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방소멸에 맞서다]⑦ 온 마을이 기르는 아이…남해 마을의 '따뜻한 실험'

박정헌 2023. 6. 26.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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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군 상주면 '동고동락' 협동조합, 공동보육 등 대안 공동체 모색
교육문제 해결하며 '귀촌 성지' 입소문…2015년 이후 200여명 전입
학생·학부모, 교육에 스스로 참여…활력 넘치는 '젊은 마을'로 변신 중

[편집자 주 = 2010년대 중반 지역소멸론이 제기된 당시 79개이던 '소멸 위험' 지역은 올해 118곳으로 늘었습니다. 우리나라 지방자치단체의 절반을 넘습니다. 이제 그 그림자는 대도시까지 드리우고 있습니다. 모두가 암울한 현실만을 얘기하는 이때 온 힘으로 저출산과 초고령화에 맞서는 지자체들이 있습니다. 지자체와 주민들이 힘을 모아 출산율을 끌어올리고 인구 유치에 발 벗고 나서는 그곳, '지방소멸에 맞서는' 그곳들이 있습니다. 연합뉴스는 그 현장을 생생하게 취재해 매주 1편씩 기획기사를 송고합니다.]

유리창에 그림 그리는 상상놀이터 아이들 [촬영 박정헌]

(남해=연합뉴스) 박정헌 기자 = "상상놀이터는 학부모들이 직접 아이들을 돌보는 공간이에요. 아이들의 90%가 외지 출신인데, 아이들 중심으로 학부모 교류가 잦아지면서 어른들도 엄청나게 친해졌죠. 남의 아이 일이라도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도와줘요."

지난 20일 경남 남해군 상주면 상상놀이터. 전담 교사로 근무 중인 조연(44) 씨는 학교를 마치고 몰려든 아이들을 돌보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이곳은 지역 협동조합인 '동고동락'이 만든 돌봄 공간이다. 전담 교사 1명과 함께 일일교사로 참여하는 학부모들이 운영한다.

학교 수업을 마친 아이들 10여명은 상상놀이터 문을 열고 들어오기 무섭게 가방을 여기저기 벗어 던졌다. 냉장고에서 아이스크림을 꺼내 먹고, 따로 마련된 간식을 오물거리며 수다를 떨었다.

아이들은 유리창에 우렁이, 고래, 친구 얼굴 등을 그리며 놀다가 선생님과 학부모 인솔로 해변 체험활동을 나갔다.

해변으로 나간 상상놀이터 아이들 [촬영 박정헌]

넘실대는 파도와 반짝이는 모래사장이 눈앞에 펼쳐지자 아이들은 신나게 뛰어다녔다. 고사리 같은 손으로 게를 잡아 구경하고, 막대기로 모래사장에 그림을 그렸다. 파도에 떠밀려온 죽은 물고기를 바다로 돌려보내는 아이도 있었다. 봉투를 챙겨와 해변 쓰레기를 줍기도 했다.

2019년 부모님과 함께 이 마을로 왔다는 전지원(13) 양은 "남해에 오기 전에는 이런 경험을 할 수 없었는데, 이곳에서는 하루하루가 새로워 즐겁다"며 "방과 후 친구들과 만나 떠들고 노는 순간이 너무 소중하다"고 활짝 웃었다.

일일교사를 맡은 학부모 서진미(41) 씨는 "처음 귀촌할 당시만 해도 기대가 없었지만, 학부모와 아이들이 함께 어울리는 돌봄 공간이 이젠 삶의 일부가 됐다"며 "낯선 사람이 내 아이에게 말을 걸기라도 하면 이를 목격한 주민이 바로 전화할 정도로 온 마을이 하나가 돼 아이들을 돌본다"고 했다.

상주면 아이들 [동고동락협동조합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건설회사 직원, 남해 마을에 협동조합을 만들다

발단이 된 것은 남해로의 여행이었다.

이종수(54) 씨는 경기도 용인에서 남부럽지 않은 삶을 살았다. 건설회사 자산관리자로 일하며 연봉도 괜찮게 받았고, 두 아이도 잘 크고 있었다.

하지만 다람쥐 쳇바퀴 도는 듯한 생활, 끊임없이 경쟁해야 하는 도시의 삶은 팍팍하기만 했다. 두 아이가 주변 또래들처럼 입시에 매몰된 유년을 보내는 것도 탐탁지 않았다.

그러다가 남해 상주면으로 여행을 왔다. 한눈에 반했다.

아름드리 곰솔이 가득하고 쪽빛 바다가 넘실대는 마을. 호수와 같은 바다를 산이 병풍처럼 둘러싼 마을. 하얀 백사장에 따스한 수온으로 유명한 은모래비치 바로 옆 인구 1천600여 명의 작은 마을에 그는 푹 빠졌다. 그리고 귀촌을 결심했다.

