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사 반성문의 존재 이유]① “5만원에 대신 써 드립니다”...감형 위해 대필까지

홍인석 기자 2023. 6. 19. 1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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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량 감형 노리는 가해자들 대상으로 대필업체 기승
장당 5만원, 성범죄는 웃돈 줘야
형량에 직접적인 영향 없다는 주장도
’n번방’ 조주빈, 100차례 넘는 반성문에도 징역 42년
지난해 5월 22일 새벽 부산 부산진구 서면 오피스텔 1층 복도에서 발생한 '부산 돌려차기' 사건과 관련해 가해 남성 A씨가 피해자를 발로 차고 있다./남언호 법률사무소 빈센트 변호사 제공
“저와 비슷한 ‘묻지마 범죄’의 죄명, 형량도 제각각인데 왜 저는 이리 많은 징역을 받아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전과가 많다는 이유라면 저는 그에 맞게 형집행을 다했습니다. 피해자분은 회복되고 있으며 1심 재판 때마다 방청객에 왔다고 변호사님에게 들었으며 너무나도 말도, 글도 잘 쓰는 것도 보면 솔직히 진단서, 소견서, 탄원서 하나로 ‘피해자’이기 때문에 다 들어줄 수밖에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부산 돌려차기' 사건 가해자 이모씨의 반성문 中

최근 화제가 되고 있는 ‘부산 돌려차기’ 사건 가해자의 반성문이다. 그렇지 않아도 가해자의 잔혹한 행동이 대중의 분노를 사고 있는 가운데, 일반에 공개된 가해자의 반성문은 활활 타오르는 불에 기름을 들이부은 격이었다. 진심이 느껴지지 않는 반성문 내용에 피해자는 “가슴이 무너져 내린다”고 토로했다. 피해자는 앞서 지난 2월 행정안전부 청원 웹사이트에 “(어떻게) ‘반성’이라는 추상적 개념을 감형 요소로 적용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 반성문을 없애고 (반성이) 감형 요소로 참작되지 않게 해 달라”며 호소한 바 있다.

반성문은 형사 사건 피고인들이 흔히들 사용하는 수법이다. 형량 감경에 도움이 된다는 인식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인식은 형법 제51조에 근거하고 있다. 이 조항에 따르면, 판사는 형을 정할 때 ‘범인의 연령, 성행, 지능과 환경, 피해자에 대한 관계, 범행의 동기 및 수단과 결과, 범행 후의 정황’을 참작해야 한다. 이중 반성문은 ‘범행 후의 정황’에 해당된다.

피고인들은 보통 범죄를 저지를 수밖에 없었던 이유와 재범 방지에 대한 약속 등을 반성문에 적는다. 이때 진정성을 강조하고 호소력을 높일수록 형량이 감해질 확률이 높아진다. 이런 이유로 변호사나 행정사가 반성문을 대필하는 건 물론, 알음알음으로 전문 대필 업체를 고용하는 일도 비일비재하다.

19일 조선비즈 취재에 따르면, 반성문 대필 비용은 범죄 유형과 경중에 따라 제각각이다. 사기·절도·폭행 등 형사 사건은 A4용지 1장 당 5만원을 받는 게 일반적이다. 성범죄의 경우 1장 당 7만~11만원을 낸다. 성범죄도 강간이냐 성추행이냐에 따라 비용이 세분화된다. 반성문 대필 업체는 변호사의 자문을 거친다는 점을 적극적으로 홍보하거나, 집안 환경 등 개인적인 내용을 충분히 반영해주겠다고 하거나, 최대한 신속하게 작성해준다는 점을 강조해 가해자들을 유혹한다.

하지만 반성문 대행이 성행하는 현실과 달리 반성문이 형량을 줄여준다는 보장은 없다. 형량을 정하는 것은 재판부의 주관적 참작 사유이고, 반성문 제출이 의무 사항도 아니다.

하채은 법무법인 에이파트 변호사는 “반성 여부 자체는 중요한 양형 자료이지만, 가해자가 피해에 대한 변제를 하고 반성문을 제출한 뒤 (피해자로부터) 처벌을 원치 않는다는 탄원서가 들어와야 의미가 있는 것”이라며 “단지 제목이 ‘반성문’인 서류를 제출했다고 감형 받을 수 있다는 얘기는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피해자와의 합의와 진심 어린 사과 등의 행동이 있어야만 반성문도 실효성이 있다는 얘기다.

오히려 대필 업체에 의뢰했다는 의심이 들거나 돌려차기 사건 가해자처럼 진정성 없는 반성문을 제출할 경우 역효과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

서울 지방법원의 한 판사는 “재판부는 반성문에 적힌 범죄 사실관계, 피고인의 가정 환경이나 생애, 피해 회복을 위한 노력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양형에 반영할지 여부를 판단하는데, 진정성 없는 반성문은 재범이나 보복 범죄 우려를 불식시키는 데 전혀 도움이 안 된다. 안 쓰느니만 못 하다”고 말했다.

실제로도 반성문을 제출하고도 중형을 선고 받은 사례는 빈번히 발생한다. ‘어금니 아빠’로 잘 알려진 중학생 성추행·살해범 이영학은 기소 후 반성문을 43차례나 쓴 것으로 알려졌다. 그중 14개는 1심 선고 전 제출됐지만, 1심 재판부에서는 법정 최고형인 사형을 선고했다. 반성문이 별 효과를 발휘하지 못한 것이다.

이른바 ‘N번방’ 사건 주범 조주빈 역시 재판 과정에서 100통이 넘는 반성문을 제출하고도 징역 42년을 선고 받았다. 조주빈은 법원에 반성문을 제출했을뿐 아니라 아버지가 대신 운영하는 블로그를 통해 상고이유서와 자필 사과문을 공개하기도 했다.

후배 조직원을 폭행하고 여성을 강제 추행 한 혐의로 기소된 프로야구 선수 출신 조직폭력배 A씨도 항소심에서 반성문을 5차례나 제출했지만 징역 2년 10개월이라는 원심이 유지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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