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 6월항쟁 불 댕긴 ‘광주 비디오’, 어떻게 나왔나

김용희 2023. 6. 11. 17:31
자동요약 기사 제목과 주요 문장을 기반으로 자동요약한 결과입니다.
전체 맥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본문 보기를 권장합니다.

"그때는 전두환이 정권을 잡은 마지막 해였어요. 대통령 임기가 끝나기 전에 무슨 짓을 했는지 알려줘야 할 필요성을 강하게 느꼈어요."

지난 9일 김양래(67) 5·18기념재단 전 이사는 광주영화영상인연대가 5·18민주화운동 43주년을 기념해 마련한 '광주 비디오의 숨은 제작자들' 공개 구술 행사에 참석해 이같이 말했다.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1987년 9월께 천주교 광주대교구 정의평화위원회가 제작하고 배포한 <오월 그날이 다시 오면> 영상.광주영화영상인연대 제공

“그때는 전두환이 정권을 잡은 마지막 해였어요. 대통령 임기가 끝나기 전에 무슨 짓을 했는지 알려줘야 할 필요성을 강하게 느꼈어요.”

지난 9일 김양래(67) 5·18기념재단 전 이사는 광주영화영상인연대가 5·18민주화운동 43주년을 기념해 마련한 ‘광주 비디오의 숨은 제작자들’ 공개 구술 행사에 참석해 이같이 말했다. 당시 천주교 광주대교구 정의평화위원회(광주 정평위) 간사였던 그는 임무택(68) 사진가, 홍세현(63) 광주 정평위 사무국장과 함께 1987년 <오월 그날이 다시오면> 사진첩과 ‘광주 비디오’ 영상 제작, 배포를 주도했다. 사진첩과 영상은 전두환 신군부의 폭력성을 전 국민에게 알리고, 6월항쟁에 불을 댕기는 구실을 했다.

김 전 이사는 “그 전에도 명동성당 청년회 등이 배포한 5·18 사진이나 영상은 떠돌았지만, 군부에서는 ‘북한이 만든 유언비어’라고 호도했다”며 “공신력 있는 기관의 이름으로 제작해 바로잡아야겠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지난 9일 김양래 전 5·18기념재단 상임이사와 임무택 사진가가 광주독립영화관에서 1987년 5·18 관련 사진첩과 영상 제작 배경을 이야기하고 있다. 김용희 기자

처음에는 사진전만 열 계획이었다고 한다. 5·18을 취재했던 대부분의 사진기자는 사진을 다 빼앗겼다며 외면했지만, 나경택 옛 <전남매일신문> 기자만 비밀리에 필름을 제공했다. 임무택, 고 김경래 사진가들이 인화를 맡았고 진보미술단체를 이끌던 홍성담 작가가 편집 등을 도왔다.

전국에 광주 학살을 알려야겠다고 생각한 김 전 이사 등은 흑백사진 170여장을 묶어 160여쪽 분량 사진집을 만들기로 했다. 사진집 이름은 노래 ‘오월’에서 따와 <오월 그날이 다시 오면>이라고 붙였다. 경찰 감시를 피하려고 서울 백병원 앞 한 인쇄소에서 2만5천권 분량을 30만원을 주고 인쇄했다. 가까스로 인쇄본을 광주로 가지고 왔지만 제본업체를 찾지 못했다.

김 전 이사는 “다들 피하니까 기계를 사서 직접 하기로 했다”며 “윤공희 대주교가 계시던 임동성당 지하에서 침대 매트리스로 방음해 놓고 중고 제본 기계로 홍 작가 후배 등 10여명과 만들었다”고 기억했다. 부산교구 박승원 신부에게 5천권, 명동성당 청년회에 1만5천권, 대구 등 전국으로 보냈다. 부산에서 열린 5·18 사진전에는 3만여명이 찾으며 부산가톨릭센터는 6월항쟁의 구심점으로 떠올랐다.

사진의 파급력을 본 광주 정평위는 영상도 만들기로 했다. 같은 해 7월 독일에서 유학하던 장용주(77) 신부가 외국인 선교사 외교행낭으로 힌츠페터의 ‘기로에 선 한국’ 등 외신 영상을 반입했던 터였다.

1987년 6월 부산가톨릭센터에서 열린 5·18민중항쟁 사진전을 보기 위해 부산 시민들이 입장하고 있다. 광주영화영상인연대 제공

임씨는 “처음엔 멋모르고 텔레비전으로 반입 영상을 틀고 비디오카메라로 찍어 편집하려고 했는데, 유럽과 한국은 주사(스캐닝) 방식이 달라 검은 줄이 찍혔다”며 “서울 세운상가의 업체를 통해 방송사 야간 당직자에게 뒷돈을 주고 영상을 변환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추가 촬영한 분량을 더해 사진첩과 같은 이름의 73분짜리 영상을 만들었다. 광주 정평위가 제작했다는 내용을 자막으로 넣고, 테이프 겉면에도 스티커를 붙였다. 외신 영상이 출처라는 것을 알리기 위해 일부러 독일말과 한국말이 번갈아가며 나오게 했다.

윤 대주교 등 사제들이 가지고 있던 기존 비디오기기 10대와 추가로 10대를 더 사서 하루에 100여개씩 복사해 배포했다. 김 전 이사는 무단 복제품이 길거리 수레에서 팔리는 것을 보고 영상 매체의 파급력이 크다는 사실을 새삼 느꼈다고 했다.

1987년 6월 천주교 광주대교구 정의평화위원회가 제작한 5·18 사진첩 <오월 그날이 다시 오면> 표지. 5·18기념재단 제공

김용희 기자 kimyh@hani.co.kr

Copyright © 한겨레신문사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