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훈의달 칠곡 유학산] 군복 입고 6·25 격전지를 오르다

조경훈 2023. 6. 5. 0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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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 다부동 전투의 격전지, 7.5km 산행
도봉사로 내려가는 가파른 길에는 데크계단이 설치되어 있다.
잘 닦인 유학산 등산로 초입. 나무 터널을 따라 유학산의 품속으로 들어간다.

"쾅! 쾅! 탕탕! 타타탕!"

포탄이 떨어져 땅이 울리고, 총알이 귓가를 스쳤다. 무서웠다. 전우들이 곳곳에서 쓰러졌지만 도망칠 수 없었다. 이곳은 칠곡 유학산 674고지. 더 이상 밀리면 나라를 잃는다는 마음뿐이었다. 몸을 숨긴 바위 맞은편에 총알이 박히는 것이 느껴졌다. 소대장의 "돌격!" 소리가 들렸다. 순간 '지금 나가면 죽을 수도 있겠구나'하는 생각이 스쳐지나갔으나, 몸이 먼저 반응했다. "돌격!" 외치며 총검을 들고 적에게 달려들었다.

다부동전적기념관장이 6·25전쟁 당시 총알이 박힌 바위라고 일러주었다. 아마 이 바위 뒤에 국군이 몸을 숨기고 웅크렸을 것이다. 이 장면을 상상하며 바위 뒤에 앉았는데, 그날의 포화가 순간적으로 머릿속에 그려졌다. 잠깐이었지만, 심장이 두근거리고, 몸이 떨렸다. 26세인 내 또래 혹은 나보다 더 어린 군인이었을 것이라 생각하자, 문득 눈물이 올라왔다. 잊을 수 없는 전쟁의 상흔, 다시 6월이었다.

"군복 입고 산행해 보겠습니다"

호국보훈의 달을 맞이해 특별한 산행을 기획했다. 6·25 격전지였던 산을 찾아가 호국영령들의 발자취를 따라 걸으며 그들을 기리고 싶었다. 기획안 제목은 '포화 속으로'. 나는 호국영령들이 목숨 걸고 싸웠던 그곳의 포화 속으로 들어가 보고 싶었다. 그들은 마지막으로 어떤 하늘을 보고, 어떤 땅을 밟았을까 궁금했다.

산행지를 고르기 위해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에 조언을 구했다. 그들은 경북 칠곡 유학산(839m)을 추천했다. 유학산은 6·25전쟁 3대 전투로 꼽히는 다부동전투가 벌어졌던 곳으로 많은 희생자가 나온 격전지였다. 군사지역이 아니라 일반인도 산행할 수 있는 곳이었다. 나는 유학산에서 일어났던 그날의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1950년의 6월의 유학산은 어땠을까. 아마 지금의 푸르름은 찾아보기 힘들었을 것이다.

대한민국을 지킨 반격의 '전투'

군복 산행을 위해 한국외대 산악부 박지민군과 함께했다. 칠곡 다부동전적기념관에서 신슬우 다부동전적 기념관장을 만났다.

"다부동 전투는 1950년 8월 1일에 시작해 9월 24일까지 55일간 이어졌어요. 한·미연합군과 북한군을 통틀어 사상자는 3만4,000명에 달했죠. 다부동전투는 대한민국을 지킨 전투라 할 수 있어요. 인천상륙작전을 비롯한 반격의 불씨는 여기서부터 시작됐습니다."

관장님은 유학산 취재에 도움이 될 만한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들려주었고, 우리는 그가 건네 준 자료를 가지고 유학산으로 향했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전적기념관에서 횡단보도를 건너자마자 유학산의 품속으로 들어갔다. 등산로는 잘 정비되어 있고, 경사도 완만했다. 1km를 지나서부터 조금씩 경사가 가팔라졌는데, 오르막은 674고지까지 이어졌다. 가벼웠던 발걸음은 조금씩 무거워지기 시작했다.

674고지 근처에서 발견한 바위. 포탄의 흔적으로 움푹 패였을 것이라 추측해 본다.
민둥산이었던 유학산은 오늘날 나무가 뒤덮인 푸른 산이 되었다.

조금이라도 쉬면 긴장이 풀릴 것 같았다. 그래서 우리는 674고지까지 쉬지 않고 가기로 했다. 이전과는 다른 목적으로 산에 올라서 그런 걸까? 지민군의 표정이 사뭇 진지해 보였고 평소보다 말이 없었다. 산행 내내 엄숙한 표정으로 묵묵히 걷던 지민군이 갑자기 의문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무언가를 노려봤다. 바위였다. 왜 그러냐고 묻자 그는 이렇게 답했다.

