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자 중독자의 최후

리빙센스 2023. 6. 13. 1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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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도훈의 집과 낭만 16

책을 사랑하는 남자의 인테리어는 어디로 향하나.

활자 중독자의 최후

나는 활자 중독자다. 나에게 쉰다는 것은 활자를 본다는 의미다. 뭐라도 봐야 한다. 책을 읽을 여유나 상황이 아니라면 스마트폰으로 뉴스라도 읽어야 한다. 혹은 페이스북에 새로 올라온 게시물이라도 확인해야 한다. 그래서 나는 여행 갈 때 책을 짊어지고 가는 재수 없는 인간이 됐다. 아니다. 나는 여행에 책을 가져가는 독자 여러분을 재수 없다고 말하려는 게 아니다. 이 잡지의 이 칼럼을 읽고 있는 독자라면 활자의 즐거움을 아는, 아주 재수 있는 사람일 게 틀림없다. 다만, 당신도 이미 겪었을 것이다. 여행에 책을 가져 간다는 이유만으로 아주 미묘하고 은밀하게 재수 없다는 표정을 짓는 사람들과 마주한 경험이 분명히 있을 것이다. 무시하라. 경멸하라. 그들은 활자의 즐거움을 모르는 딱하고 가엾은 사람들이다.

책이라는 게 꼭 바쁜 시간을 쪼개어 읽어야 하는 건 아니다. 같은 책이라도 서울의 탁한 공기에서 읽는 것과 태국 리조트의 습하지만 맑은 공기에서 읽는 것은 다르다. 여행지에 따라 어울리는 책이라는 것도 따로 있다. 천명관의 《고래》는 확실히 서울에서 읽어야 한다. 하루키의 책은 확실히 오키나와 혹은 일본의 느긋한 도시에서 읽어야 좋다. 휴양지를 갈 때는 오히려 손에 땀을 쥐게 만드는 장르 소설이 어울린다. 너무 느긋한 곳에서 너무 느긋한 책을 읽으려 시도하면 오히려 활자가 마구 공기 중으로 날아가는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이건 다 내 경험에 따른 여행지 독서법이니 꼭 따라 해야 할 필요는 없다. 참, 얼마 전 내가 《낯선 사람》이라는 책을 냈는데 이건 어디서 읽어도 잘 어울릴 것 같다. 귀한 지면에서 셀프 홍보라니, 참 나도 염치가 없는 인간이다.

어쨌거나 책을 좋아하는 당신은 책이 많을 것이다. 나도 책이 많다. 징그러울 정도로 책이 많다. 지난 아파트에 살 때는 책장이 책을 감당하지 못해 아예 책을 바닥에 쌓아 놓고 살았다. 한 3년을 계속 쌓아 두자 언젠가는 무너질 수밖에 없는 바벨탑이 됐다. 바닥에 깔린 책들이 각종 언어로 비명을 지르는 소리가 밤마다 들려왔다. 나는 비명을 무시하고 대신 바벨탑을 무너뜨리지 않는 기술을 익혔다. 책의 크기와 무게에 따라 마치 젠가처럼 책을 계속 쌓을 수 있는 기술을 획득했다. 사실 나는 이 바벨탑으로 친구들과 젠가 놀이를 할 수도 있었다. 그러지는 않았다. 무너지고 나면 어차피 다시 쌓아 야 할 탑이었다. 이사를 가지 않고서는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이사를 가면서 책의 절반을 버렸다. 아니, 팔았다. 알라딘 중고서점에 일괄적으로 팔아 치우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어떤 책을 간직하고 어떤 책을 버릴 것인가를 결정해야 했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면 세상에서 가장 버리기 힘든 것이 책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책을 정리하려고 하나씩 들춰보기 시작하자 며칠이 흘렀다. 어떤 책은 아직 다 읽지 않아서 버릴 수가 없었다. 어떤 책은 선물 받은 것이어서 버릴 수가 없었다. 어떤 책은 또 읽고 싶어질 것 같아서 버릴 수가 없었다. 어떤 책은 디자인이 예뻐서 버릴 수가 없었다. 어떤 책은 그 책을 산 시절의 기억이 남아 있어 버릴 수가 없었다. 한눈에 봐도 버릴 수 있을 것 같은 책은 잡지사에서 일하던 시절 대선 후보 관련 글을 쓰기 위해 샀던 대선 후보들의 에세이들밖에 없었다. 박근혜와 문재인과 안철수를 버리는 것은 딱히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그리고 내가 가진 책의 절반을 팔아 치우는 데는 거의 몇 달이 걸렸다.

새 아파트로 이사를 오자마자 가장 큰 방을 책방으로 정했다. 보통은 침실로 지정할 법할 방을 책방으로 만들고 출입문 바로 앞에 있는 가장 작은 방을 침실로 만들었다. 책장에 딱히 돈을 들이지는 않았다. 데스커에서 나오는 사무용 책장을 벽에 붙인 뒤 아무렇게나 책들을 쌓아 올렸다. 나름대로는 꽤 공을 들였다. 책을 읽기 위한 램프와 편안한 라운지체어를 들였다. 카펫을 깔았다. 나는 머릿속으로 상상했다. 이전 집처럼 책을 아무렇게나 거실과 책상 위와 하여간 보이는 곳곳에 두는 일은 없을 것이다. 책은 오로지 책방에만 있어야 한다. 책을 읽고 싶을 땐 거실의 소파를 떠나 책방의 라운지 체어에 앉아 교양 있고 바른 자세로 우아하게 책을 볼 것이다. 다짐했다.

