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국민음식 피시앤드칩스, 도버해협 건너온 유대인들이 시작

홍익희 전 세종대 교수 2023. 6. 20. 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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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익희의 新유대인 이야기] [63]
패스트푸드에 담긴 유대인들의 애환

포르투갈의 대표 음식은 ‘바칼라우(대구)’이다. 바칼라우는 365가지의 요리법이 있다고 할 정도로 요리법이 다양하다. 하지만 포르투갈 유대인들은 금요일이 되면 다양한 바칼라우 요리법을 마다하고 항상 바칼라우를 기름에 튀겨 먹었다. 왜 그랬을까?

유대인들은 율법상 안식일에는 일을 할 수 없고 불도 켤 수 없다. 그래서 안식일 전날인 금요일에 미리 안식일에 먹을 음식을 다 준비해 놓는다. 그래서 유대인 공동체에 하나의 전통이 생겼다. 금요일에 밀가루를 뿌린 바칼라우에 달걀물과 빵가루를 입혀 튀긴 다음 더운 날씨에 상하지 않도록 그 위에 식초나 레몬즙을 뿌려 놓았다가 안식일에 먹는 것이었다. 튀긴 바칼라우는 불에 다시 데우지 않아도 맛있었다. 맛있는 요리를 즐기면서 종교 규율 또한 지키는 기발한 해결책이었다.

1492년 스페인에서 쫓겨나 포르투갈로 이주했던 유대인들은 5년 뒤 포르투갈에서도 추방되어 이들 대부분이 몰려간 곳이 종교의 자유가 있는 네덜란드였다. 그 무렵 네덜란드 앞 북해에서는 청어가 많이 잡혔다. 당시에는 냉장고가 없던 시절이라 청어를 오래 보관하기 위해서는 소금에 염장하거나 식초에 절여두는 것이었다. 유대인들이 몰려들자 네덜란드에서도 대구를 기름에 튀긴 ‘키벨링(Kibbeling)’이 발달했다.

그 무렵 네덜란드의 절임 청어에 쓰는 소금은 암염이었다. 유대인들은 자기들이 살았던 스페인에서 싸고 질 좋은 천일염을 수입해 북부 독일 한자 상인들이 공급하는 암염을 대체하면서 소금 상권을 장악했다. 이 기세를 몰아 자연스레 절임 청어 산업도 유대인이 주도하게 된다. 그들은 절임 청어를 처리하는 데 ‘분업과 표준화’를 도입해 생산량을 획기적으로 늘렸다. 당시 1년에 140일이 넘는 가톨릭 육류 금식 기간에도 생선은 먹을 수 있어 유럽 전역에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청어잡이와 포경 산업이 호황을 누리다 보니 고기잡이배들이 많이 필요해 자연스레 조선업 발전으로 이어졌다. 조선업이 발전하다 보니 화물선 제작 능력도 좋아졌다. 16세기 중반부터 네덜란드 선박은 ‘경량화와 표준화’에 승부를 걸어 배의 크기를 키워 화물 적재량을 극대화했다.

그 무렵 네덜란드는 배 만드는 목재를 스칸디나비아반도에서 수입했는데 발트해의 통행세 부과 기준이 갑판의 넓이였다. 유대인들은 갑판을 좁게 만들고 화물칸은 배불뚝이로 만들어, 제작비와 함께 통행세도 절감했다. 또 그들은 돛대에 최초로 ‘복합 도르래’를 설치해 선원 수를 3분의 1로 줄였다. 이 배를 ‘플류트(Fluyt)선’이라 불렀다. 표준화로 건조 비용이 영국의 60%에 지나지 않았고 선박이 가벼워 속도도 빨랐다. 발트해에서 다른 나라 선박이 1번 왕복할 동안, 플류트선은 2번 왕복했다. 유대인들은 화물 운송비를 경쟁국 대비 3분의 1까지 낮추어 네덜란드가 16세기 후반에 북방 무역의 70%를 장악해 유럽 해운업계를 평정했다.

해운업의 발전은 네덜란드를 물류기지로 만들어 자연스레 중계무역 중심지가 되었다. 무역업의 발전은 이를 지원하는 금융업과 보험업의 발달을 가져왔다. 이 과정에서 자본주의 싹들이 네덜란드에서 피어났다. 유대인들이 주도해 1602년 근대 최초의 주식회사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1609년 중앙은행 모태 격인 ‘암스테르담은행’, 1611년 ‘증권거래소’가 탄생했다. 이후 유동성이 풍부해진 암스테르담은행은 신용 대출을 선보였고 2~3%대 저금리 대출을 시행했다. 이를 토대로 네덜란드는 해외 투자를 주도해 세계 무역 네트워크를 완성했다.

그 뒤 네덜란드 유대인들이 영국으로 이주하게 되는 역사적 사건이 두 번 발생하게 된다. 그 첫 번째는 1651년 발표된 크롬웰의 항해조례로 유럽 다른 나라들이 영국 및 영국 식민지와 무역하려면 반드시 영국 배만을 사용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한마디로 해운과 무역에서 네덜란드를 배제하겠다는 의도였다. 영국과 네덜란드 사이에 1차 전쟁이 벌어졌다. 3년여 전쟁 끝에 영국이 이겨 네덜란드 해안과 항구를 봉쇄했다. 위기에 몰린 네덜란드 유대 무역상들은 1656년 그들의 대표인 랍비 ‘마나세 벤 이스라엘’을 영국의 크롬웰에게 파견해 네덜란드 유대 무역상들의 비공식 영국 이주를 허가받았다. 이로써 해상 봉쇄로 갇혀있던 유대 무역상들이 먼저 도버해협을 건넜다. 곧 세계 무역 네트워크와 교역 경쟁력이 네덜란드에서 영국으로 이동한 것이다.

