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군 왜 서울에서 3일 허송했나[정전 70년, 끝나지 않은 6·25]

구자룡 기자 2023. 6. 23.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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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회] 북한군 ‘서울 3일’ 미스터리
동아일보 산하 화정평화재단은 정전(停戰) 70주년을 맞아 6·25 전쟁 3년을 재조명하는 기획 ‘정전 70년, 끝나지 않은 6·25’를 연재합니다. 아픈 과거를 되풀이하지 말자는 취지로 회고록과 연구자료를 바탕으로 전쟁을 통해 각국이 추구했던 목표의 허실을 조망하고 아울러 전국에 산재한 6·25 격전 현장을 찾아 당시 격전 상황도 재구성합니다.
“북괴군의 ‘서울 3일’은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남한 각지에서 공산당 지하조직이 일제히 폭동을 일으키는 ‘붉은 반란’이 일어나기를 기다렸다는 주장이 있다. 북괴군이 서울을 점령한 여세로 밀어붙였다면 미 지상군 참전도, 인천상륙작전도 없었을 것이다.” (정일권, 29쪽)

북한군은 1950년 6월 25일 38선을 넘어 남침을 개시한 뒤 3일 만인 28일 서울 한강 이북을 점령했다. 그런데 북한군은 7월 1일 한강을 넘을 때까지 3일간 서울에서 더 이상 진격을 하지 않고 머물렀다. ‘북한군 서울 3일’ 체류가 왜 발생했는지 다양한 해석이 나오고 있다. 분명한 것은 김일성이 스탈린과 마오쩌둥(毛澤東)으로부터 남침 승인과 지원을 얻어내기 위해 ‘전격전’을 주장한 것과는 다른 행보였고 전쟁의 양상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는 점이다.

서울 영등포에 맥아더 장군이 한강 방어선을 시찰했다는 표지판이 세워져 있다.


● ‘서울 3일’이 미 지상군 파병 앞당겼다

북한군이 한강 이북에 머무르는 3일간 국군은 ‘시흥지구 전투사령부’를 설치하고 한강 이남에 수도사단, 2사단, 7사단 등 3개 사단을 배치해 시간을 벌었다. ‘북한군 서울 3일’ 기간 중인 6월 29일 맥아더 사령관이 도쿄에서 전용기 바탄호를 타고 수원 비행장에 내린 뒤 이승만과 만난 뒤 곧바로 한강 방어선까지 왔다.

북한군이 한강 북쪽에서 남쪽으로 120mm 박격포탄을 퍼붓는 가운데 맥아더는 영등포의 한 방어선 개인호에서 일등중사에게 묻는다.

“자네는 언제까지 그 호 속에 있을 셈인가?”

“철수 명령이 없었다. 명령이 내려지든가, 죽는 순간까지 참호를 지킨다. 맨주먹으로 싸우고 있다. 무기와 탄약을 달라”

맥아더는 도쿄로 돌아가 트루먼에게 미 지상군 2개 사단 파병을 요청했다. 트루먼 대통령은 7월 1일 일본 주둔 미 24사단을 긴급 투입했다. ‘북한 서울 3일’이 미 지상군의 신속한 파병에 도움이 됐다며 전사(戰史)에 전해지는 에피소드다.

1951년 5월 15일 자 미군 정보지에는 “(북한이 신속히 남하하지 않아) 낙동강 방어선을 뚫지 못한 데는 서울 점령 뒤 한강 도하를 지체한 것 때문”이라는 김일성의 탄식이 있다.

38선에서 서울까지는 약 45km. 국군의 산발적인 저 항속에 북한군은 하루 15km씩 진군해 3일 만에 서울을 점령했다. 서울에 머문 3일이면 7월 1일 수원, 7월 4일에는 조치원까지도 진격할 수 있었다. ‘북한군 서울 3일’은 남쪽으로의 진격이 며칠 늦어진 이상의 6·25 전쟁 전체의 양상을 바꾸는데도 영향을 미쳤다는 분석도 있다. 그래서 왜 3일을 한강 이북에서 머물렀는지 다양한 해석이 나온다.

