 딱딱하지는 않다. 여우 털을 입은 사람이 여우로, 물소 가죽을 입은 사람이 물소로 변해 사냥꾼이 나타날까 걱정하는 모습을 보고 나니 동물 가죽을 걸치는 행위가 마음이 오그라드는 일로 느껴진다. 동물에게 했던 일을 그대로 당할 위험에 처하는 인간을 보고서야 인간의 잘못이 선명하게 드러나 두려워진다.

머리로 알아듣기에 앞서 마음에 들어오고, 어딘가 나를 통째로 변화시키며 마음 깊이 자리 잡는 듯하다. 문학이 독자를 변화시킨다면 바로 이런 방식이지 않을까 싶다. 여기서 문학과 예술이 세계에 대한 감각을 바꾸게 한다는 의미를 발견한다. 가죽을 빼앗은 바로 그 동물로 내가 변한다는 상상력은 동물의 시선에서 나를 바라보게 만든다. 잠시나마 나에게서 벗어나 동물을 달리 느끼게 한다. 문학에는 동물뿐 아니라 세상 모든 타자에게로 열리는 공감의 가능성이 있다. 지식정보책이 많은 자료와 근거를 제시하며 동물권을 말하는 방식과는 다른 방식으로 독자의 세계를 확장한다. 짧은 동시나 동화 한 편이 그걸 해낸다.

누가 올까? 이반디 지음 | 김혜원 그림·만화 | 사계절 | 2021

동화집 <누가 올까?>(이반디, 사계절, 2021)에 실린 ‘여우 목도리’ 역시 귀엽고 사랑스러운 아기 여우를 등장시켜 마음을 움직이게 만든다. 의사 고야 씨는 아내의 생일선물로 점찍어둔 은빛 여우 목도리를 오늘 저녁에 사러 갈 계획이다. 근데 갑자기 전화가 울리며 한 어린아이가 동생이 아프니 어서 자기 집에 왕진을 와달라고 부탁한다. 어른은 아직 돌아오지 않았고, 동생이 일어나 병원에 가지는 못한다는 아이의 말에 고야 씨는 아이가 불러준 주소대로 산 중턱에 있는 집을 찾아간다. 그런데 작은 판잣집에서 문을 열고 나온 건 어린 여우. 고야 씨는 여우의 간청에 또 어쩔 수 없이 물약을 꺼내 동생 여우에게 먹인다. 동생이 낫자 몹시 기뻐한 어린 여우는 보답이라며 부드러운 갈색 털이 탐스러운 자신의 꼬리를 내민다.

백화점에서 여우 목도리를 사려고 했던 고야 씨는 어린 여우가 깊은 감사를 담아 바치는 선물에 잠시 할 말을 잃었다가 이내 사양한다. 고야 씨는 얼마나 당황스럽고 부끄러웠을까. 슈퍼마켓 육류 코너의 고기가 한때 누군가의 생명이었듯 백화점에 멋지게 진열된 목도리 역시 이처럼 애틋한 생명이었다니. 백화점 상품으로 전시됐던 여우 목도리와, 순수하고 고귀한 어린 여우가 보답하려 했던 꼬리털 사이의 거리가 하나로 겹치면서 눈앞이 아득해진다.

게다가 어린 여우의 엄마는 며칠 전 먹을 걸 구하러 가서 돌아오지 않고 있다니 고야 씨는 어린 여우들의 곤란을 해결해준 착한 의사가 아니라 곤란을 만들어낸 원인이 될 노릇이다. “참 이상해요. 이렇게 친절한데, 왜 인간은 무섭다고 했을까요? 엄마가 오면 물어볼래요”라고 말하는 어린 여우의 천진함과, ‘엄마 여우는 돌아올까? 과연 올까?’라고 자문하며 부끄러움을 느끼는 고야 씨의 대비는 이 힘없는 존재들에게 인간이 정말로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를 마음으로 알게 한다.

지금까지 살핀 동시 두 편과 동화 한 편은 모두 여우의 이야기고, 인간의 이야기다. 동시 ‘여우 아파트’는 닭을 잡아먹는 인간을 여우로 그렸다. 동시 ‘털가죽 옷’은 여우 털을 둘러쓴 인간을 여우로 만들었다. 동화 ‘여우 목도리’에서 여우 목도리를 사려던 고야 씨는 여우를 만난다. 여우가 되어보고, 여우를 만나면서 여우의 마음을 알게 된다. 나에게서 벗어나 타자에게로 나아간다. 여기서 타자는 어린이가 사랑해 마지않는 동물이다. 깜찍하고 발랄한 환상 속 동물 말고 인간에게 착취당하는 현실 속 동물. 동물 우화에 동물을 끌어다 놓지 않고 동물을 따라서 그들의 이야기를 받아 적는다.