그 뒤 영국에서는 제임스 2세가 당시 국교인 성공회 대신 가톨릭을 옹호하고 전제정치를 펴자 혁명이 일어났다. 의회는 1688년 6월 네덜란드의 왕 빌럼 3세 부부에게 영국의 자유 수호를 위해 군대를 이끌고 오도록 초청했다. 빌럼 3세가 영국 공주의 아들로 외가 쪽으로 영국 왕실 혈통이었고, 그의 부인 메리 스튜어트가 제임스 2세의 딸로 영국 왕위 계승 서열 1위였다. 사실 빌럼 3세도 미리부터 영국 입성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해 11월 빌럼·메리 부부는 1700문의 대포를 탑재한 53척의 군함과 이를 뒤따르는 수백 척의 선박에 기마병 3000명, 보병 1만명을 이끌고 영국에 상륙했다. 그러자 영국 귀족과 지방 호족들도 잇달아 빌럼 진영에 가담했다. 1688년의 사건은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통치자를 교체했기 때문에 무혈혁명 곧 ‘명예혁명’이라 불린다.

이듬해 2월 빌럼(윌리엄) 부부는 의회가 제출한 ‘권리선언’을 승인한 다음 공동 왕위에 올랐다. 네덜란드의 통치자 빌럼 3세가 영국 왕 윌리엄 3세가 된 것이다. 윌리엄왕을 따라 영국으로 건너간 인원이 무장 병력을 포함하여 3만여 명이었다. 민간인 가운데 반 정도가 유대 금융인들로 세파르디 유대인(스페인계 유대인) 3000명과 아슈케나지 유대인(독일계 유대인) 5000명 등 유대 금융인 8000여 명이 이때 영국으로 옮겨 갔다.

유대인들이 이렇게 두 번에 걸쳐 네덜란드에서 영국으로 옮기면서 그들의 관습과 전통은 물론 그들의 음식을 가져왔다. 유대인들의 대구 튀김은 런던에서 인기 있는 길거리 음식이 되었다. 이후 동유럽에서 온 아슈케나지 유대인들이 19세기 영국에 감자튀김을 가져왔다. 그 무렵 영국에서 흉년이 들면서 빵값이 폭등하자 영국인들도 빵 대신 감자튀김을 먹었다.

그 뒤 생선 튀김과 감자튀김의 운명적 결합은 ‘조셉 말린(Joseph Malin)’이라는 유대인이 이루었다. 그는 두 가지 튀긴 음식을 결합해 1860년경에 세계 최초의 ‘피시앤드칩스(Fish & Chips)’ 가게 ‘말린스(Malin’s)’를 방직 공장이 몰려 있던 이스트 런던에 열었다. 피시앤드칩스는 테이크아웃이 가능한 최초의 영국식 패스트푸드로 신문지에 둘둘 말아 팔았다. 게다가 가격도 저렴했다. 피시앤드칩스를 싼 가격에 팔 수 있었던 이유는 산업혁명이 낳은 철도로 수산물 수송 속도가 빨라졌고, 면직물 발달로 면화씨를 이용한 저렴한 면실유가 풍부해졌기 때문이다.

이 음식이 노동자들 사이에서 인기가 높아지면서 영국 전역으로 번져 나가며 대중의 입맛을 사로잡았다. 2차 세계대전 중 영국은 배급제를 시행했는데, 배급제 영향을 받지 않는 식품이 생선과 감자였다. 피시앤드칩스는 전쟁 중 영국 국민들의 허기를 달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음식이었다. 이렇게 피시앤드칩스는 유대인들의 손에서 시작하여 영국 음식의 상징이 되었다.

[유대인들 방랑의 역사]

“가톨릭 교리 무너뜨린다” 스페인 국왕, 추방령 발표… 17만명 한꺼번에 쫓겨나

영국의 대표 음식 ‘피시앤드칩스’에는 유대인 방랑사의 애환이 깃들어져 있다. 피시앤드칩스 이야기는 안개가 자욱한 영국의 해안이 아니라 강한 햇살이 내리쬐는 스페인과 포르투갈에서 시작된다.

1492년 1월 2일 스페인 왕국의 이사벨 여왕과 페르난도 왕은 마지막 이슬람을 그라나다에서 몰아내고 석 달도 되지 않은 3월 31일에 유대인 추방령을 발표했다. 칙령에서 명시한 유대인들의 죄는 “신성한 가톨릭 교리와 신앙 깊은 교도들을 무너뜨리려 시도했다”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유대인 17만 명이 한꺼번에 추방당했다. 1480년 이래 종교재판을 피해 빠져나간 사람까지 합치면 26만명 이상의 유대인이 스페인을 떠났다.

스페인 영토에서 추방당한 유대인 17만명 가운데 10만명은 값을 지불하고 인근 포르투갈로 입국했다. 이후 포르투갈의 유대인이 안식일에 먹던 ‘바칼라우 튀김’이 유대인의 궤적을 따라 네덜란드로 건너가 ‘키벨링’이 되었으며 영국에서 ‘피시앤드칩스’로 자리 잡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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