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린 날의 위로
어떤 그림 앞에서는 온통 나를 만난다. 대문 앞 계단에 쪼그리고 앉은 일곱살을 만난다. 붉게 스미는 노을이 슬픔이라는 걸 알아챈 열다섯을 만난다. 비가 적시는 게 세상만은 아니라는 걸 느끼는 스물하나를 만난다. 그림 속에 들어있는 심상이 온통 나라서 가만히 무릎이 꺾여 그 자리에 앉게 되는 그림, 하이경 작가의 그림이 그랬다. 보는 사람을 떠나온 곳으로 데려가는 그림. 마주하는 마음을 잊혀진 순간으로 데려가는 그림. 이런 그림 앞에선 속수무책이다. 다시 한없이 연약한 내가 눈 앞에.
하이경 작가의 그림을 책에 넣고 싶어서 얼굴도 모른채 부탁했었다. 푸른 바다를 앞에 놓고 나란히 앉은 사람들, 연인. 살면서 몇개의 바다와 사람을 지나왔다. 바다는 푸르고 뜨거웠고 파도는 투명하고 다정했다. 그렇게 사랑은 몇개의 이미지로 남았다. 그래서였을까. 그 그림을 책에 실었고 사랑에 대해 썼고 어쩌면 지나간 마음에 대한 애도같기도 했다. 돌이켜보면 나는 사랑에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 상처 받는 걸 두려워해 마음 전부를 주지 않았다. 늘 내가 중심이었고 그걸 감당하는 사람과 함께 했다.
경기도 광주 아트리에 갤러리로 가는 길, 마침 흐린 날이다. 하이경 작가의 개인전이 열리고 있다. 그녀의 그림 속에 자주 등장하는 흐린 날, 이런 날에 그림 앞에 서며는 심장 맨아래칸에서 누군가 툭 튀어나올 것 같다. 불현듯 묻고 싶어진다. 나는 당신에게 어떤 사람이었나요? 솔직히 자신 없어진다. 순간에 충실했으나 시간을 헌신하지 않았으므로. 지금 내가 외롭다면, 살면서 외로워진다면 그건 스스로 자초한 일이고 감당할 몫일 것이다. 그렇게 한 나의 선택에는 후회하지 않는다. 기꺼이 고독을 즐기리라. 깊어진 길의 끝, 아트리에 갤러리에 다다랐다.
하이경 작가는 그림보다 백배 밝은 사람이다. 바로 알아챘다. 명랑을 태도로 사는 분이군요. 삶이 마냥 재밌고 유쾌해서 웃는 사람은 없다. 어려움을 뚫고서 씨익, 미소를 날리는 것일테고, 고통을 이기고서 괜찮아, 고개를 끄덕이는 것일테다. 전시회에 펼쳐놓은 심연들이 그녀의 웃음을 더욱 깊고 맑게 만든다. 그녀의 그림들이 나 대신 눈물을 머금고, 당신 대신 다정하다. 그림 앞에서 연약한 우리를 마음껏 풀어놓아도 안전하다.
그랬다. 나는 언제나 불안한 게 힘들었다. 젊은 엄마가 어린 나를 붙잡고 너네들만 크면 엄만 미국으로 갈거야, 여기 삶은 지긋지긋해.. 말하곤 했는데, 그 말은 그대로 불안의 핵이 됐다. 불안할 때면 응접실에서 오래오래 그림을 봤다. 그림 속으로 시공간을 이동시켜 아주 거기 사는 날도 많았다. 그림 안에서 꿈과 사랑이 가득한 파란 나라를 보았고 공주 왕자의 행복한 결말만 상상했다. 훌쩍 성장하고서야 엄마의 넋두리였다는 걸 알았지만 마음 그늘은 오래갔다. 그래서였나. 하이경 작가의 그림을 보자마자 단번에 몰입됐다. 그녀도 생의 불안을 딛고 거기 서있는 것 같다고, 쓸쓸함을 안고 미소 짓는 것 같다고, 그림을 응시하며 제멋대로 동일시했던 것이다.
그리고 역시 통했다. 생을 무심한 시선으로 건너보며 고독을 즐긴다는 그녀. 비 오는 날 아침, 쏴아아 빗소리에 너무 행복하다는 하이경 작가는 밝은 얼굴 유쾌한 목소리로 고독과 침잠을 얘기했다. 그림 속 흐린 날들은 굳이 명랑하지 않아도 적당히 날씨 탓을 하며 본연의 나로 살 수 있는 시공간을 그린 것 아닐까. 집으로 돌아가는 길, 다시 비가 오기 시작했다. 비오는 날을 더 좋아하게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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