그냥 씨의 동물 직업 상담소 안미란 지음 | 유시연 그림·만화 | 창비 | 2023

동화 <그냥 씨의 동물 직업 상담소>(안미란, 창비, 2022)는 좀 더 활기차고 촘촘한 동물 이야기다. 작가는 동화 <씨앗을 지키는 사람들>(창비, 2001)에서부터 종자 보존의 중요성과 유전자조작 식물의 위험성을 말하며 생태 감수성을 드러내보였다. 이어 동화집 <너만의 냄새>(창비, 2005)에 수록된 ‘사격장의 독구’에서는 인간에게 제대로 돌봄 받지 못해 죽은 개를, <두 발 세 발 네 발>(봄볕, 2021)에서는 인간과 반려동물이 서로 돌보는 장면을 그렸다.

고양이 그냥 씨는 카페의 영업 담당이자 동물 직업상담소 소장이다. 낮에는 햇볕 아래 매무새를 다듬다가 손님과 사진을 찍고, 저녁에는 동물들에게 일자리를 주선하는 그냥 씨의 투잡은 환상과 현실을 겹쳐 말하는 이 동화의 자리를 보여준다. 그냥 씨는 삼림 파괴로 일본에서 건너온 곰 쿠마짱과 지구온난화로 러시아에서 건너온 북극곰 폴라스키에게 알맞은 직업을 알선한다. 또 도시에서 알을 낳으려는 새에게 보금자리를 찾아주는 부동산 소개업자, 너구리에게 도시 공원에서 안전하게 살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는 도시생활 안내자, 아픈 동물을 병원에 데려다주는 의료 코디네이터 역할까지 한다. 그냥 씨가 동분서주하며 동물들을 돕는 걸 보고 있으면 현재 기후 문제로 야생동물이 처한 위기를 인간의 생존에 비춰 좀 더 절실하고 긴박하게 감각하게 된다. 한편 거주지를 잃고 새 정착지에서 애쓰는 동물들의 상황은 이주민의 현실과 겹친다. 타자에 대한 관심은 동물과 이주민에게로 동시에 확장된다.

달팽이도 달린다 황지영 지음 | 최민지 그림·만화 | 사계절 | 2023

인간 중심 질서를 근본적으로 반성하며 동물을 비롯한 모든 비인간 존재를 존중하고 기후위기를 해결하는 일은 사실 어른의 몫이다. 당장 거기에 집중해 노력할 일이지 별 잘못도 없는 어린이에게 자꾸 알리고 가르치려 드는 건 온당하지 못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동화집 <달팽이도 달린다>(황지영, 사계절, 2022)를 보면 어린이에게는 또 어린이의 일이 있다는 걸 알게 된다. 반려동물이나 반려식물을 사 달라고 한 후 거들떠보지 않거나(‘달팽이도 달린다’), 바닷가에서 새끼 복어를 잡아 살아있는 장난감처럼 갖고 놀다 내팽개치는(‘복어의 집’) 경험은 누구나 한번쯤 비슷하게 있을 거다. 나와 동생이 잡았다가 풀어준 새끼복어를 냉큼 다시 낚은 아이가 “새로 잡은 사람이 주인”이고 “왜 나한테만 그래? 너희도 실컷 갖고 놀았잖아!”라며 새끼복어를 풀어주지 않겠다고 버틸 때 사실 대꾸할 말이 없다. 그래, 나도 잘못했어. 하지만 우리, 더 이상 잘못은 말자, 다 함께 이야기하며 나아가는 수밖에는.

■김유진



아동문학평론가·동시인. 동시집 <나는 보라> <뽀뽀의 힘>, 청소년시집 <그때부터 사랑>, 아동문학평론집 <언젠가는 어린이가 되겠지>를 출간했고, ‘토닥토닥 잠자리 그림책’ 시리즈를 썼다.

아동문학 작품 속에서 어른과 어린이가 좀 더 자주 만나고, 좀 더 가깝게 이어지는 날이 올 수 있기를 바란다.

김유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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