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째 어려운 전우 반찬 챙긴 ‘90대 배달의 용사’

신지인 기자 2023. 6. 24. 0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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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전용사 230여명 돌본 김봉환씨
/신지인 기자

23일 오후 서울 서초구 보훈회관, 6·25 참전 용사인 김봉환(94)씨는 흰 제복을 갖춰 입고 직원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김씨가 입은 제복은 지난 14일 청와대 영빈관에서 열린 오찬 행사 전, 국가보훈부가 참전 용사들에게 나눠 준 ‘영웅의 제복’이었다.

충북 괴산이 고향인 김씨는 22세가 되던 해인 1951년 입대했다. 제주도 훈련소로 가기 전 배를 타기 위해 고향 친구 23명과 함께 군산으로 향했는데, 화물칸 기차 안에서 꼬박 이틀을 주먹밥 세 덩이로 버텼던 게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훈련이 끝나고는 신병 교육을 맡았는데, 교육 중 한라산 중턱에서 빨치산의 습격을 받기도 했다고 한다. 휴전이 된 뒤에도 군 복무를 계속하다 1955년 중사로 전역했다.

김씨는 경제적 형편이 어려운 참전 용사들을 위해 한 달에 3번씩 10년째 반찬 배달을 해오고 있다. 서초구에서 제공하는 반찬 배달 서비스인데, 김씨는 담당 공무원에게 “반찬만 준다고 되겠나, 직접 먹는지 봐야 안심이 되겠다”며 챙기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산전수전 겪은 참전 용사들이라도, 나이가 드니 삶이 전쟁터”라며 “가난과 나이 든 육신이 적(敵)인데, M1 소총으로도 못 이긴다”고 했다.

이렇게 김씨가 챙겨오고 있는 전우는 230여 명. 김씨는 잡채나 불고기 비빔밥처럼 전우들이 좋아하는 반찬이 나올 때면 덩달아 신이 난다고도 했다. 그는 “어느 참전 유공자가 돈이 없어 반찬을 훔쳤다는 뉴스를 봤는데, 마음이 아프다”며 “힘이 없어 일을 할 수도 없을 텐데, 전우가 주저앉지 않게 돕고 싶다”고 했다.

또 김씨는 봄과 가을이 되면 매일 낮 내방역 사거리로 출근한다. 걷기가 불편해 횡단보도를 보행 신호가 바뀔 때까지 건너지 못하는 노인들을 부축하는 봉사 활동을 하기 위해서다.

지난 22일 오후, 김씨에게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다. 80대 여성이 “남편이 죽었는데,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다”며 “남편은 참전 유공자”라고 했다. 김씨는 119와 서초구 복지 담당자에게 연락해 장례를 치를 수 있도록 했다. 그는 “올해로 정전 협정 70년째인데, 내가 돕지 못한 유공자가 아직 너무나 많다”며 “전우들이 하나둘씩 사라져 가도 우리를 기억해주는 사람만 있으면 고마울 것 같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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