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학사로 보는 세상] 美 루이지애나 넘긴 이유는 '황열'...나폴레옹의 전쟁(3)

예병일 연세대원주의대 의학교육학과 교수 2023. 6. 13. 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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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독립전쟁. 위키미디어 제공

● 미국의 영토가 어느 날 갑자기 두 배로 넓어진 사연

1620년에 영국 청교도들이 종교의 자유를 찾아 미국으로 온지 약 한 세기 반 이상 현재의 미국은 영국의 식민지였다. 1667년에 영국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네덜란드는 자신이 먼저 도착한 맨하탄 섬을 영국에 양도하는 대신 영국이 먼저 점령하고 있던 인도네시아의 땅을 할양받았다. 

맨하탄 섬을 포함하는 지역 이름이 뉴암스테르담에서 영국지명 요크를 딴 뉴욕으로 바뀐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이미 스페인이 로마교황의 허락을 받아 아메리카대륙 전체를 자기네 것으로 생각했지만 스페인 사람들의 손길이 닿지 않은 현재의 미국 동북부 지역만큼은 영국 땅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1776년, 영국 식민지였던 미국이 독립을 선언했다. 세금을 내야 할 사람들이 독립을 선언하면서 세금을 못 내겠다고 했으니 영국  정부가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식민지를 지키려는 영국과 독립을 쟁취하려는 미국은 전쟁을 치러야 했다. 

1774년 제2차 대륙회의에서 대륙군 총사령관에 오른 워싱턴(George Washington)은 1776년 7월 4일 대륙회의로부터 독립선언서를 받아 읽었다. 미국이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한 것이다.

그로부터 약 5년간 미국은 나라의 명운을 건 전쟁 끝에 1781년 10월 요크타운 전투에서 워싱턴이 이끄는 미국군이 영국군을 물리치면서 미국독립전쟁이 끝났다. 1783년 파리조약이 체결된 후 워싱턴은 군 통수권을 반환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연합회의는 제헌의회를 구성했고, 워싱턴이 의장으로 선출되어 미합중국의 헌법을 만들었다. 그리고 이 헌법에 따라 초대 대통령 선거가 실시되어 1789년 2월 4일 워싱턴이 첫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워싱턴은 4년 후 두 번째 대통령에 올랐으나 임기 6개월을 남긴 1796년 9월 17일, 더 이상 대통령에 출마하지 않겠다는 발표를 했다. 인류역사상 민주적으로 선출된 첫 대통령이 평화적으로 자리를 넘겨준 것이다. 

1797년, 제2대 대통령 애덤스(John Adams)가 집권했고 1801년에는 재출마한 애덤스를 이긴 제퍼슨(Thomas Jefferson)이 3대 대통령에 올랐다. 그리고 2년 후, 나폴레옹은 오늘날의 루이지애나주가 아니라 ‘루이 임금님의 땅’이라는 뜻을 지닌 루이지애나(우표에서 1803이라 표시된 부분 전체) 땅을 11,250,000달러에 팔아 버렸다.

1803년에 루이지애나 땅을 구입한 것을 도안으로 하여 1904년 미국에서 발행한 우표. 오른쪽에 있는 미국이 중간에 있는 루이지애나 땅을 구입함으로써 영토가 두 배 정도 커졌다. 게티이미지뱅크 제공

이는 미국 역사상 가장 큰 토지거래 기록이며, 이로써 미국의 크기가 약 두 배로 늘어났다. 당시 프랑스가 루이지애나를 통치하기 위한 중심지였던 미시시피강 하구의 항구도시 뉴올리언스도 미국땅이 되었으며, 18세기 프랑스풍의 특이한 모습을 하고 있는 도심은 지금까지도 뉴올리언즈를 매력적인 관광지로 여기게 하고 있다. 
 

그런데 유럽에서 땅을 넓히기에 주력하던 나폴레옹은 왜 이 넓은 땅을 싼값에 판 것일까.

