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잡이 왜 두 번 할까 “100세 시대라 직업 하나론 안 돼”

배준용 기자 2023. 6. 24.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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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주말]
금수저·순금 판사봉도 등장
또 달라진 돌잡이 풍경들
지난 4월 돌을 맞은 아기가 돌잡이를 하는 모습. 100세 시대에 맞춰 요즘은 돌잡이도 두 번 하는 게 대세다. /독자 제공

누구도 뽑지 못한 명검 엑스칼리버를 뽑아 드는 아서 왕처럼,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일생에 단 한 번 이런 신화적 순간을 맞이한다. 바로 ‘돌잡이’. 돌잡이 용품이 가득한 쟁반 앞에서 아기가 데구루루 고민의 눈동자를 굴리는 그 순간, 참석자 전원은 각자 종교와 과학을 초월한 긴장감에 휩싸인다. 왠지 아이의 미래가 그 순간만큼은 오롯이 진실로 드러날 것만 같은 그때, 아이가 물건을 집어 올리면 “와!” 하는 탄성과 박수, 웃음이 터져나온다.

육아 휴직 중인 직장인 신모(34)씨는 지난달 열린 딸의 돌잔치에서 돌잡이 도중 ‘조금’ 당황했다. “아이가 장난감 칼을 집었는데, 조부모님들이 웃으시면서도 실망한 듯 보였어요. 그런데 사회자분이 갑자기 ‘자, 한 번 더 가겠습니다’라고 하시는 거예요. 다들 놀라서 사회자를 바라보니 ‘요즘은 100세 시대라, 직업을 2개 이상은 가지니까요’라고 하시더라고요.” 신씨의 딸은 두 번째 돌잡이에서 돈을 집었고, 어르신들은 더 큰 기쁨의 박수를 치셨단다.

돌잔치 관련 업계에 따르면, 최근 신씨의 딸처럼 돌잡이를 두 번 하는 아기들이 부쩍 느는 추세다. 서울 북촌 한 돌잔치 스튜디오 종사자 A씨는 “과거에는 한 번 잡고 끝내는 경우가 많았는데 요즘은 직업도 워낙 자주 바뀌고 수명도 더 늘어난 경향을 반영해 돌잡이를 두 번 하고 있다”며 “돌잔치에 참석하는 가족들도 한 번보다 두 번 하는 것에 더 재미를 느끼고 만족해서, 다른 업체에서도 두 번씩 하는 경우가 늘었다고 들었다”고 했다.

돌잡이를 두 번 하다 보니 돌잡이를 풀이하는 재미도 생겼단다. 가령 아기가 청진기와 마이크를 잡으면 ‘의사가 되어서 방송에 출연하게 될 것’ ‘의사 유튜버로 대성하겠다’ 같은 ‘꿈보다 해몽’으로 좌중을 웃겨버리는 식. 네티즌 사이에선 “아기가 돈과 판사봉을 잡길래 나도 모르게 ‘어, 비리판사?’라고 했다가 아내한테 세게 한 대 맞았다”는 전설적인 경험담이 퍼져 있다.

돌잔치도 ‘인스타 인증’이 대세가 되면서, 부모들이 인증샷을 얻기 위해 진땀을 흘리는 경우도 적지 않단다. 아무리 기다려도 아기가 돌잡이 용품을 잡으려 하지 않거나, 용품을 집는 족족 던져버리는 아기들 때문. 돌찬지 업계 종사자 B씨는 “이런 경우엔 결국 부모가 원하는 물건을 아기에게 억지로 쥐여주고 기념 촬영을 한다”고 말했다.

일부 부모의 과한 욕심에 웃음이 터져야 할 돌잡이에 냉랭함이 흐를 때도 있다. B씨는 “간혹 아기 부모님이나 조부모님들이 돌잡이 때 아기가 특정한 물건을 잡게 해달라고 요청한다”며 “아기가 유도한 대로 금방 잡으면 괜찮은데, 그렇지 않으면 시간이 오래 걸려 다른 참석자나 친척분들이 민망해하는 분위기가 느껴질 때도 있다”고 했다. 주로 요구하는 돌잡이 물건은 돈이나 청진기가 많단다.