북한군이 미아리고개를 넘자 1950년 6월 28일 새벽 폭약을 터뜨려 파괴한 한강 인도교


● ‘한강 다리 끊어져서 넘지 못했나’

북한군은 6월 27일 4시 창동 방어선, 28일 1시에는 미아리 방어선을 넘었다. 국군은 미리 설치해 둔 폭약을 터뜨려 28일 새벽 2시 반 한강 인도교와 경인 철교를 끊고 광진교는 4시에 폭파했다. 한강철교는 일부만 파손됐다. 북한군이 서울 중심을 점령하기 전 한강 다리가 끊어져 신속히 도하를 못 했다는 시각이 있다.

당시 한강은 수심 3m, 강폭 700〜1500m가량이었다. 북한군은 한강을 도하할 장비를 갖추지 못했다. 하지만 당시 한강에는 마포나루 등 6개 나루터에 크고 작은 배들이 있었다. 1개 소대 병력도 탈 수 있는 ‘늘배’라는 목재 운반선도 있었다. 길이가 12m가량이다.

한강에는 4개의 다리가 있었는데 광진교 한강 인도교 경인 철교는 파괴됐으나 한강철교는 일부 철로 레일과 침목만 손상됐다. 레일과 침목 교체는 수 시간이면 가능했다. 낮 공습을 피해 북한군은 야간 보수 작업을 거쳐 이틀 만에 철로를 보수해 3일 새벽 전차도 건너게 했다. 한강 이남에서 국군이 방어선을 펴고 있었지만 3일간 넘지 못할 만큼 강력한 저항이라고 보기 어렵다. 한강 이북의 주력 부대가 철수 명령을 받지 못하고 다리가 부서져 중장비, 차량, 곡사포와 박격포, 기관총 등을 대부분 버리고 한강을 넘어와 버렸기 때문이다.

김일성이 서울에 들어온 뒤 한강 다리 장악에 소홀한 것도 초기 작전의 실책으로 지적된다. 27일 서울로 진입한 105 전차여단은 한강 다리보다는 중앙청, 서대문형무소, 방송국, 신문사 등을 최우선으로 접수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백선엽 장군은 김일성이 3일 만에 서울을 점령한 기세대로 한강을 넘어 남진을 계속했다면 아주 불리했을 것인데 천행으로 김일성이 주춤거리고 말았다고 회고했다. (백선엽 1권, 294쪽)

● ‘서울만 점령하면 전쟁 끝으로 오판?’

‘북한군 서울 3일’의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 학계에서는 북한군의 ‘서울 제한점령론’도 제기됐다. 북한 인민군의 남침 목표가 서울을 점령하는 것에 제한됐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서울을 점령한 뒤 뭔가를 기다리며 지체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1994년 러시아 옐친 대통령이 김영삼 대통령에게 전달한 1949년 1월 〜 1953년 7월 소련 외교문서 중 김일성과 스탈린 간에 오간 서한에는 서울 제한점령에 관한 내용은 전혀 없었다. 박헌영은 마오쩌둥(毛澤東)과 스탈린을 만났을 때 “북한이 남침했을 때 20만 명이 봉기하고 남한 내 빨치산으로부터 큰 도움을 받을 것”이라고 말했다.

6·25 발발 당시 한국군이 보유한 8개 사단 중 4개 사단은 후방에 배치되어 있었다. 일부는 빨치산 토벌 임무를 맡았다. 하지만 1948년 10월 여순 사건 이후 빨치산 숫자는 2500여명까지 크게 줄었다가 그 후 다시 늘어나기도 했으나 대규모 소탕 작전으로 1950년 초에는 지리산의 빨치산이 대부분 토벌됐다. (KBS 역사스페셜 1999년 6월 22일). 북한군이 서울에서 머무르며 빨치산의 호응을 기다릴 상황이 아니었다.

7월 1일 스탈린은 북한 주재 대사 스티코프에게 보낸 전문에서 “조선사령부가 어떤 계획을 하고 있는지 전혀 통보하지 않고 있다. 스탈린은 남한을 빨리 ‘해방’시킬수록 미국이 참전 가능성이 작아진다고 생각했다.