루이지애나 매입과 영토 확장. 위키미디어 제공

● 루이지애나 땅 주인의 변화

나폴레옹은 정복욕이 대단한 사람이었다. 프랑스 대혁명 후 혼란한 시기에 최고통치자 자리에 올랐으니 그걸로 만족할 만도 했지만 계속해서 옆 나라로 쳐들어갔을 정도였다. 그런 그가 이미 프랑스가 차지하고 있던 넓은 땅을 헐값에 포기했다니 얼른 생각해서는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이다.

1492년 콜럼부스가 카리브해에 있는 섬에 닿은 후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 섬은 인도가 아니라는 사실이 알려졌다. 1503년에 베스푸치(Americus Vesputius)가 그 때까지 유럽에 알려지지 않은 새로운 대륙임을 발표한 것이다. 그리하여 그 대륙의 이름은 발견자의 이름을 따서 아메리카가 되었다.

새로운 곳에서 경제적 이익을 얻고 싶어한 유럽인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아메리카로 몰려갔다. 유럽인들이 인도라 착각한 아메리카 대륙에는 그들이 인디언이라 부른 원주민들이 이미 곳곳에 터를 잡고 있었다. 일부는 아즈텍, 잉카, 마야 등의 큰 문명을 형성하고 있었지만 유럽인들은 새로운 땅을 차지하기 위해 인디언들을 정복해 갔다.

1683년 프랑스의 로베르 드 라살(Rene-Robert Cavelier de La Salle)이 자신이 지나간 지역을 ‘루이 14세의 땅’이라는 뜻으로 루이지앵이라 불렀다. 미국식 발음으로는 “루이지애나”였으므로 미국이 땅을 차지한 후에는 루이지애나라 불리기 시작했다. 

프랑스는 아메리카 대륙을 통치하기 위한 본거지를 아이티에 두었다. 여기서 배를 타고 루이지애나로 가려면 뉴올리언스에 배를 내렸으므로 뉴올리언스에 프랑스풍의 건물이 들어서게 되었다.

프랑스는 1756년부터 1763년 사이에 세계대전이라 할 만큼 많은 나라가 관여한 7년 전쟁에서 패배하면서 미시시피강 동부와 캐나다 퀘벡 북쪽은 영국에게 넘겨 주었고, 미시시피 강 서부의 루이지애나는 스페인에게 넘겨 주었다. 이로써 아메리카 대륙의 프랑스 영토는 카리브해 도서지역만 남게 되었다.

정복욕에 충만한 나폴레옹은 1800년에 스페인과 산 일데폰소 조약을 맺고 과거 루이지애나 땅을 되찾았다. 루이지애나의 주인이 바뀌자 미시시피강 유역의 농민들은 강을 건너려면 통행세를 내야 하는 등 불편함이 가중되었다. 미국 대통령 제퍼슨은 협상을 위해 사람을 보냈고, 예상치도 못하게 나폴레옹은 땅을 팔기로 결정한 것이다.

나폴레옹. 게티이미지뱅크 제공

● 나폴레옹이 땅을 팔다니

나폴레옹이 1800년에 스페인으로부터 땅을 인도받은 것에서도 볼 수 있듯이 나폴레옹도 루이지애나를 통치하는데 관심을 두고 있었다. 그러나 프랑스 식민지인 아이티에서 혁명이 일어나면서 상황이 바뀌기 시작했다.

또 유럽에서 영국 해군의 위력이 강했으므로 카리브해 식민지에 해군을 파견하기도 어려웠다. 또 루이지애나가 아무리 넓은땅이라 해도 탐사가 제대로 되지 않은 상태였으므로 뉴올리언스를 제외하면 당장 이익을 얻을 만한 것도 별로 없고, 유지비는 많이 드는 상태였다.

군사적으로는 가치가 있었지만 미국과는 좋은 관계를 유지했으므로 군사적 효용도 크지 않았다. 이미 상업적 이익을 위한 신대륙 개척에는 투기열풍이 거품으로 판명되는 일이 약 200년간 수시로 있는 일이었으므로 일부에서는 루이지애나를 혹이라 여기기도 했다.

