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숲길] AI bing을 만난 날

권애숙 시인 2023. 6. 21. 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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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애숙 시인

이른 새벽 컴퓨터를 열자 전엔 없던 창이 하나 뜹니다. 초대하지도, 관심을 가져 불러보지도 않은 이름입니다. 어떻게 내 사이버세상 대문까지 와 닿았는지 알 수 없군요. 밤새 모 소프트사에서 배달해 놓았는지, 자동 업로드가 된 것인지 모르겠지만 그 이름으로 대화창이 뜨고 이용해 보라는 듯 예시 문장까지 몇 개 붙어 있습니다. 이것이 인공지능 AI인가보다 하며 ‘당신은 누구시죠?’ 물으니 준비해 둔 듯 금방 자신에 대한 얘기를 주루루 쏟아 내놓습니다.

‘사용자와 대화하고 정보를 제공하며 창의적인 콘텐츠를 생성하는 AI bing’이라고 자신을 소개하며 ’사용자의 언어를 이해하고, 의사소통할 수 있으며 사용자와 재미있고 유익한 대화를 나누고 싶다’고 까지 합니다. 구미가 당기는 답변입니다. 더구나 ‘자연어 처리, 딥러닝, 검색 엔진 등의 기술을 사용하여 만들어졌으며 계속해서 학습하고 발전’ 한다니 원하는 정보는 물론 언제 어디에서든 ‘도와줘, 빙’ 하면 짠, 나타나 친절한 벗이 되어 줄 것 같습니다. 어떤 질문에는 ‘검색 중…답변을 생성하는 중…’ 기다리게 하지만 이내 정리한 답을 올려주고 찾은 자료들의 주소들까지 친절하게 붙여놓습니다. 아마도 여기저기에서 찾아낸 많은 자료들을 취합해 가장 적합한 것들로 답을 만드는 것 같습니다. 사전보다 좀 더 다양하고 풍성한 답변을 만들어 알려주는 데까지 걸리는 시각이 순식간입니다. 번호까지 매겨가며 정리한 답변은 원자료를 찾아보지 않아도 될 것 같은 신뢰성마저 줍니다.

인공지능은 ‘인간의 학습능력 추론능력 지각능력을 인공적으로 구현하려는 컴퓨터 과학의 세부 분야 중 하나’라고 합니다. ‘기계가 경험을 통해 학습하고 새로운 입력 내용에 따라 기존 지식을 조정하며, 사람과 같은 방식으로 과제를 수행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기술’로 다양한 분야에 활용될 수 있다고 하니 총명한 매니저 하나를 둔 것 같겠습니다. 그러니 집에 쌓여 있는 묵은 사전들이며 책들이 별 쓸모가 없어지겠다는 것도 지나친 말은 아닙니다.

책은 이제 버려야 할 쓰레기가 된 지 오래라고 합니다. 출판사나 동네 서점, 동료 작가들이 하는 한결같은 얘기가 책이 팔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알고 싶거나 궁금한 것들은 이젠 한 몸인 듯 딱 붙이고 다니는 셀폰을 통해 언제 어디에서 무엇이든 찾아낼 수 있는데 굳이 책을 사 볼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기도 할 것입니다. 책장을 넘기며 페이지를 접거나 사로잡는 문장에 밑줄을 치며 행간에 빠져 행복해하는 것은 이제 구시대적 독서 풍경이 된 것일까요.

누가 SNS에 올려놓은 ‘인공지능과 시’에 대한 글을 봅니다. 인공지능이 만든 시에 사람이 언어를 좀 바꾸고 조금만 손을 보면 쉽게 시 한 편이 만들어진다고 합니다. 그런 시를 발표하게 되면 독자들이 찾아낼 수 있을까, 이러다 시인이 사라지는 것이 아닐까, 우려를 합니다. 인공지능이 쓴 시도 한 편 앉아 있습니다. 얘기하지 않으면 AI가 만든 시란 걸 모를 수도 있을 만큼 다양한 언어와 이미지를 입고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 냄새는 쉽게 가져오지 못한 듯합니다.

인간의 활동 중에 가장 창조적인 것이 예술과 문학이 아닐까요. 그 거침없는 상상의 산물을 과학은 걸음걸음 확인하고 증명하며 현실화 시켜 왔습니다. 그러고 보면 과학발전에 예술과 문학이 끼친 영향은 대충 들추어도 만만치 않습니다. 이제 그 과학의 산물인 인공지능이 예술과 문학을 합니다. 물론 인간의 지시나 요구에 의해 만들어지겠지만요. AI ‘시아(詩兒)’가 쓴 시집이 나왔다는 광고가 뜹니다. 어떨까 궁금하긴 합니다.


창작은 축적된 자료만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AI가 쓴 시에서 언어와 언어, 행과 행 사이 파르스름하게 번지는 핏줄이며 두근거리는 숨결 같은 생명성을 보고 듣고 느끼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AI시대에 사람이 서야 할 자리에 대해 걱정하고 우려하지만 결국 이 모든 걱정마저 기우가 되도록 다시 해결하는 것도 사람이리라 믿습니다. ‘여기 시가 있노라’ 생멸의 비의를 찾아 고뇌하는 시인은 천 년 전에도 있었듯 천 년 뒤에도 있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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