1992년 8월 연합통신이 러시아 군 역사연구소 연구원으로부터 입수한 ‘조선인민군 제1 타격계획 작전지도’. 중부 전선의 북한군이 서울 남쪽에서 국군 퇴로를 차단한 뒤 포위 공격하는 작전이 표시되어 있다.


● 무산된 ‘수도권 포위 섬멸 작전’

‘북한군 서울 3일’ 미스터리를 풀기 위해서는 북한의 남침 구상을 볼 필요가 있다. 남침 개시 직전인 6월 22일 작성된 것으로 개전 후 북한군에게서 노획한 문서 ‘북한군 정보계획’에 따르면 남침은 3단계로 진행된다.

  • 1단계 방어선 돌파 및 주력 섬멸
  • 2단계 전과 확대 및 예비대 섬멸
  • 3단계 소탕작전 및 남해안 도달

핵심은 1단계로 서울을 점령한 주력군과 춘천 원주 등을 점령하고 국군의 후방으로 온 북한군이 수원 이북에서 한국군을 포위 섬멸하는 것이다. 그 후 남해안까지 3개 방향으로 진격한다. 이 작전이 성공하려면 북한군 1군단 등 주력 부대가 신속히 서울을 점령하고, 중부 전선의 북한 2사단과 7사단은 원주와 홍천을 점령한 뒤 남쪽 후방에서 한강 이남 지역을 봉쇄 포위해야 한다. 계획대로 진행돼 수도권에서 국군 주력을 섬멸하면 1개월 이내에 전쟁을 끝낼 수 있을 것으로 북한은 생각했다. 미국이 개입할 시간을 주지 않는 속전속결 전략이었다.

그런데 이같은 작전이 차질을 빚은 것은 작전상 주공(主攻)이 아닌 조공(助攻)을 맡은 중부 전선에서 발단이 됐다.

● 국군 6사단의 서전(瑞戰), 춘천 홍천 전투

북한은 서부전선에서 1군단 등 주력이 서울을 공략하는 동안 중부 전선인 춘천〜홍천에서는 조공 부대를 우회 남진시켜 수도권 국군의 퇴로를 차단하는 작전을 세웠다. 수도권 포위 섬멸 작전이다. 춘천 홍천 지구는 국군 제6사단(청성부대)이 맡고 있었는데 북한 정예 2군단을 맞아 선전하면서 계획은 틀어지기 시작했다. (남도현, 47쪽)

6사단이 춘천에서 사흘, 홍천에서 이틀을 버텨 30일까지 북한군을 저지한 뒤 전략적 후퇴를 하면서 북한군은 ‘수도권 섬멸 작전’에 투입되는 타이밍을 놓치게 됐다.

중부 전선으로 내려온 북한군은 2군단 예하 2사단과 12사단이었다. 6사단은 7연대가 옥산포, 19연대가 홍천 말고개에서 육탄돌격까지 감행하며 적의 자주포를 막아냈다. 사단의 제16포병대대는 춘천과 홍천을 오가며 맹활약했다.

춘천지구 전적기념관에 방문객이 사진을 찍을 수 있는 포토존이 마련되어 있다. 춘천=구자룡 기자 bonhong@donga.com


● 휴가도 줄이고 평소에도 철저한 훈련

6월 24일 0시 전군 비상경계령이 해제돼 25일 전방 부대의 외출 외박 휴가 장병이 많았다. 하지만 6사단은 전쟁 직전 귀순한 북한군 자주포 부대 병사가 ‘곧 북한군이 내려올 것’이라고 증언해 외출 외박을 제한하고 경계를 강화했다. 16포병 대대는 적의 예상 주요 접근로에 화력을 집중하는 연습을 반복했는데 실제 상황에서 그대로 적용해 부족한 장비에도 불구하고 큰 효과를 봤다.