아침 명상을 하는 상주중학교 학생과 교직원들 [상주중학교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아내는 평소 가치관이 비슷해 흔쾌히 동의했죠. 아이들도 함께 전국 방방곡곡 여행을 많이 다닌 경험이 있어 잘 이해해줬습니다. 임대주택을 하나 마련했죠. 내려오기 1년 전부터 한 달에 한두 번 내려와 마을 주민들과 안면을 텄습니다."

귀촌 이듬해 큰아이가 다니던 상주중학교가 대안학교로 전환했다. 연수나 산행, 체육대회 등 학부모 참여 행사가 많아졌다. 자연스레 학부모들끼리 친해졌다.

1기 학부모 대표로 선출된 이종수 씨는 고민에 빠졌다. 단순한 친목 모임인 학부모 모임을 더 발전시킬 수 있지 않을까. 학교를 중심으로 한 지역 네트워크, 이를 바탕으로 한 경제적 활동도 가능할 듯싶었다. 고민 끝의 결론은 '협동조합'이었다.

그렇게 2017년 4월 상주중 교장·교사, 학부모, 주민 등 42명을 조합원으로 둔 '동고동락'이 첫 기지개를 켰다.

동고동락 조합원들 [촬영 박정헌]

아이들, 입시가 아닌 '동고동락'을 배우다

올해 2월 가족과 함께 상주면으로 온 초등학교 5학년생 이우(12) 군은 대도시인 대전에 있을 때와 비교해 180도 달라진 생활을 보낸다.

오후 2시 30분께 하교를 하면 배드민턴, 기타 배우기 등 방과 후 활동을 하거나, 상상놀이터에서 또래들과 어울린다. 마음이 맞는 친구들과 바다에 가서 물고기를 잡기도 한다. 인근 승마 학교에서 말타기 체험을 할 때도 있다.

승마 학교를 제외하면 따로 돈이 들어가는 활동은 없다. 모두 조합원들이 자발적으로 마을 아이 돌봄에 두 팔 걷고 나선 결과다.

"여기서는 공부 스트레스 없이 마음 편히 학교에 다닐 수 있어 너무 좋아요. 바다도 가깝고 친구들과 성적 경쟁 없이 어울리고 있어요. 하루하루가 여행하는 기분이죠."

해변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상주중학교 학생들 [상주중학교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동고동락 결성과 함께 이종수 이사장이 가장 먼저 발 벗고 나선 것은 돌봄 공간 마련이었다.

해안 근처 낡은 분수대에서 아이들이 가방을 아무렇게나 던져두고 노는 모습을 본 것이 계기였다. 방과 후 갈 곳이 마땅찮은 아이들이 편하게 머무르며 웃고 떠들 공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상주초등학교 앞 골목에 마련한 조합 사무실 한쪽을 비워 상상놀이터를 만들었다.

당시 조합 예산이 2천만원에 불과해 조합원들은 돌아가며 무료로 아이들을 돌봤다. 전통 놀이, 공예품 제작, 음악 수업 등의 프로그램을 직접 만들어 운영했다.

반응은 뜨거웠다. 상주초교 전교생이 30명 수준인데, 매일 같이 10여 명이 상상놀이터를 찾았다.

학생들은 학교 수업이 끝난 뒤 학원 대신 놀이공간에서 시간을 보낸다. 국영수 선행학습 대신 문화예술 체험을 한다. 친구들과 함께 고민도 나누고 즐거움도 나누는 말 그대로 '동고동락(同苦同樂)'을 배운다.

상상놀이터 아이들 [동고동락협동조합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상주면, '청년이 찾는 시골마을'로 변모하다

이우 군의 아버지인 이상호(48) 씨도 상주면 생활이 만족스럽기는 마찬가지다.

대전에서 마당극 전문 배우로 활동했던 그는 삭막한 도시 생활에 지쳐 귀촌을 꿈꾸던 중 남해로 캠핑을 왔다가 아예 이곳에 뿌리를 내렸다.

귀촌 뒤 그는 방과후 강사나 마을 농사일로 생계를 이어가며, 지신밟기 등 사라진 상주면 전통 놀이를 복원하는 데 힘을 쏟고 있다.

그는 "원주민 텃세도 거의 없고 이주민 비율도 높아 아이들이 다 자라 독립하더라도 여생을 이곳에서 보내고 싶다"며 "주민들이 다 우리 아이들 얼굴을 알고 식구처럼 대해줘 안전에 대한 걱정이 오히려 도시에 살 때보다 덜하다"고 했다.

상주면으로 귀촌한 이상호 씨 [촬영 박정헌]

상주면은 '놀기 좋은 관광지'가 아닌 '살기 좋은 거주지'로 점차 입소문을 타기 시작했다. 한번 입소문을 타자 남해군이나 조합, 학교 등에 귀촌 문의가 쏟아졌다.

