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품 사는 흙수저도 익명기부하는 부자도 속내는 보상에 있다

김슬기 기자(sblake@mk.co.kr) 2023. 6. 9. 1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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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컷에게 구애하기 위해
깃털 펼치는 공작새처럼
사람도 과시위해 사치품 사
느린연주 선호하는 거장
선착순을 중시하는 사람도
최고의 이익 얻기위한 것
실생활 속 게임이론 분석
게티이미지뱅크

500년 전 튜더 왕조 시절 영국 남성은 셔츠 전체를 덮는 재킷을 입었다. 일을 하지 않아 셔츠를 쉽게 깨끗한 상태로 관리할 수 있었던 신사들은 깃과 소맷부리를 술로 장식하기 시작했고, 재단사에게 재킷에 긴 틈을 만들라고 지시했다. 그들이 입은 흰 셔츠가 얼마나 눈부신지 타인이 쉽게 볼 수 있기 때문이었다. 셔츠가 더러워지기 쉬운 농부나 노동자와 자신을 분리할 수도 있었다. 블루칼라라는 말이 생긴 이유는 때와 기름 자국을 효과적으로 숨기기 위해 파란색 셔츠를 입어서였다. 말하자면 흰 셔츠는 남성에게 공작새의 '긴 꼬리' 역할을 한 셈이다. 긴 꼬리를 무기로 수컷들이 경쟁에서 비교 우위를 점하는 행동의 사례는 역사 속에서도 숱하게 많다. 고대 로마인은 모자이크와 도자기를 사랑했다. 페르시아인은 정원을 사랑했다. 한국과 중국, 일본은 도자기, 비단, 병풍에 집착했다. 21세기로 와도 슈프림 티셔츠에 수십만 원을 지불하고, 롤렉스 시계에 수천만 원을 쓴다. 인간은 실로 화려한 물건을 좋아한다.

살아 있는 것은 모두 게임을 한다 모시 호프먼·에레즈 요엘리 지음, 김태훈 옮김, 김영사 펴냄, 2만1000원

부를 과시하는 사치품의 인기가 직관적으로 옳다는 사실은 게임이론이 증명한다. 또 사치품 유행이 시작되고 끝나는 시기를 예측하는 데도 도움을 준다. '값비싼 신호' 게임은 마이클 스펜스와 아모츠 자하비가 개발했다. 두 선수가 있다고 가정하자. 한 명은 발신자(수컷 공작)로 값비싼 신호(긴 꼬리)를 보낸다. 다른 한 명은 수신자(암컷 공작)로 발신자를 받아들일지 거부할지(짝짓기) 선택한다. 수신자는 발신자의 유형을 알지 못하지만 암컷은 수컷이 신호를 보냈는지(꼬리가 얼마나 긴지)만 알 수 있다. 영화 '뷰티풀 마인드'로 알려진 존 내시가 개발한 '내시 균형'은 이 게임의 해법을 알려준다. 모든 수컷은 포식자와 기생충을 피하기는 어렵지만 건강한 수컷은 잘 피하므로 포식자의 위험이 덜하다. 고급 시계는 모두에게 돈 낭비에 불과하지만, 부자는 그 돈이 없어도 여전히 음식과 집을 살 수 있는 것과 동일한 논리다.

공작새뿐만 아니라 사람도 게임이론으로 움직인다. 이 책은 게임이론을 활용해 사소한 행동부터 조직의 의사결정, 유행과 트렌드, 환경문제, 전쟁과 국제 분쟁, 나아가서는 생물학적 영역의 번식과 진화에 이르기까지 세상의 메커니즘을 흥미롭게 분석한다. 경제학자 모시 호프먼과 에레즈 요엘리가 MIT와 하버드대에서 가장 인기 있는 게임이론 강의를 책에 담았다.

게임이론은 정부 간 협상, 기업 인수·합병, 무선 주파수 입찰 전략을 짜는 경영진 등에 매우 중요한 도구로 사용되곤 하지만, 실생활에도 큰 쓸모가 있다. 인간은 전략적으로 무지하기 때문이다. 게임이론의 일종인 '매·비둘기 게임'은 음식, 결혼, 특허와 같은 많은 자원을 둘러싼 대결을 설명해준다. 두 경쟁자가 하나는 매(공격) 전략, 하나는 비둘기(양보) 전략을 사용할 때 승자가 가져가는 몫은 상대의 전략에도 좌우된다. 내시 균형은 누구도 이득을 볼 수 없다면 둘 다 비둘기 전략을 사용해 타협에 이른다는 결론을 알려준다.

실제로 자연에서도 동물들이 먹이를 놓고 다툴 때 공생을 위한 타협을 선택하는 경우가 많다. 먼저 도착한 동물이 자원을 맹렬히 지키는 한편 두 번째 동물은 간을 보다 물러선다. 고참이 항상 승리하고 신참은 급히 후퇴한다. 매·비둘기 게임이 답을 준다. 싸움 비용이 자원을 나눌 때 기댓값보다 큰 경우 내시 균형에서 한 동물은 공격적으로 나서고, 다른 동물은 양보할 것으로 기대한다.

오리나 사슴과 마찬가지로 인간도 '누가 먼저 왔는지'를 기준으로 소유권을 판단한다. 영화관 좌석 팔걸이는 먼저 온 사람이 양쪽을 모두 사용할 가능성이 크다. 늦은 남자가 덩치가 커도 상관없다. 미국의 아메리칸 드림을 현실화한 1862년 홈스테드법도 이 비상관적 비대칭성의 반영이었다. 소유자가 없는 자산은 최초 사용자가 주인이 된다는 법을 통해 원주민을 쫓아내고 미국 서부가 개척됐다.

적자생존 세계에서 인간이 이타심을 발휘하는 것도, 익명으로 기부하는 것도, 하버드대 학위를 숨기는 겸손도 모두 게임이론이 설명해준다. 공작새가 꼬리를 뽐내는 것과 정반대의 선택이지만 자신을 감추는 것 자체가 값비싼 신호가 된다. 절박함이 없는 수컷을 암컷은 다른 구혼자가 있을지 모른다고 추측할 수 있어서다.

예술가의 경우 신호 감추기는 오히려 열성팬이 있을 만큼 뛰어나다는 사실을 과시하는 기능을 하기도 한다. 거장이 될수록 성숙해지고 은근하게 작품을 풀어내는 것도 입지가 확고해졌기에 신호를 감추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성공한 예술가는 상업적 성공보다 예술사나 미래 세대에 영향을 미쳐 유산을 남기고 싶어한다. 느리고 고요한 연주가 어렵다는 사실은 경험 많은 전문가만 안다.

책장을 넘길 때마다 수학 공식이 등장하는 난도가 있는 책이지만, 공작새부터 해적, 마피아, 어부와 목축업자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사례를 게임이론으로 설명해낸다. 성공한 슈퍼스타조차도 열정과 재능에 앞서, 내재적으로 이해한 게임이론의 승리 법칙을 따르고 있음을 알게 해준다.

[김슬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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