북한군의 주공은 홍천의 12사단, 조공은 춘천의 2사단이었다. 먼저 제동이 걸린 것은 춘천이었다. 춘천의 국군 7연대는 1개월 전 고등학생과 주민들의 도움까지 받아 진지를 구축했다.

북한군 2사단은 개전 직후 지금은 수몰된 춘천의 첫 관문 모진교를 계획대로 돌파했다. 문제는 옥산포. 북한군이 집중 타격을 받은 옥산포는 논밭 평지로 이곳을 내려다보는 우두산 8부 능선에 참호를 파두었다. 심일 소위는 5명의 결사대와 함께 대전차포와 화염병, 수류탄으로 SU-76 자주포 2대를 파괴해 창군 이래 처음으로 태극무공훈장을 받았다.

북한군은 26일 16포병 대대가 평소 주 침공로로 예상하고 사격훈련을 해왔던 북한강 하천 부지로 내려와 포병대대의 포격 효율을 높였다. 포병대대의 집요하고 정교한 포격으로 북한군이 머리를 들지 못할 정도로 두려움을 느꼈다고 북한군 포로가 진술했다고 한다. 북한군 2사단은 이곳에서 50%가량의 전력 손실을 봤다. 7연대는 이틀간 옥산포를 지키다 소양교로 옮겨 춘천의 관문인 소양교에서 다시 격전을 벌였다. 소양교에는 지금도 총탄 자국이 남아있다.

춘천 전투에서 타격을 입자 홍천까지 내려갔던 주공 12사단의 2개 연대와 603모터싸이클 연대를 춘천으로 ‘회군’시켰다. 그러자 김종오 6사단장은 춘천의 7연대를 후퇴시키고 19연대와 16포병 대대도 홍천으로 이동시켰다.

춘천지구 전적비. 춘천=구자룡 기자 bonhong@donga.com


● ‘11명의 육탄 돌격대’

일부 부대를 춘천으로 보낸 12사단 역시 계획대로 홍천을 점령하지 못했다. 양구를 거쳐 홍천으로 향하던 북한군이 말고개에서 덜미를 잡힌 것이다.

이곳을 지키던 19연대의 11명 육탄돌격대는 굽은 지형을 이용해 숨어있다가 허리에 휴대한 대전차포를 발사하거나 SU-76 자주포에 뛰어올라 수류탄을 던지고 내려오기도 했다. 돌격대원 대부분이 희생됐다. 전투 현장에는 ‘11용사 육탄부대 전적비’가 세워졌다. 고갯길에서 길이 막혀 고립된 북한 12사단 병력은 춘천에서 내려온 16포병 대대가 집중 타격했다.

홍천 말고개 육탄용사 전적비. 군 부대내에 위치해 일반인들이 접근하기 쉽지 않다.
말고개 전투의 선전은 춘천에서 철수하던 7연대의 철수로를 확보하게 했다. 뿐만 아니라 25일 새벽 동해안으로 북한 766부대가 상륙해 후방이 차단됐던 국군 8사단이 태백산맥을 넘어 제천으로 안전하게 철수할 수 있게 했다. 6사단과 8사단이 전력을 보존한 것은 이후 전황에도 영향을 미쳤다.(남도현, 66쪽). 후퇴하면서 적의 진격을 저지하는 ‘지연 작전’에 가담하고 낙동강 방어선 전투에서도 맡은 역할을 수행했다.

춘천 홍천 전투에서 1개 연대급 손실을 입은 북한군은 2군단장, 2사단장을 전격 교체했다. 전쟁 초기 조치로서는 이례적으로 북한군 지도부도 큰 실책이라고 판단한 것을 보여준다.

6사단은 서부전선에서 서울이 점령되고 동부전선의 8사단도 후퇴하면서 6월 30일 충주로 이동했다. 북한군의 중부전선 주력을 5일간 저지한 뒤였다.

