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나라 성터에 프랑스식 건물…압제 이겨낸 이 도시 [ESC]

한겨레 2023. 6. 24. 0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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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C : 노동효의 지구 둘레길]노동효의 지구둘레길 베트남 여행③
베트남 북부, 하노이 ‘탕롱 황성’
반경 500m 레닌공원·역사박물관
독립 투쟁한 참전군인 존경받아
봄철 날씨 쾌적…에그커피 별미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하노이의 탕롱 황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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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무새 죽이기>에 ‘진짜 앵무새’는 등장하지 않는다. ‘흉내지빠귀’(mockingbird)를 앵무새로 번역했기 때문이다. ‘모킹버드’는 북미에서 흔한 새 중 하나다. 산, 들판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새, 한국이라면 종달새 정도일까? 1930년대 미국을 배경으로 한 소설에서 아버지는 아이들에게 공기총을 사주며 말한다.

“네가 뒤뜰에 나가 깡통이나 쏘았으면 좋겠구나. 하지만 새들도 쏘게 될 거야. 맞힐 수만 있다면 (농작물에 해를 끼치는) 어치새를 쏘아도 돼. 하지만 (노래만 부를 뿐인) 흉내지빠귀를 죽이는 건, 죄가 된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소설 속엔 흉내지빠귀에 비유되는 다양한 군상이 등장한다. 마을 사람과 행동양식이 다르다는 이유로 악당 취급받는 청년, 피부색이 다르다는 이유로 유죄를 받는 무고한 흑인, 민족이 다르다는 이유로 히틀러에게 박해받은 유대인 등. 모킹버드는 행동양식, 피부색, 민족 뿐 아니라 성별, 신체조건, 사상이 다르다는 이유로 박해받는 이들로 확장된다. 작가 하퍼 리는 주인공의 입을 통해 말했다. “상대방의 입장이 되지 않고선 그 사람을 정확하게 이해할 수 없다”고.

‘앵무새 죽이기’와 미국의 베트남 침공

1960년 <앵무새 죽이기>는 출간되자마자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이듬해 퓰리처상을 받았으며 1962년 영화로도 제작됐다. 그리고 <앵무새 죽이기>가 미국에서 널리 읽히던 1964년, 미국은 베트남을 침공했다. 미국은 영국 식민지로부터 독립한 과거가 있었음에도 ‘역지사지’하지 않았고, ‘사상과 체제가 다르다’는 이유로 상대를 악당으로 여겼다. 그리고 10년에 걸쳐 ‘앵무새 죽이기’에 몰두했다. 베트남인은 미국이 그랬고, 한국이 그랬듯 자신만의 목소리로 노래하고 싶었을 뿐이었다.

베트남 전쟁 때의 비행기 잔해물 등 ‘베트남군 역사박물관’에 있는 전시물.

지난 4월 베트남 기차여행을 시작한 지 열흘째, 동행한 가수 손병휘와 하노이에 닿았다. 하노이는 신라의 서라벌과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로 유서가 깊은 도시다. 하노이가 베트남 지역의 중심이 된 건 기원전 257년 어울락의 수도였을 때다. 당시 지명은 ‘꼬로아’(옛 소라)로, 하천이 성채를 나선형으로 감싸고 있던 데서 붙은 이름이었다. 황금 거북이가 왕국을 보호하며 발톱으로 ‘마법 석궁’을 만들게 해줬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그 뒤 천년 넘게 중국의 지배를 받다가 국가를 창건한 ‘리 왕조’가 1010년 하노이 지역을 ‘날아오르는 용’, 탕롱이라 짓고 수도로 삼았다. ‘레 왕조’ 때에도 황금 거북이가 등장한다. 거북이로부터 ‘마법 검’을 빌려 명나라를 물리치고 ‘검을 돌려 주었다’는 이야기. 한자어로 하내(河內), 즉 ‘물 안’이란 뜻의 ‘하노이’가 된 건 19세기 베트남을 통일한 응우옌 왕조가 후에를 수도로 삼으면서 정적이 다스렸던 탕롱의 거창한 이름이 거슬렸기 때문이다.

