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고 싶은 길] 누운 곰의 배처럼 느긋한 곰배령 길

현경숙 2023. 6. 9. 0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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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이 함께 걸을 수 있는 명소
곰배령 정상. 작은 점봉산 봉우리가 보인다. [사진/백승렬 기자]

(인제=연합뉴스) 현경숙 기자 = "아빠, 그러면 곰이 쩍벌(팔 다리를 쩍 벌린 모양을 일컫는 신조어)하고 있다는 거야?". 레깅스를 입어 길고 곧은 다리가 돋보이는 20대 딸의 톡톡 튀는 듯한 목소리가 어깨 너머로 들렸다. "저 산꼭대기가 곰의 얼굴이고, 양옆 능선이 곰의 두 팔이고, 우리가 걷고 있는 이 길이 곰의 배에 해당하지". 곰배령 이름의 유래를 설명하는 50대 남성의 낮고 굵직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천상의 화원'으로 불리는 곰배령에서 마주친 가족은 그렇게 자연과 교감하고, 그것을 서로 나누고 있었다.

곰이 '쩍벌'을?

고갯마루에 펼쳐진 능선이 드러누운 곰의 배처럼 느긋하고 편안해 보인다고 해서 그 이름이 붙여진 곰배령은 가족과 함께 찾을 수 있는 대표적 명소이다. 산세가 험하지 않아 오르기가 그리 힘들지 않다. 설악산국립공원에 속해 있지만 암릉이 웅장하고 화려한 설악산과는 딴판인 부드럽고 아늑한 풍광을 선사한다.

산괴불주머니 군락[사진/백승렬 기자]

이른 봄부터 늦은 가을까지 수백 가지 들꽃이 지천으로 피어난다. 다양한 공간을 넘나드는 여행자를 자처한다면, 한반도를 구석구석 속살까지 눈으로 봐야 직성이 풀린다면 빼놓을 수 없는 탐방지로 꼽힌다. 이름만으로도 역마살을 자극하는 곰배령의 어원 풀이에는 물론 다른 버전도 있다. 한반도 지명들의 유래는 상상 밖으로 다양하다. 수 천 년 역사가 빚어낸 당연한 산물일 것이다.

해발 고도 1,164m인 곰배령은 한계령을 사이에 두고 설악산과 마주 보고 있는 점봉산(1,424m)에 있는 고개이다. 백두대간 서쪽 사면인 인제군 귀둔리에서 동쪽 사면인 인제군 강선리를 거쳐 동해안에 있는 양양으로 가기 위해 넘던 곳이다. 인제 산촌에서 생산된 특산물과 동해에서 나온 수산물을 번갈아 지고 나르던 옛 보부상들이 태백산맥을 넘기 위해 택했던 길 중 하나다.

울창한 활엽수림[사진/백승렬 기자]

'인류의 자연 유산' 점봉산

곰배령에 오르는 길은 두 갈래이다. 인제군 기린면 점봉산산림생태관리센터에서 시작하는 길이 하나다. 다른 하나는 인제군 귀둔리 설악산국립공원 점봉산 분소에서 출발한다. 두 길은 모두 엄격한 예약제에 따라 운영된다. 각각 산림청, 국립공원관리공단이 관리한다. 탐방로 운영 주체가 다르기 때문에 출발한 곳으로 회귀해야 하지 고개 넘어 반대쪽으로 하산하는 것은 금지된다.

점봉산은 한반도 자생식물의 북방한계선과 남방한계선이 맞닿는 곳이다. 자생종의 20%에 달하는 850여 종의 식물이 자라고 있어 국제기구 유네스코(UNESCO)가 1993년 생물권보전지역으로 지정했다. 한국에 있는 산림이지만 그 생물 다양성은 인류의 자연 유산이므로 미래 세대를 위해 보전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곰배령 정상에 오르면 곰의 머리에 해당한다는 작은점봉산(1,294m)이 손에 잡힐 듯 가깝다. 작은점봉산의 능선은 점봉산으로 이어지며 아득히 멀어지는데 경사가 가파르지 않아 달리고 싶은 본능을 일깨운다. 백두대간은 점봉에서 크게 굽이쳐 내리닫다가 설악으로 다시 솟구쳐 오른다.

탐방로 입구의 강선마을 산장[사진/백승렬 기자]

점봉과 설악 사이에는 남설악에서 가장 아름다운 골짜기인 주전골, 흘림골, 오색이 있을 것인데, 곰배령에 걸터앉은 산객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 대신 동서로 뻗은 설악산 능선에는 끝청(1,609m), 중청(1,664m), 대청(1,708m) 봉우리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중청에 있는 공군기지, 대피소의 윤곽도 뚜렷하다.

산림청이 운영하는 점봉산산림생태관리센터에서 시작하는 곰배령 산림생태탐방로는 약 10.5㎞이다. 걷는 데 4시간 이상 걸린 듯하다. 탐방로는 코스 1과 코스 2로 나눠지며, 코스 2는 하산 전용 길이다. 코스 1로 올라갔다가 코스 2로 내려온다면 다채로운 경치를 맛볼 수 있다. 코스 2에는 대청봉과 양양 앞바다가 보이는 전망대, 주목 군락지, 철쭉 군락지가 있다.