"형, 바위 모양이 부자연스럽지 않아? 마치 총알에 맞아서 떨어져나간 것 같아."

그의 말대로 바위는 총알을 맞은 것처럼 군데군데 움푹 파여 있었다. 관장님이 들려줬던 이야기가 생각났다.

"유학산에 오르다보면 총알이 박혔던 바위들을 볼 수 있을 거예요."

이게 그 바위일 거란 생각이 들었다. 전쟁의 상흔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바위에게 그날의 이야기를 물어보고 싶었지만, 바위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우리는 바위의 상처를 보고 당시를 상상해 볼 뿐이었다.

한 시간 정도 올랐을까. 평범했던 산길 사이로 한 안내판이 모습을 드러냈다.

'674 고지 탈환전'

안내판에는 이곳에서 벌어졌던 전투에 대한 간략한 소개가 적혀 있었다.

'10여 차례 주인이 바뀌었던 전투. 1950년 8월 22일, 육군 1사단 제11연대 3대대가 마침내 674고지를 최종 점령했다.'

유학산 남사면은 가파르다. 국군은 이런 경사를 몇 번이고 올라 고지를 탈환했다.

안내판이 세워진 고지는 그리 넓지 않았다. 성인 남성 3명이면 꽉 차는 폭이었다. 이렇게 좁은 고지를 점령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청춘들이 산화 했을까? 674고지 남서쪽 경사를 보며 그날의 전투를 상상했다.

674고지 남서쪽의 경사는 가팔랐다. 기록에 따르면 국군은 고지 점령을 위해 이 가파른 사면을 거슬러 올랐다. 고지 탈환을 위해 육탄전은 피할 수 없었다. 기관총과 박격포의 지원사격 아래 "돌격!"을 외치며 온몸을 내던졌을 병사들. 머리 위로 빗줄기처럼 쏟아지는 총알과 수류탄도 그들을 막을 수 없었다. 고지 위로 어렴풋이 보이는 한 병사의 뒷모습. 마침내 그들은 고지 탈환에 성공했다.

유학산 전경. 유학산 능선은 동서로 一자 모양으로 곧게 뻗어 있다.

고지 따라 이어진 피의 능선

'647-790-837고지' 일대는 능선으로 이어져 있었다. 다행히 능선길 경사는 이전보다 완만했다. 다만 몇 개의 봉우리를 넘어야 했는데, 오르내림이 심하지 않아 산행에 큰 무리가 되진 않았다.

790고지를 지날 때쯤 옆에서 이상한 소리가 났다. 누군가 풀을 헤치고 걷는 소리였다. 지민군이 "사람이신가요?"라고 소리를 질러보았지만 아무런 답이 없었다. 불안감이 엄습했다. 고개를 내밀어 그곳을 본 그 순간 거대한 멧돼지와 눈이 마주쳤다. 다행히 멧돼지는 사람이 있는 걸 확인하고 잠깐 우리 쪽을 바라보다 방향을 틀어 능선 아래로 내려갔다.

"휴…" 나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지민군은 멧돼지가 시야에서 사라지자 "호국영령들께서 우리를 보호해 주신 게 아닐까?"라고 했다. 나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무 아래 숨겨진 자잘한 바위를 오른다. 바위는 유학산의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을 것이다.
군복을 입고 이곳을 찾은 우리를 보고 호국영령들은 어떤 생각을 했을지 궁금했다.

837고지로 가는 길 옆으로 몇 개의 구덩이가 파여 있었다. 처음엔 자연적으로 파인 곳이라 생각했는데, 그러기엔 숫자가 꽤 많았고, 크기도 일정했다.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것 같았다. 가까이 가보니 가로, 세로 길이가 1m도 되지 않은 작은 구덩이였다. 그 위로는 낙엽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오래도록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았을 것이라 짐작했다.

"지민아, 저 구덩이 정체가 뭘까?"

"혹시 유해발굴 터 아닐까? 2000년부터 2013년까지 유학산에서 국군 유해가 123구 발견됐대. 그게 아니라면 오래된 참호일 수도 있어. 아직도 6·25 당시 쓰였던 참호의 흔적이 남아 있는 산들이 꽤 있대."