하노이에서의 첫날. 체크인하기엔 이른 시각이라 호텔 리셉션에 배낭을 맡기고 나왔다. 아침부터 식당 앞엔 손님들로 가득했다. 쌀국수 한 그릇 먹고 ‘환검’ 전설의 배경이 된 호수로 향했다. 항박, 항가이 등 첫 글자가 같은 도로명이 이어졌다. 점포를 뜻하는 ‘항’에 물건 이름을 붙인 것으로 항박은 귀금속, 항가이는 비단을 파는 거리다. 이렇게 종류별로 상점이 늘어선 거리가 모두 36개라서 ‘삼육거리’라고도 했다. 조선의 육의전처럼 조정에 바칠 공물을 제작하고 판매하기 위해 조성됐던 곳이다.

하노이 명물이 된 베트남식 카푸치노, 에그커피.

호안끼엠 호수를 따라 늘어선 가게 중 전망 좋은 3층 카페로 올라갔다. ‘에그커피’를 주문했다. 커피에 넣을 우유가 떨어지자 이를 대신해 달걀노른자와 연유를 섞은 커피 음료가 기원이다. 재료 조합만 떠올리면 비릴 것 같은데, 전혀! 커피를 홀짝이며 창밖을 내려보다가 남부에선 결코 보지 못했던 장면을 목격했다. 조깅하는 사람들이라니! 덥고 습한 지역 사람들은 운동하지 않는다. 무더위 때문에 저절로 칼로리가 소모되는데 운동이라니! 호찌민에서 후에까지 지나온 어떤 도시보다 상쾌한 아침이었다.

하노이의 호찌민 박물관

인구 770만명에 달하는 대도시를 단기간에 둘러보는 건 불가능하다. 서울로 치면 경복궁, 종로, 인사동 등 명소 밀집 지역부터 둘러볼 수밖에! ‘레닌 공원’과 ‘국회의사당’과 ‘베트남군 역사박물관’과 ‘탕롱 황성’이 반경 500m 안에 밀집해 있었다. 레닌 공원에선 어린이용 자동차를 타는 아이들과 나들이객이 한가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군사박물관에선 강렬하고 세련된 감각의 포스터가 눈길을 끌었다. 1960~70년대의 프로파간다로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복원 중인 탕롱 황성은 ‘광화문만 남고 정작 경복궁이 없는’ 형세였다. ‘7세기 당나라 지배 시절의 성터’ 위에 ‘11세기 베트남 왕조의 궁’을 짓고 ‘19세기 프랑스식 건물’이 들어선 유적이었다. 그럼에도 유네스코는 1300년간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며 이곳을 세계문화유산으로 선정했다.

베트남 참전 퇴역 군인들과 기념사진을 찍는 청년들.

황성에서 나오는데 초록색 군복을 입은 노인들이 기념사진을 찍고 있었다. 베트남전 참전 군인들을 위한 재향군인회 지원 단체관광이었다. 노인들이 발길을 돌리려는데 청년들이 다가가 말을 건넸다. 군복 차림의 할머니가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함께 사진을 찍고 싶다고 부탁한 모양이었다. 학생들이 다정스레 할머니 팔짱을 꼈다. 찰칵. 그 모습을 지켜본 병휘 형이 잠시 후 말했다. “나 좀 전에 울컥했어.” “실은 나도….” 나는 말을 이으려다가 입을 다문 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다시 그 장면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할롱베이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돌아와 호찌민 박물관을 찾았다. 난 호찌민을 ‘역사상 위대한 여행자’ 중 한 사람으로 꼽는다. 그는 1911년 고국을 떠나 30년간을 떠돌았다. 21살의 그가 조국을 식민지배하던 프랑스로 건너간 이유에 대해선 훗날 이렇게 말했다. “열세 살쯤 되었을 때 자유, 평등, 박애라는 프랑스 말을 처음 들었습니다. 난 그 말이 내포하는 의미가 무엇인지 알기 위해 프랑스 문명을 직접 보고 싶었어요.” 아프리카 대륙을 돌아 프랑스로 가는 뱃길에서 그는 흑인의 생명을 소중히 여기지 않는 프랑스인들을 목격했다. 마르세유 항구에 도착한 날, 그는 생각했다. “왜 프랑스인은 우리를 문명화한다고 하면서 그 전에 자기 동포들부터 문명화하진 않는 걸까?”