부모나 친척이 아예 맘에 드는 돌잡이용품을 직접 구입해 오거나 선물받아 챙겨오는 경우도 적지 않다. 전통적으로 강세를 보인 종목이 청진기, 돈, 판사봉이라면 최근에는 축구공(축구선수)이나 마이크(가수, 연예인), 오방색지(다재다능한 연예인)를 선호하는 부모도 크게 늘었다고. 2010년대 이후로는 마우스가 돌잡이 쟁반에 올라오기도 한다. A씨는 “손흥민 같은 세계적인 축구 선수가 계속 늘고 있고, 연예인들도 워낙 고소득을 올리다 보니 예전처럼 학업이나 전문직만 바라지 않고 연예인, 축구선수 등을 선호하는 분들도 는 듯하다”고 말했다. 옛날에는 먹을 복을 상징하는 쌀, 장수를 뜻하는 실이 돌잡이에 항상 올랐지만, 최근에는 기아가 줄고 기대수명이 늘면서 돌잡이에서 자연스레 사라졌다. 자식을 많이 낳는다는 뜻을 지닌 대추도 ‘자식 많은 게 복이 아니다’는 정서가 퍼지면서 자연스레 사라졌다.

요즘은 많이 줄어든 다둥이 가정에서 돌잔치가 열리면 ‘꿈잡이’라는 특별 이벤트가 열리기도 한다. 공무원 우모(36)씨는 “얼마 전 둘째 아이 돌 잔치에서 사회자가 첫째 아이도 무대에 불러서 재차 돌잡이를 시키는 ‘꿈잡이’라는 걸 시키더라”며 “명분은 ‘첫째가 자기 돌잡이 때 잡은 걸 지금도 그대로 유지하는지 확인한다’는 건데, 실질적으론 첫째가 동생 돌잔치에서 소외감이나 질투심을 느끼지 않게 배려하는 것 같아 좋았다”고 말했다.

돌잡이는 언제, 어떻게 시작된 걸까. 국립민속박물관 등에 따르면 돌잡이는 3~6세기 중국 육조시대부터 1500년이 넘게 이어진 풍습이다. 조선시대 들어 왕실부터 사대부, 이후에는 서민층으로까지 돌잡이가 확대된 것으로 보인다. 조선 역대 왕의 업적 중 선정을 모아 기록한 서적 국조보감(國朝寶鑑)에는 정조(正祖) 15년에 원자(훗날 순조)의 돌잔치에 온갖 장난감을 담은 소반을 놓고 신하들이 보는 앞에서 돌잡이를 했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중국, 일본 등 한자문화권에서는 한국처럼 여전히 돌잡이 풍습이 이어지고 있다. 일본은 ‘에라비토리’라 부르는데, 한국처럼 연필, 돈, 주판 외에 지갑, 악기(음악가), 풍선(글로벌 인재), 핸드폰 등을 돌잡이 용품으로 쓴다. 실제 물건 대신 에라비토리 카드라고 불리는 그림 카드로 돌잡이 용품을 대체하기도 한다. 베트남에서도 쟁반에 계산기, 가위, 공책 등을 놓고 바닥에 둔 뒤, 아기가 기어와서 물건을 잡게 하는 돌잡이 풍습이 여전하다. 중국에선 돌잡이 용품 중 장난감 칼은 법조인이나 군인, 도장은 공무원, 줄자는 건축가나 디자이너를 상징한다고 알려져 있다.

업계 관계자들은 “예전처럼 돌반지 대신 순금으로 된 돌잡이 용품을 선물하는 경우도 늘었다”고 말했다. ‘금수저가 돼라’는 뜻으로 순금 수저를 선물하거나 순금 연필, 심지어 순금 판사봉도 팔린단다. 여기서 깨알지식. 돌잡이 인기용품 판사봉은 실제로 한국 법원 그 어디에서도, 어떤 판사도 전혀 쓰지 않는단다. 익명을 요구한 한 판사는 “드라마에서도 법정에서 판사봉이 곧잘 등장하는데, 실제로 한국 법정과 판사들은 판사봉을 전혀 쓰지 않는다. 일부 드라마에서 판사봉을 등장시키다 보니 실제로도 그렇다고 오해가 퍼진 거 같다”며 “1960년대 전에는 썼다는 얘기도 있지만, 워낙 오래전이라 명확하지는 않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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