강원도 홍천의 말고개는 당시의 구불구불한 산길에서 왕복 6차로로 바뀌었다. 하지만 도로 우측의 낭떠러지는 여전했다. 육탄용사의 공격을 받은 북한 자주포가 언덕 아래로 굴러떨어지기도 했다. 홍천=구자룡 기자 bonhong@donga.com


● 북한군 3일 늦은 한강 도하 남진

춘천 홍천 전투에서 5일을 묶인 북한군 2사단과 뒤에 전투에 가세한 7사단이 양평에서 한강을 넘은 것이 7월 1일이었다. 이날 서울을 점령한 뒤 3일을 지체하고 있던 북한군 주력 3,4사단도 한강을 건넜다. 마치 중부 전선의 2군단이 오기를 기다려 함께 내려가는 모양새다.

북한군 2사단이 수원에 도착한 것은 7월 5일로 국군은 남쪽으로 후퇴해 전력을 보강한 뒤였다. 미군 제24사단은 7월 1일 투입돼 5일 오산까지 내려온 북한군과 죽미령에서 첫 교전을 하게 됐다. 춘천에서 시간을 지체한 북한군이 타이밍을 맞추지 못해 후퇴하는 국군을 차단하지 못했고 미군이 참전할 수 있는 시간을 벌어 주었다.(박태균, 192쪽)

<표> 국군 6사단과 북한군 2군단의 전력 및 인명 피해


국군
북한군
참가 부대
6사단 2연대, 7연대, 19연대, 제16포병대대
2군단 2사단, 5사단, 12사단, 제603모터싸이클 연대
병력 수
약 1만 명
약 3만5천명
주요 장비
57mm 대전차포
122mm 곡사포, 76mm 야포, 45mm 대전차포
전사상자
405명(사망 52명)
6천792명, 포로 122명
무기 장비 손실
박격포 16문, 57mm 대전자포 1문
SU-76 자주포 18문, BA-64 장갑차 2대, 45mm 대전차포 2문, 박격포 8문
춘천지구 전적기념관에 게시된 춘천 홍천 전투의 주요 지휘관들과 공적. 춘천=구자룡 기자 bonhong@donga.com


● ‘지연 작전’을 빛낸 한국군의 투혼

북한이 T-34 전차를 앞세워 부산까지 전격적으로 공격해 왔다면 미국의 참전을 곤란하게 했을 것이다. 그런데 북한군은 서울로 진격해 서울에서 3일 가량을 남진하지 않고 머물렀다. 북한은 부산으로 남진이 늦었을 뿐만 아니라 기뢰 부설, 공중 또는 해상 공격 등으로 부산항에 대한 미군의 접근을 저지하거나 지연시키지 않았다. 부산항을 점령하거나 고립시키지 않아 미군의 교두보가 되게 한 것은 공산측의 결정적인 실수로 지적된다.(손튼, 250쪽)

북한의 기습 남침 이후 국군은 물론 미군이 투입된 뒤에도 8월말 낙동강 방어선을 구축할 때까지 일방적으로 후퇴하면서 ‘지연 작전’을 폈다. 미 여성 종군기자 마거릿 히긴스는 ‘지연 작전’을 이렇게 풀이했다. “천안 조치원 금강 대전 영동 등에서 우리가 당한 패배를 지칭하는 용어이자, 한국에서 끔찍한 날들을 실제 목격한 사람 모두의 탄원이다.” 맥아더 장군은 공산주의자들이 개전 초기 몇 주 동안 머뭇거린 것이 그들의 가장 큰 실수라고 보았다. 미군이 북한을 과소평가한 것 만큼, 북한은 미군을 과대평가했다는 것이다.(히긴스, 98쪽)

초기 전투는 일방적인 후퇴였고 미군이 투입된 후에도 당분간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하지만 미군이 투입되기 전 중부 전선에서 6사단의 분투는 전세에 큰 영향을 미쳤다. 3년간 치러진 많은 전투들 중에서 춘천과 홍천 전투를 다시 돌아볼 이유가 여기에 있다.

국군 6사단과 김종오 사단장의 영욕

6·25 전쟁이 3년 가량 이어지면서 전쟁에 참가한 부대와 지휘관들은 숱한 전투 속에 승패가 엇갈리고 영욕이 교차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개전 초기 춘천 홍천의 중부전선을 담당한 국군 6사단이다. 미군은 군우리 전투의 참패와 지평리 전투에서 설욕한 육군 제2사단이다. 그야말로 지옥과 천당을 오가는 경험을 했다.