호찌민은 프랑스를 비롯해 유럽, 미국, 아시아에서 요리사, 청소부, 보일러공, 정원사, 웨이터, 화부로 일하며 다양한 문화를 접했고, 머물던 나라의 언어를 습득했다. 폭넓은 시각과 국제적 감각을 길러 준 건 방랑이었고 ‘변하지 않는 한 가지로 만 가지 변화에 대처한다’는 자세로 삶을 살았던 그에게서 변하지 않는 한 가지의 가치, 그것은 ‘독립’이었다.

‘베트남군 역사 박물관’에 전시된, 세계인의 반전 시위에 감사를 표하며 베트남전 당시 제작된 포스터.

닉네임이 ‘하퍼’인 베트남 청년

베트남을 떠나던 날, 병휘 형과 나는 각자 시간을 보내고 저녁에 만나기로 했다. 형은 여성박물관을 방문할 거라고 했다. 사진과 유물은 충분히 관람한 터라 나는 베트남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고 싶었다. 기념품을 살 겸 가게에 들렀다. 아르바이트하는 청년 여성이 앉아 있었다. 가방 몇 개를 고르고 사진을 찍어 아내에게 보냈다. “어느 게 마음에 드니?” 값을 치르려는데 그가 말했다. “나도 이 가방 점찍었는데!” “나, 아내, 너 모두 같은 걸 골랐네!” “흐몽족이 만든 수공예품인데 가방 문양들은 모두 의미가 있어.” “몰랐는걸!” 그러다 나는 알게 되었다, 그의 조부모도 참전 군인이었다는 걸.

베트남 흐몽족이 만든 수공예품 가방.

“우리 할머니·할아버지는 용감한 군인이었어. 할아버지 등엔 총알 자국이 많아. 어릴 때 처음 보곤 흉터들이 글씨처럼 보여서 조막손으로 답장을 쓰곤 했어. 할아버지는 오른손 약지도 반이 없어. 총에 맞아서 사라졌대. 그땐 힘드셨겠지만, 나는 반쯤 남은 할아버지 약지가 귀여워. 할아버지는 속눈썹도 없어. 곧게만 자라서 눈을 찌르거든. 폭탄 때문이래. 고향에 있을 땐 속눈썹을 잘라드리곤 했어. 요즘 할아버진 할머니께 이런 농담을 해. 부대장이던 내가 지금은 당신 위해 요리하고 돌보느라 온종일을 보내는구나! 요즘 할머닌 건강이 안 좋으셔. 전쟁 중 홀로 아이들을 낳고 기르고 일해야 했거든. 할머닌 다섯 명의 아이를 낳았어. 이름이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번영이야. 내 아버지 이름은 여름!”

대화는 귀국 뒤에도 이어졌다. 가방을 포장하다가, 잔돈을 계산하다가 “하나만 더 물어볼게!”라며 질문했던 청년은 에스엔에스(SNS)를 통해 “삼촌, 처음 기차 탄 게 언제야?” 등의 갖은 질문을 던져댄다. 한번은 내가 물었다. “왜 네 닉네임이 하퍼니?” “법학 전공인데, 처음 읽은 영문소설이 <앵무새 죽이기>였어. 멋진 문장들로 가득해. 작가 이름을 따서 하퍼로 했지.” 나는 가장 좋아하는 부분을 얘기해 달라고 부탁했다. “오빠 젬이 동생 스카우트에게 ‘이 세상에는 네 부류의 사람이 있어. 우리랑 이웃 사람 같은 평범한 사람들, 숲속에 사는 커닝엄 집안사람 같은 사람들, 쓰레기장에 사는 유얼 같은 사람들, 그리고 흑인들’이라고 말했을 때 스카우트의 대답이었어.” “뭐라고 대답했더라?” “세상에는 오직 한 종류의 사람이 있을 뿐이야, 그냥 사람!”

글·사진 노동효 여행작가

화성으로 떠나기 전 인류 삶과 지구 풍경을 톺아보기 위해 여행하는 ‘길 위의 노동자'. ‘지구둘레길’은 작가의 과거 여행을 회고하며 현재적 의미를 톺아보는 여행기다. <남미 히피 로드>, <세계배낭여행자들의 안식처, 빠이>, <푸른 영혼일 때 떠나라>, <로드 페로몬에 홀리다> 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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