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동칼럼] 의료위기 부르는 기형적 의료체계

기자 2023. 6. 15. 03:05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 의료체계가 붕괴하고 있다. 대도시에서 받아주는 병원이 없어 응급환자가 거리를 떠돌다 사망하고, 소아 환자는 병원을 찾아 길게 줄을 선다. 인구 80만명이 넘는 청주시는 연봉 10억원으로도 의사를 구하지 못한다고 한다. 지난 수십년 동안 정부가 의사와 병원에 질질 끌려다니면서 만들어낸 의사와 병원에 유리한 정책들이 기묘하게 조합된, 기형적인 의료체계가 위기의 근인(根因)이다.

김윤 서울대 의대 교수·의료관리학

대한민국 의료체계를 왜 기형적이라고 할까? 첫째, 병상은 자유롭게 늘릴 수 있는데 의사는 늘리지 못한다. 미국은 의료 수요에 비해 병상이 부족하다는 근거가 있어야 병원을 허가해주고, 유럽은 수요에 맞춰 정부가 공공병원을 짓는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수요와 상관없이 병원이 원하면 자유롭게 병원을 지을 수 있게 허용하고 있다. 그 결과 병상 수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에 비해 3배나 많다. 병상이 늘면 의사도 늘려야 하지만 의사협회가 반대하니 18년째 의대 정원을 늘리지 못하고 있다. 병상을 늘리고 싶어 하는 병원과 의사를 늘리기 싫어하는 의사들의 이익이 합쳐져 병상은 넘쳐나는데 환자를 볼 의사가 없는 의료체계가 한계에 도달한 것이다.

둘째, 민간병원에 아무 곳에나 자유롭게 병원을 세우도록 해놓고, 정부는 의료 취약지에도 병원을 짓지 않는 것도 기형적이다. 민간에 병상 공급을 맡겨놓으니 대도시에는 큰 병원이 넘쳐나지만 소도시와 군지역에는 작은 병원만 넘쳐난다. 대학병원 의사들이 대도시를 벗어나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소도시와 군지역에 환자가 적어 큰 병원이 없다는 말은 근거 없는 탁상공론이다. 의사들은 자기 전공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는 큰 병원을 더 선호한다. 의사가 절대적으로 부족해지며 소도시와 군지역 의사들은 대도시로, 광역시 의사는 수도권으로 이동하면서 지방에선 24시간 365일 환자를 봐야 하는 응급·중환자 진료체계가 무너진다. 지방 의료체계가 붕괴하는 근본 원인은 병상 공급을 민간에 맡겨두고 시장 실패를 보완하기 위해 의료 취약지에 공공병원을 짓지 않는 정부에 있다.

셋째, 의사들이 자기 전공과 무관하게 자유롭게 진료 영역을 선택할 수 있게 한 것도 이상한 일이다. 선진국에서는 자기 전문과목의 환자만 진료하는 것이 당연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자기가 배우지 않은 과목의 환자를 진료하는 것을 넘어 아예 진료과목 간판을 바꿔달고 진료하는 의사가 적지 않다. 동네 의원 5개 중 1개는 자기 전문과목이 아닌 다른 진료과목을 걸고 진료를 한다. 외과 의사가 내과 간판을 걸고, 가정의학과 의사가 성형외과 간판을 걸고 진료한다. 의사들이 원하는 간판을 걸고 개원하는 무한한 자유를 누리는 반대편에선 환자들이 소아과 진료 대란과 ‘응급실 뺑뺑이’를 감수해야 한다. 예를 들어 소아 환자 수에 맞춰 전문의 100명을 배출했는데, 이 중 20명이 피부 미용을 하겠다고 하면 소아과 진료 대란은 피할 수 없다. 외과·흉부외과 의사가 내과 간판을 걸고 고혈압·당뇨병 환자를 보는 것도 문제이다. 혈압·혈당 관리가 제대로 안 돼 심장병·뇌졸중이 더 많이 생기고 결국 병원비도 더 들어간다. 이처럼 의사들이 누리는 무한한 진료의 자유는 의료 수요에 맞춰 전문과목별 전문의를 배출하는 의료체계를 무력화시키고, 분야별로 돌아가면서 ‘진료 대란’이 일어나게 만든다.

넷째, 병원이 진료능력에 관계없이 암, 심장병, 뇌졸중 환자를 자유롭게 볼 수 있는 것도 해괴한 일이다. 반드시 방사선 치료를 해야 하는 대장암 환자를 치료방사선과가 없는 대장항문병원에서 수술하고, 1년에 달랑 한두 명밖에 심장병·뇌졸중 환자를 보지 않아 진료의 질을 유지하기 어려운 병원도 아무런 규제를 받지 않는다. 심장병·뇌졸중 환자를 진료하는 병원 중 최소 환자 수 기준을 못 맞추는 병원이 50~70%에 달한다. 환자에 비해 병원이 많다 보니 의사가 분산되고, 의사가 분산되니 밤에 당직할 의사가 부족해진다. 심장병·뇌졸중 환자를 진료하는 병원은 넘쳐나는데, 정작 밤에 응급환자를 받아주는 병원이 없어 ‘응급실 뺑뺑이’가 생기는 역설적인 상황이 벌어진다. 급성심근경색 환자당 심혈관중재의사 수는 미국에 비해 우리나라가 3.8배 더 많다. 환자 수에 맞게 심장병 환자를 보는 병원을 지정했으면 심각한 대란은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국민과 환자를 중심에 두고 의료체계를 전면 개혁하지 않으면 지금의 의료위기는 해결되지 않을 것이다. 국민 중심 의료개혁을 하려면 국민이 참여하는 투명한 공론의 장에서 정책을 결정해야 한다. 의대 정원 증원을 정부와 의사가 밀실에서 협의해서는 의료체계 붕괴 위기를 결코 막을 수 없다.

김윤 서울대 의대 교수·의료관리학

Copyright © 경향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