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원전→빚더미’에 전선 지중화 공사 줄인 한전… 지자체 신청도 ‘뚝’

세종=전준범 기자 2023. 6. 21.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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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선 땅에 묻으면 미관·안전 확보 가능하나
고비용에 전국 전선 지중화율 20.9% 불과
수십조원 적자 한전 빚더미에 속도 늦추니
지자체 요청도 2021년 176건→올해 10건
엘니뇨 오는 올여름…각종 사고 우려 커져

빚더미에 앉은 한국전력이 작년부터 전선 지중화(地中化·전선을 땅에 묻는 것) 예산 집행 규모를 축소했고, 이를 의식한 지방자치단체도 한전에 지중화 협조 요청을 크게 줄인 것으로 나타났다. 전선 지중화는 도시 미관과 시민 안전, 산불 예방 등을 위해 꼭 필요한 작업이지만 전신주 설치보다 9배 이상 비싸다. 한전은 전(前) 정부의 탈원전 정책으로 수십조원 적자가 쌓이자 재무 구조 정상화의 일환으로 지중화 속도를 늦췄다.

현재 우리나라의 전선 지중화율은 21%에 불과하다. 전국을 잇는 전선의 79%는 언제든지 국민 생명을 위협할 수 있는 ‘머리 위 시한폭탄’이란 의미다. 더구나 올여름은 엘니뇨(동태평양의 해수면 온도가 평년보다 높은 수준으로 수개월 이상 지속하는 현상)로 많은 비까지 예상돼 정부의 긴장감은 커지고 있다. 에너지 당국은 올해 장마철 전신주 사고 예방에 주력하겠다고 했다.

에너지 당국에 따르면 2022년 말 기준 전국 17개 시·도의 전선 지중화율은 평균 20.9%에 그친다. 사진은 서울의 한 주택 밀집 지역에 전선들이 복잡하게 엉킨 모습. / 뉴스1

◇ 44兆 적자 한전, 지중화 지출 10% 줄여

21일 정부에 따르면 한전은 2021년 1779억원이던 전선 지중화 관련 예산 집행 규모를 지난해 1619억원으로 9% 줄인 데 이어 올해 예산도 작년과 동일하게 1619억원으로 편성했다. 앞서 한전은 2019년 1481억원이던 지중화 예산 집행을 2020년 1555억원, 2021년 1779억원 등으로 꾸준히 늘린 바 있다. 하지만 2021년 5조8000억원이던 누적 적자가 순식간에 수십조원 규모로 커지자 지중화 속도를 늦출 수밖에 없었다.

전선 지중화는 에너지 당국과 지자체가 꾸준히 추진해온 사업이다. 미관상 좋고, 송전탑·전신주를 세울 때마다 인근 주민과 마찰을 각오해야 하는 불편을 없앨 수 있어서다. 무엇보다 안전사고가 줄어든다. 강원도소방본부에 따르면 올해 4월 강원 강릉에서 발생한 대형 산불은 강풍에 부러진 소나무가 인근 전신주를 덮친 게 원인이었다. 이때 고압 전선이 끊어지면서 시작된 산불이 축구장 530개 규모의 면적을 태웠다.

앞서 2018년 3월과 2019년 4월 고성·속초 등에서 발생한 산불 원인도 전신주였다. 산불 위험만 도사리는 게 아니다. 이달 15일 제주 서귀포시 동흥동의 한 교차로에서는 차량 2대, 오토바이 1대와 충돌한 덤프트럭이 전신주까지 들이받아 일대 860여가구가 정전 피해를 봤다. 이런 ‘시한폭탄’ 전신주가 전국 곳곳에 1012만기나 꽂혀있다. 전선 길이는 총 7178만c-㎞(서킷킬로미터‧회선수×길이)에 이른다.

그래픽=정서희

한전도 지중화의 필요성을 잘 알기에 해당 예산 집행을 매년 늘려왔다. 그러나 쌓여가는 빚더미 앞에선 버틸 재간이 없었다. 한전에 대규모 적자를 안긴 건 전력 구매가보다 판매가가 낮은 기형적 가격 구조다. 이는 문재인 정부가 탈원전 정책을 추진하면서 비싼 액화천연가스(LNG) 발전을 늘린 결과다. 문 정부는 전력 구매가가 올랐는데도 전기료를 임기 내내 억누르다가 정권 교체 직전인 작년 4월 딱 한 번 인상했다.

에너지 당국에 따르면 전선을 땅에 매설하는 지중화 비용은 전신주를 설치하는 가공선로 신설보다 9배 이상 비싸다. 산업통상자원부 관계자는 “전국 많은 지자체가 전선 지중화를 원하는데, 고비용과 오랜 공사 기간 등의 한계로 원래도 (지중화) 속도가 빠른 편은 아니었다”며 “지금은 한전마저 자금 동원력이 약해져 지중화 작업에 더 큰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했다.

◇ 엘니뇨 온다는데…지자체도 지중화 신청 눈치 보기

지자체도 눈치를 보며 전선 지중화 신청을 미루는 분위기다. 한전이 연말이면 50조원에 육박할 적자를 해소하고자 각종 사업 예산 절약에 몰두한다는 사실을 알아서다. 2021년 176건이던 지자체의 지중화 요청 건수는 지난해 65건, 올해 10건으로 급감했다. 통상 전선 지중화는 한전과 해당 지자체가 공사비를 50%씩 부담한다.

송전설비 고장의 37%는 여름철에 집중된다. 사진은 2022년 8월 31일 경기 부천시 원종동의 한 거리에서 전신주가 넘어진 모습. / 뉴스1

한전에 따르면 2022년 말 기준 전국 17개 시·도의 전선 지중화율은 평균 20.9%에 불과하다. 서울의 지중화율이 61.6%로 가장 높고 그 뒤를 대전(57.7%), 세종(46.7%), 인천(46.1%), 부산(44.6%), 광주(38.8%), 대구(36.2%), 경기(31.7%), 울산(29.2%), 제주(20.9%) 등이 따른다. 경남(12.9%)과 전북(12.6%), 충북(12.6%), 충남(12.2%), 강원(10.9%), 전남(9.4%), 경북(7.7%)의 지중화율은 전국 평균에도 못 미친다.

문제는 올해 여름 우리나라에 예년보다 더 많은 비가 쏟아질 수 있다는 점이다. 기상청은 지난달 발표한 ‘3개월(6~8월) 전망’에서 “엘니뇨 등의 영향으로 7월 중순부터 많은 비가 올 것”이라고 내다봤다. 기상청은 올여름에도 특정 지역에 비가 집중적으로 쏟아지는 국지성 폭우가 잦을 것으로 예상했다.

전력시장감시위원회의 ‘전력시장분석보고서’에 따르면 국내 송전설비 연간 고장건수의 37%가 여름철(6~8월)에 집중된다. 가장 큰 고장 원인은 장마철 낙뢰 등 자연재해(31.1%)다. 엘니뇨가 아니어도 여름이라는 계절 자체가 전국 도서 산간 곳곳에 거미줄처럼 엉킨 전깃줄과 전신주를 시한폭탄으로 돌변하게 할 수 있다는 의미다.

에너지 당국은 한전 재무 구조가 지금처럼 열악한 상태에서 전선 지중화 속도를 높이려면 전기요금 추가 상승이 불가피해 쉽지 않다는 입장이다. 한전 관계자는 “우선은 올여름 사고 예방을 위한 노후 전선 보수와 정비 활동에 총력을 기울이겠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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