다짐은 무너졌다. 바벨탑처럼 무너졌다. 나는 이사를 오고 나서도 계속 책을 샀다. 책이라는 것은 읽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다. 갖기 위해 사는 것이다. 이 글을 읽는, 알라딘과 예스24와 교보문고의 VIP 등급 독자라면 이 명제를 이미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우리는 어디선가 추천받은, 혹은 항상 기다리던 작가의 신간이 나오는 순간 온라인 서점에 접속한다. 반드시 그 책 하나만 주문하리라 맹세하며 접속한다. 맹세는 곧 파괴된다. 온라인 서점들의 '이 신간을 사지 않으면 당신은 진정한 독서가가 아니다!'라고 부르짖는 배너에 현혹되는 순간 장바구니의 책은 점점 늘어난다. 오프라인 서점이라면 책의 무게를 가늠하며 절약하는 행위가 가능하다. 교보문고 봉투 두 개를 가득 채워서 들고 다니는 일은 우리처럼 팔이 가늘고 나약한 독서광들에게는 도저히 가능한 일이 아니다. 온라인 서점은 활자의 국제우주정거장이다. 물리적 무게로부터 완벽하게 자유로운 세계다. 그래서 당신은 오늘도 평생 읽지 않을 것이 틀림없는 예쁘고 쓸모없는 책더미를 택배로 받은 뒤 후회하고야 마는 것이다.

나 역시 지난 몇 년간 끊임없이 책을 샀다. 읽기 위해서 샀다. 보기 위해서 샀다. 커피 테이블 위에 놓고 감상하기 위해서 샀다. 내 이름으로 된 책을 몇 권 내고 나자 출판사들이 보내주는 책의 양도 늘어나기 시작했다. "작가님◦◦ 작가님의 새로운 책이 나와서 보내드립니다"라는 메시지는 사실 "인스타그램에 올려서 홍보 좀 도와주세요"라는 의미에 가깝다. 친한 작가의 책은 어떻게든 빠르게 읽어내야만 한다. 그리고 인스타그램에 올려서 태그를 걸어야만 한다. 그것은 어쩔 도리 없는 친목적 행위다. 아니다. 나는 그런 행위가 싫다고 이야기하려는 것이 아니다. 책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공짜로 보내주는 책을 마다할 이유가 전혀 없다. 친한 작가의 책을 읽다가 오타를 찾아낸 뒤 출판사 직원에게 알려주는 건 나의 은밀한 취미 중 하나가 됐다.

다만 책이 많아지자 더는 책을 감당할 수가 없게 됐다. 책장은 이미 책을 토해내고 싶어 하는 표정이 됐다. 책장이 무슨 표정을 짓냐고? 짓는다. 책이 많아지면 책장의 선반들이 직선에서 곡선으로 묘하게 변하며 전혀 다른 표정으로 바뀐다. 데스커의 책장이 지나치게 약하게 만들어졌다고 불평하는 것은 아니다. 수백 년 된 마호가니 나무로 짠 책장이 아니라면 첩첩이 쌓아 올린 책을 감당하기란 불가능한 일이다. 그래서 책은 책방을 떠나 거실로 진출하기 시작했다. 침실로 진출하기 시작했다. 더는 늘어난 인구를 감당할 수 없어 우주 식민지로 떠나는 SF소설 속 인류처럼 다급하게 집 안 곳곳으로 진출하기 시작했다. 나는 끊임없이 저항했다. 거실로 진출한 책들을 다시 책방으로 가져가 책장 곳곳의 빈 곳에 쑤셔 넣었다. 그렇지 않으면 굳이 책방을 만든 이유가 없었다. 맥시멀리스트인 나에게는 책 말고도 지나치게 많은 물건이 있다. 물건들이 늘어나는 걸 막을 수 없다면 책이라도 정리하며 살아야 했다.

저항은 끝났다. 저항은 무의미했다. 이미 진출한 책들을 책방으로 돌려보내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건 나의 게으름 때문이기도 했다. 몸을 움직여 책방 라운지체어로 가서 독서를 하는 근면함 따위는 나의 DNA에는 없었다. 거실 소파에 누워 책을 읽고 침대에서 책을 읽는 즐거움과 안락함을 외면할 이유도 없었다. 나는 굴복했다. 집 안 곳곳으로 침입한 책들에게 무릎을 꿇었다. 사실 책이라는 건 우리가 집에 들일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오브제일 것이다. 책은 쌓아 두어도 지저분해 보이지 않는 유일한 오브제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그냥 책에 둘러싸여 사는 것을 선택했다. 공들여 만든 책방은 무슨 용도로 쓰냐고? 그 방은 고양이들의 공간이 됐다. 고양이들은 책 냄새를 좋아하는 모양이다. 그러니 이건 꽤 쓸 만한 거래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글쓴이 김도훈 (@closer21)

오랫동안 〈씨네21〉에서 영화기자로 일했고, 〈GEEK〉의 패션 디렉터와 〈허핑턴포스트〉 편집장을 거쳐 《이제 우리 낭만을 이야기합시다》라는 책을 썼다. 평생(?)에 걸쳐 수집한 물건들과 아름다운 물건들이 공존하는 그의 아파트는 이상하고 아름다운 김도훈 나라다.

CREDIT INFO

editor심효진

words김도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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