6사단은 개전 초기 춘천과 홍천 전투에서 북한군 2사단과 7사단을 맞아 사흘 이상 저지함으로써 서울 함락 이후 북한군 남진의 발목을 잡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6사단이 홍천에서 철수해서 후퇴한 것도 다른 전선이 밀리면서 불가피한 후퇴 작전이었다.

그런데다 후퇴해 가면서도 7월 5일∼8일 동락리 전투에서 큰 전과를 거둬 6사단 7연대의 연대장부터 사병까지 장병 전체가 1계급 특진하는 영광을 누렸다. 같은 시기 경기도 오산의 죽미령에서는 미국 24사단의 스미스 특임부대가 준비되지 않은 오만함으로 북한군에게 큰 타격을 받고 있던 때여서 더욱 대비가 됐다.

인천상륙작전 성공 이후 북진한 뒤 10월 26일 평안북도 초산에서 미군과 국군을 통틀어 처음 압록강에 도달한 것도 6사단의 한 특공수색대였다. 우리에게 익숙한 압록강에서 수통에 물을 받는 병사가 6사단 7연대 소속이다. 백선엽 장군은 이같은 6사단의 활약에는 다른 국군 사단이 갖추지 못한 장점이 있었다고 소개했다. 6사단이 주둔하고 있는 강원도의 영월 일대가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광산개발 붐이 일어 광석을 실어 나르는 중소형 트럭이 전국 어느 지역에 비해 많았다는 얘기다. 6사단은 전쟁 발발 뒤 그 광물회사의 트럭을 징용할 수 있어 기동력이 아주 탁월했다는 것이다. (백선엽 2권, 219쪽)

그런데 ‘압록강 수통’은 ‘북진 과속’의 큰 대가를 치렀다. 중공군이 들어와 기다리고 있다가 포위 공격을 해 연대장이 권총도 잃어버릴 정도로 혼비백산해서 후퇴해야 했다. 당시 미군과 국군 모두 압록강 진격 경쟁을 벌이는 상황에서 중공군 대부대를 맞은 것이지만 김종오 사단장으로서는 큰 작전상 실책으로 남게 됐다.

6사단 사단장이 김종오에서 장도영으로 바뀐 1951년 4월 22〜24일 사창리 전투에서 부대의 50% 가량을 잃는 괴멸적인 타격을 입게 됐다. 강원도 화천군 화악산과 사창리 일대에서 중공군 4개 사단과 벌인 방어 전투다. 중과부적의 상황이긴 했으나 방어선을 줄여 버티면서 아군의 화력 지원을 받는 전투를 벌이지 않고 사실상 전투를 포기한 데다 무질서한 도주로 피해가 컸다. 하지만 6사단은 5월에는 사단 단위로는 6·25 전쟁 최대의 성과로도 불리는 용문산 전투에서 승리한다. 장도영 사단장으로서도 개인적인 설욕의 기회가 됐다.

김종오 장군은 1952년 10월에는 백마고지 전투에서 9사단장으로서 큰 성과를 올려 초산 전투에서 패배를 되갚았다.


참고 문헌

  • 남도현 지음, 『6·25, 끝나지 않은 전쟁』, 플래닛미디어, 2010.
  • 리처드 손튼 지음, 권영근 권율 옮김, 『강대국 국제정치와 한반도』, 한국국방연구원, 2020.
  • 마거릿 히긴스 지음, 이현표 옮김, 『자유를 위한 희생』, 코러스, 2009.
  • 박태균 지음, 『한국전쟁』, 책과 함께, 2005.
  • 백선엽 지음, 유광종 정리, 『백선엽의 6·25 전쟁 징비록』 1〜2권. 2020.
  • 정일권 지음, 『전쟁과 휴전- 6·25 비록 정일권 회고록』, 동아일보사, 1986.


구자룡 기자 bonh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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