많을 때는 한해 10가구 넘게 상주면으로 왔다. 2015년 이후 이곳으로 귀촌한 사람은 200여 명에 달한다.

서울에 사는 박지훈(38) 씨는 "번잡한 도시를 벗어나 귀촌하고 싶다는 생각이 있어 휴가를 맞아 아내와 함께 살 집을 알아보러 왔다"며 "도시와 다른 느낌이 나서 너무 좋고 여기서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데, 매물이 없어 집을 구하기 힘들다"고 했다.

이에 동고동락 협동조합은 귀촌하고 싶은 사람 대신 집을 알아봐 주기도 하고, 부동산 계약서 작성을 도와주기도 한다.

귀촌인의 면모도 조금씩 바뀌고 있다.

이전에는 대안 교육에 목마른 학부모와 자녀가 이사 오는 경우가 주를 이뤘다. 이제는 싱어송라이터, 디자이너 등 다양한 직업의 20∼30대가 귀촌하는 경우도 많다.

미혼인 30대 심주겸(35) 씨는 "편의점 등 시설이 미비해 조금 불편하지만, 바다도 깨끗하고 공기도 맑아 사는 게 좋아서 떠날 생각은 없다. 지금 상황에 만족한다"며 "결혼해서 아이를 낳아도 여기서 계속 키우고 싶다"고 했다.

사물놀이를 즐기는 상주면 주민들 [이상호 씨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아이와 학부모, 교육에 스스로 참여하다

"한 아이를 키우려면 온 마을이 필요하다"

잘 알려진 아프리카 속담이다. 그리고 이 속담이야말로 상주면으로 아이와 학부모들을 끌어들인 매력을 가장 잘 말해준다고 할 수 있다.

상주중학교의 많은 교육과정은 학생, 교사, 학부모, 주민이 함께 참여해 만들고 운영한다.

학생·학부모·교사가 함께 학교 발전 아이디어를 내놓는 '완두콩' 회의, 협동조합과 연계한 제빵·바리스타 체험, 학생들이 직접 운영하는 교내 매점, 밀·고구마 등 40∼50가지 농작물을 발아부터 수확까지 직접 길러보는 '다랑논 활성화 프로젝트' 등등.

다랑논에서 주민과 학생이 직접 기른 농작물은 조합이 운영하는 빵집의 재료로 쓰인다. 여기서 난 수익은 다시 조합 활동에 쓰인다. 일종의 자생적 경제 생태계다. 어른과 아이가 한데 어울리는 교류의 장이자, 식량과 자연의 소중함을 깨치는 생태 교육의 장이기도 하다.

상주중 2학년 이세영(15) 양은 "창원에 살다가 왔는데, 창원에서는 집-학교-학원을 오가는 생활을 반복했다"며 "여기 와서는 일반 학교에서 할 수 없는 다양한 활동을 하게 돼 즐겁고 나날이 한 뼘 더 성장하는 기분이 든다"고 했다.

다랑논 활성화 프로젝트 [동고동락협동조합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상주중학교 조용순(62) 교장은 마을 활성화에 교육이 큰 역할을 한다고 강조한다.

"상주면은 교육 때문에 마을이 살아났고, 또 그 마을 안에서 아이들이 잘 자라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지역이 살아나는 데에는 일자리도 중요합니다. 하지만 우선 교육을 바로 세워야 아이를 가진 젊은 인구가 유입돼 활력이 생깁니다. 지역소멸 극복의 기본 조건은 작은 학교를 살려서 지속 가능하게 만드는 거죠"

상주초등학교의 학생 수는 2015년 36명에서 올해 63명으로 늘었다. 상주중학교는 18명에서 90명으로 무려 5배로 늘었다.

상주중학교 전경 [촬영 박정헌]

이와 맞물려 동고동락의 조합원 수도 초창기 42명에서 지금은 220명으로 늘었다. 그리고 조합의 도전은 계속되고 있다.

2019년에는 지역 주민들을 위한 사랑방인 '동동회관'을 열었다.

2020년에는 예비사회적기업으로 지정돼 정부 예산으로 마을 목욕탕을 리모델링해 카페를 겸한 빵집을 만들었다.

지금은 남해의 풍부한 해풍과 태양열을 이용해 '에너지 자립마을'을 만들겠다는 야심 찬 계획을 실현하고 있다. 궁극적으로 무료 요양원 등 자체 사회안전망을 구축하겠다는 포부도 지니고 있다.

이종수 조합장은 "취약한 사회안전망 탓에 우리는 노후에 나를 책임져줄 사람이 없다는 불안에 끊임없이 시달리며 산다"며 "마을 단위에서 이 문제가 해결되면 이곳에 평생 정착하게 되고, 귀촌인도 많아질 것"이라고 기대했다.

동고동락이 운영하는 '마을빵집 동동' [촬영 정종호]

home1223@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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