나폴레옹이 스페인으로부터 되찾은 땅을 3년만에 팔기로 한 것은 유럽에 집중하기로 마음먹었기 때문이다. 당시 프랑스가 유럽에서 계속 전쟁을 벌이고 있었으므로 루이지애나를 판 것이 잘 한 일이라 평가하기도 한다.

실제로 땅을 팔지 않고 버틴 스페인은 필리핀, 쿠바 등 야금야금 미국에게 땅을 빼앗겨 갔다. 제퍼슨은 루이지애나를 팔겠다는 나폴레옹의 제안에 흔쾌히 응했고 이것으로 미국 땅은 약 2배 크기로 늘어났다. 

황열바이러스. 위키미디어 제공

● 루이지애나 땅을 미국에게 넘기게 된 이유는 황열 때문

프랑스가 1697년에 히스파니올라섬 서쪽(현재의 아이티)에 식민통치를 시작했을 때 이 섬 동쪽(현재의 도미니카)은 스페인이 차지하고 있었다. 18세기까지 프랑스는 노예를 이용한 설탕 농사를 통해 아메리카에서 가장 수익성이 좋은 설탕 생산국이 되었다. 1791년에 노예들이 반란을 일으키자 반란군, 프랑스군, 스페인군은 서로 섬을 장악하기 위해 싸워야 했다.

1798년 이후 프랑스는 노예들에게 약간의 자치권을 부여하면서 섬 전체를 장악하는데 성공했다. 프랑스는 아프리카 출신 노예의 아들인 루베르튀르(Francois Dominique Toussaint L'Ouverture)를 장군으로 승진시켰고, 그는 스페인과 영국의 침략을 막고 프랑스를 위해 싸우는 역할을 했다.

1801년에 루베르튀르는 스스로를 종신 총독이라 선언하고 나폴레옹에 대한 존경심을 보여주지 않았다. 이미 루이지애나 땅을 되찾으면서 아메리카 대륙에 대한 영향력을 키워가고자 한 나폴레옹은 그 해 말 르클레르(Charles Leclerc) 장군과 약 2만 명의 군대를 파견했다. 

1802년 1월 29일에 아이티섬에 상륙한 르클레르의 군대는 수차례 전투 끝에 섬을 장악하면서 루베르튀르가 지휘하는 반군과 싸우기 시작했다. 그러나 문제가 발생했다. 르클레르와 병사들에게 고열을 동반한 감염병이 유행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 감염병은 이집트 숲모기(Aedes aegypti)가 전파하는 바이러스에 의해 발생하는 황열이었다. 황열은 우리나라에서는 법정전염병으로 지정되어 있지만 바이러스를 전파하는 모기가 없으므로 외국여행을 가지 않는 이상 황열이 발생하지 않는다.

아프리카에서 온 노예에 의해 1500년대에 아메리카에 전파된 황열은 보통 감염 후 1주일 내에 증상이 나타나며, 고열, 심한 두통과 근육통, 황달 등의 증상이 나타나고 더 진행하면 정신 착란과 혼수 상태를 거쳐 사망에 이르기도 한다.

1802년에 아이티에서 나폴레옹의 군대를 강타한 황열은 이미 1878년에 미국의 100개 이상의 마을에 유행하면서 적어도 2만 명의 목숨을 앗아간 바 있다. 4월까지 프랑스의 진압작전이 수행되고 있었지만 전쟁에서 입은 피해보다 황열에 의한 피해가 더 컸다. 전체 병사의 3분의 1이상이 목숨을 잃었고, 여름이 되어도 황열은 사라지지 않고 있었다.

르클레르는 협상을 가장하여 루베르튀르를 체포하여 프랑스로 보내는데 성공했지만 루베르튀르가 1803년 감옥에서 사망하기에 앞서 1802년 11월 2일에 황열에 걸려 사망하고 말았다.