설악산국립공원 점봉산 분소에서 출발하는 곰배골탐방로는 편도 3.7㎞이다. 길이 좀 가파르지만, 물이 맑고 바람이 시원한 계곡을 가까이 끼고 걷는다. 산길을 걷는 맛이 좀 더 진하게 느껴진다. 골짜기가 좁아, 나뭇잎이 무성해지는 여름에는 길 위에서 하늘이 보이지 않을 것 같았다.

얼음골, '말 빠진 소(沼)' 등의 계곡 명소는 '멍때리기' 좋은 지점이었다. 이 길은 곰배령에 대한 관심이 커지자 국립공원공단이 2018년 정비해 개방했다.

태백산에서 가까운 금대봉과 함께 야생화 군락지로 유명한 곳이 곰배령이다. 하지만 이곳의 주인은 산을 빽빽이 채운 활엽수림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곰배령 숲은 극상림, 원시림에 해당한다. 숲의 천이 과정 중에서 생태계가 기후에 맞게 성숙하고 안정돼 마지막에 이른 단계를 극상림이라고 한다.

주목군락지[사진/백승렬 기자]

작은 면적의 잣나무 군락지, 주목 군락지를 제외하면 숲은 연초록 잎이 바람과 햇볕에 흔들리고 반짝이는 활엽수들로 향연을 벌이는 듯했다. 한국의 산림은 한국전쟁 때 불에 탄 뒤 조림한 곳이 많지만, 점봉산은 전화를 입지 않은 원시림이다. 이 때문에 산림청은 점봉산을 산림유전자원보호구역으로 지정해 관리하고 있다.

곰배령 정상에는 온대기후 극상림의 주종을 이루는 참나무 과에 속하는 신갈나무가 넓은 초지를 둘러싸며 밀림을 이루고 있었다. 산 아래는 봄꽃들이 한 차례 잔치를 벌인 뒤 여름꽃들에 자리를 내주고 있었지만, 정상에는 봄이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신갈나무들은 여전히 새잎이 돋지 않은 나목(裸木)이었다.

일 년 내내 들꽃이 피고 지는 '천상의 화원'

자세히 보면 예쁘고, 알게 되면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것들이 무수하지만, 작고 다소곳한 야생화야말로 소박한 아름다움의 대표일 것 같다. 설악산국립공원 점봉산 분소의 조병국 안전관리·구조 담당 주임의 길 안내를 받으며 풍성한 야생화 세계를 엿볼 수 있었다.

새 봄이 오면 2월 말부터 피는 노란색 복수초를 시작으로 너도바람꽃, 갈퀴현호색, 얼레지, 노루귀, 족도리풀, 홀아비바람꽃, 모데미풀, 개별꽃, 줄딸기, 괭이눈, 애기중의무릇, 동의나물, 피나물, 은방울꽃, 제비꽃, 양지꽃, 노랑제비꽃, 산괴불주머니, 삿갓나물, 는쟁이냉이, 애기똥풀, 한계령풀, 광대수염, 금낭화, 전호, 연영초, 천남성 등 수많은 들꽃이 차례로 산록을 수놓는다.

몽우리를 맺은 철쭉[사진/백승렬 기자]

봄에는 야생화를 관찰하기 좋다. 식물의 생육이 절정에 이르는 여름에는 더 많은 야생화가 피지만 짙은 녹음에 가려 눈에 잘 띄지 않는다. 얼레지는 봄꽃 중에서는 화려하고 꽃송이가 큰 편이다. 쉽게 알아볼 수 있어서인지 봄 야생화의 대표로 사랑받는다.

족도리풀 꽃은 큰 잎사귀 밑에 숨어 정말 자세히 보지 않으면 찾기 어렵다. 모데미풀은 한국에만 생육하는 특산식물이다. 한국에서 멸종하면 지구상에서 멸종한다는 뜻이므로 특별히 보호된다.

봄 야생화는 나물과 동의어에 가깝다. 추위를 이기고 돋은 들꽃의 연한 잎과 줄기는 대부분 영양이 풍부하고 맛이 좋기 때문이다. 곰배골 초입에서 만난 오미자, 고추나무, 당귀 잎은 모두 나물로 만들어 먹을 수 있는 것들이었다.

그러나 곰배령에서 산나물을 함부로 채취하는 것은 금물이다. 법으로도 금하고 있지만 동의나물, 피나물, 천남성, 미치광이풀, 삿갓나물 등 독초도 있기 때문이다.

고사목과 야생화[사진/백승렬 기자]

큰 유채꽃밭 같은 화원을 기대했다가 작고 가냘프거나 숨은 듯 잘 보이지 않는 들꽃에 실망하는 탐방객도 없지 않다.

조 주임은 "약간의 야생화 지식을 갖추고, 작은 꽃들을 들여다볼 마음의 준비를 하고 방문한다면 훨씬 흥미로운 탐방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곰배령 들꽃 개화의 절정기를 묻는 탐방객에게 그는 겨울 눈꽃을 포함해 수백 가지 야생화가 일 년 내내 피고 지기를 거듭하는 곳이 곰배령이라고 답한다.

※ 이 기사는 연합뉴스가 발행하는 월간 '연합이매진' 2023년 6월호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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