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시간 자고 '투잡'했던 50대 아빠는 '킬러 문항' 어떻게 볼까[이승환의 노캡]

이승환 기자 2023. 6. 25. 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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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신조어 No cap(노캡)은 '진심이야'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캡은 '거짓말'을 뜻하는 은어여서 노캡은 '거짓말이 아니다'로도 해석될 수 있겠지요. 칼럼 이름에 걸맞게 진심을 다해 쓰겠습니다.

서울 양천구 목동 학원가에 킬러문제 전문 학원 간판이 붙어 있다. 2023.6.20/뉴스1 ⓒ News1 박지혜 기자

(서울=뉴스1) 이승환 기자 = 자정을 넘긴 귀갓길 출출할 때면 집 근처 편의점에 들렀다. 아르바이트생인 50대 남성 A씨는 꾸벅꾸벅 졸다가 인기척에 화들짝 깨곤 했다. 그는 피곤한 기색을 모두 숨기지 못했지만 늘 미소 짓고 친절하게 응대했다.

지난 2019년 5월 편의점 아르바이트생의 애환을 취재하면서 A씨를 인터뷰했다. "자식 사교육비 등을 벌기 위해 하루 2시간 자고 '투잡'(두 가지 일)을 뛴다"는 대답을 듣고서야 그가 꾸벅꾸벅 졸았던 이유를 알게 됐다.

A씨는 오전에 강남의 한 음식점으로 출근해 주방 일을 한 후 오후 10시까지 편의점으로 이동해 다음날 아침 7시까지 근무했다. 하루 2시간 쪽잠은 틈날 때 자는 것이었다. 그는 이처럼 살인적인 일정을 소화해 매달 400만~500만원을 벌었다고 했다.

A씨가 쏟아지는 잠과 싸우며 '투잡'하는 동안 그의 고3 아들은 대치동 학원가를 오가며 수능을 준비했다. "한 달 사교육비가 100만원 안팎이냐"고 묻자 A씨는 "그 정도로는 어림도 없다"며 손사래를 쳤다.

모든 학부모가 사교육비를 벌기 위해 A씨처럼 일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한국 사회의 뿌리 깊은 학력주의를 경험했다면 중년의 그를 '투잡'으로 내몬 현실을 실감할 수밖에 없다.

필자도 경찰과 정부 부처, 대기업, 중소기업을 출입하면서 취재원들이 털어놓는 출신 대학의 존재감을 느낄 수 있었다. 심지어 '스카이'(SKY) 출신 취재원들 가운데 'KY'(고려대·연세대)은 'S'(서울대)에 밀릴 수밖에 없다고 하소연하는 사례도 있었다. 검찰 등 엘리트 조직 소속 일부는 출입 기자에게 "어느 대학 나왔느냐"고 여전히 묻는다고 한다.

'독재자도 한국 사교육 열풍을 못 막는다'는 말은 이런 배경에서 나온다. 학력 사회가 사교육을 부추기고, 사교육이 학력 사회를 공고히 하는 악순환을 끊기가 그만큼 힘들다는 의미다.

최근 논란이 되는 '킬러 문항'(수능 초고난도 문제)은 사교육 수요자 중에서도 '상위 10개 대학'에 진학하려는 학생들을 선별하려는 문제로 평가됐다. 킬러 문항을 공략하려면 공교육만으로 안 되고 사교육 일타강사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고 믿는 학부모와 학생이 다수를 차지한다. A씨도 그렇게 믿는 부모 중 1명이었다.

정부가 교육개혁의 하나로 공교육 바깥 범위인 킬러 문항을 수능에서 배제하기로 하자 사교육 시장 일타 강사들이 "혼란을 초래할 것"이라고 반발해 논란이 확산했다.

실제로 수능을 5개월가량 앞두고 교육 개혁을 추진하는 정부의 방침에 우려스러운 점은 분명히 존재한다. '소득세 130억'을 인증하는 등 요즘 말로 '플렉스'(재력)를 과시한 일타강사들에게 향하는 비판의 목소리도 커지지만 무엇보다 주목해야 할 것은 킬러 문항이 교육의 본령과 취지에 맞는지다.

"농게의 수컷은 집게발 하나가 매우 큰데, 큰 집게발의 길이는 게딱지의 폭에 '상대 성장'을 한다. 농게의 ⓐ게딱지 폭을 이용해 ⓑ큰 집게발의 길이를 추정하기 위해, 다양한 크기의 농게의 게딱지 폭과 큰 집게발의 길이를 측정하여 다수의 순서쌍을 확보했다. 그리고 'L-그래프‘와 같은 방식으로 그래프의 가로축과 세로축에 각각 게딱지 폭과 큰 집게발의 길이에 해당하는 값을 놓고 분석을 실시했다"

'킬러 문항'으로 꼽히는 2023학년도 수능 국어 17번 문제의 지문인데 난해한 것으로 유명한 이상(李箱)의 시보다도 어렵게 느껴진다. 지난해 수능 직후 '국어 영역에 왜 이런 문제가 나오냐'는 비판론이 거셌다. 의미를 알고나면 문학성에 탄복하는 이상의 작품과 달리 지문의 내용은 심오한 것 같지는 않다.

다소 다른 맥락의 얘기지만 매일 읽고 쓰는 사람으로서 출제자에게 묻고 싶은 것도 있다. 자국어에 능통한 국내외 주요 작가들은 한결같이 '글은 쉬워야 한다'고 설파하는데 국어 영역에 나온 '농게' 지문은 왜 이리 당혹스러울 정도로 어려워야 하는지다.

교육을 뜻하는 영문자 'education'의 어원은 라틴어 'educare'다. 'educare'는 '밖'을 의미하는 'e'와 '끄집어내다'를 뜻하는 'ducare'가 합쳐진 단어이다.

밖으로 끄집어내야 하는 것은 학생들의 재능이란 점을 누구나 알고 있다. 킬러 문항은 그러나 한창 창의력을 발휘해야 하는 학생들의 재능까지 죽이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이는 난도 높은 질문이 아니라서 수능을 쳐본 사람이라면 충분히 답할 수 있을 것이다.

이승환 사회부 사건팀장

mrlee@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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