루베르튀르가 잡혀간 후에도 반란군이 전쟁을 계속할 수 있었던 것은 황열이 계속해서 프랑스군을 무찔렀기 때문이다. 르클레르의 뒤를 이은 호참보(Donatien-Marie-Joseph de Vimeur, vicomte de Rochambeau)는 계속되는 황열의 피해를 이겨내지 못한 채 1803년 11월에 항복하고 말았다.

이미 루이지애나를 미국에 넘긴 상황에서 아이티에서도 반란을 막지 못했으니 프랑스는 아메리카에서의 식민통치를 접고 철수하기로 했다. 프랑스로 돌아온 이는 약 3,000명이었지만 군인을 포함하여 약 5만 명의 프랑스인들이 황열로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실제로 지원군이 도착하기 전에 르클레르의 군대 약 2만 명은 수천 명만 생존한 상황이었다.

황열이 반란군들보다 프랑스인들에게 훨씬 큰 피해를 입힌 것은 프랑스군은 황열에 노출된 적이 없고, 반란군은 이미 그 지역에 유행하고 있던 황열에 노출된 적이 있었을 테니 면역력에 차이가 있었던 것이 큰 이유다. 마찬가지로 신대륙 정벌 과정에서 과거에 유럽에서 유행한 병이 인디언들에게 유행하는 경우 정복자들은 면역력을 가지고 있지만 면역력을 키우지 못한 인디언들은 훨씬 큰 피해를 입곤 했다.

나폴레옹의 루이지애나 매각으로 인해 미국영토는 전보다 2배로 넓어졌고, 아이티는 1804년에 아메리카 최초로 독립국이 되었다. 나폴레옹이 루이지애나 지역을 미국에 넘기고 아이티가 독립국이 된 것은 유럽에 힘을 집중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지만 이미 보유하고 있던 아메리카 지역 통치를 위해 군대를 보냈더니 황열에 의한 사망자들이 계속 늘어나고 있던 것도 큰 이유가 되었다. 

※ 참고문헌
1. The Louisiana Purchase: Why did Napoleon sell?
https://observer-reporter.com/columns/brucekauffmann/the-louisiana-purchase-why-did-napoleon-sell/article_25023e8c-6504-11e9-b7ed-ffeb1d55d61c.html
2. Robert K. D. Peterson, The Haitian Debacle: Yellow Fever and the Fate of the French. 몬타나 대학교 자료. https://www.montana.edu/historybug/napoleon/yellow-fever-haiti.html
3. 예병일. 전쟁의 판도를 바꾼 전염병. 살림. 2007 
4. Alan Schom. Napoleon Bonaparte: A Life. Harper, 1997

예병일 연세대원주의대 교수

※필자소개

예병일 연세대학교 의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 대학원에서 C형 간염바이러스를 연구하여 박사학위를 받았다. 미국 텍사스 대학교 사우스웨스턴 메디컬센터에서 전기생리학적 연구 방법을, 영국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의학의 역사를 공부했다. 연세대학교 원주의과대학에서 16년간 생화학교수로 일한 후 2014년부터 의학교육학으로 전공을 바꾸어 경쟁력 있는 학생을 양성하는 데 열중하고 있다. 평소 강연과 집필을 통해 의학과 과학이 결코 어려운 학문이 아니라 우리 곁에 있는 가까운 학문이자 융합적 사고가 필요한 학문임을 소개하는 데 관심을 가지고 있다. 주요 저서로 『감염병과 백신』,  『의학을 이끈 결정적 질문』, 『처음 만나는 소화의 세계』, 『의학사 노트』, 『전염병 치료제를 내가 만든다면』, 『내가 유전자를 고를 수 있다면』, 『의학, 인문으로 치유하다』, 『내 몸을 찾아 떠나는 의학사 여행』, 『이어령의 교과서 넘나들기: 의학편』, 『줄기세포로 나를 다시 만든다고?』, 『지못미 의예과』 등이 있다.

[예병일 연세대원주의대 의학교육학과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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