트인 조망을 볼 수 있는 소나무. 우리는 이곳에서 까마득한 남서면 절벽을 내려다보았다.

인터넷으로 찾아본 유해발굴 터의 모습은 우리 앞의 구덩이와 비슷했다. 이렇게 작은 구덩이에서 발견된 한 사람의 유해. 차가운 땅 속에 조용히 잊혀져갔던 사람들이 생각났다. 수십 년간 그곳에서 그들은 얼마나 외로웠을까. 햇빛 한 줌 닿지 않는 유학산 골짜기 곳곳에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지 못한 분들의 한 맺힌 영혼들을 달래주고 싶었다.

837고지로 가는 발걸음이 무거웠다. 마음 한 편이 꽉 막힌 것처럼 답답했다. 혹시라도 내가 밟고 가는 길 아래 누군가 묻혀 있지 않을까 조심스러웠다. 중간중간 조망이 트여 있었지만, 그닥 눈길이 가지 않았다. 우리는 땅만 보고 걸었다. 오늘은 산의 풍경보다는 산의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바스락. 바스락"

낙엽 밟는 소리가 우리를 에워쌌다. 비교적 선명하던 산길은 낙엽에 가려 잘 보이지 않았다. 방향을 잡지 못해 길을 헤맬 때쯤이면 저 멀리 등산로가 보였다. 그럴 때마다 민둥산이었던 과거의 유학산을 떠올렸다. 그때 이곳은 바스락거리는 낙엽소리보다 터벅거리는 군인들의 긴장되는 발걸음 소리와 고막을 찢는 듯한 포격 소리들로 가득했으리라.

포화 속으로 달려가던 그들을 상상한다. 소나무는 그날을 기억하고 있을까?
가장 조망이 좋은 신선대. 왜관으로 이어지는 79번국도가 한눈에 보인다.

외로웠을 젊은 영혼들을 생각하다

잠시 후 도착한 837고지. 이곳은 유학산의 또다른 격전지였다. 이곳에서 죽어간 병사는 674고지의 그들보다 더 많았을 것이라 추정된다. 안내판에는 837고지 탈환전에 대한 몇 가지 정보가 적혀 있었다.

'837고지는 유학산 전투에서 가장 치열한 격전지였고, 국군의 피해도 가장 컸다. 8번의 공격 끝에 8월 23일 837고지를 탈환할 수 있었다.'

이곳은 접근할 수 있는 능선이 서너 개에 불과했고, 그마저도 1개 분대가 겨우 산개할 수 있을 정도로 협소했다. 국군은 유학산의 지형 때문에 고지를 탈환하는 데 큰 어려움을 겪었다. 유학산은 북쪽이 완만하고 남쪽은 가파른 남고북저의 지형. 때문에 국군에게 유학산 남사면은 깎아지른 절벽으로 보였을 것이다. 거듭되는 실패와 차갑게 식어가는 동료들의 시체. 837고지는 피와 눈물로 물든 곳이었다. 우리는 조용히 눈을 감고 837고지에 잠든 영혼들을 위로했다.

 중간중간 낙옆으로 뒤덮은 길을 만났다.
도봉사로 내려가는 가파른 길에는 데크계단이 설치되어 있다.

837고지에서부터 유학산 정상까지 능선 위로 조그만 바위가 많았다. 남사면 쪽으로는 꽤 큰 암벽들도 산재해 있었다. 바위들은 거칠었지만 철계단이 있어 오르는 데 큰 문제가 없었다. 산불감시초소를 지나 유학산 정상까지는 완만하고 편안한 길이 이어졌다.

유학산 정상에는 정상석과 정자가 하나 있었다. 정자에 올라가면 구미와 대구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미세먼지가 많아 선명하게 보이진 않았지만, 왜 양측이 막대한 인명피해를 무릅쓰고라도 이곳을 점령하려 했는지 이해가 됐다. 유학산은 분명히 전략적으로 중요한 요충지였다. 1950년 유학산에도 오늘과 같이 선선한 바람이 불었을까? 내가 보고 있는 이 풍경을 차지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목숨들이 생명을 잃었을까? 마음속에 풀리지 않는 물음표를 채워넣고 유학산을 내려왔다.

다부동으로 돌아가는 길. 창문 너머로 일몰 빛에 물든 유학산 능선이 보였다. 6·25 전쟁 이후 민둥산이었던 유학산은 오늘날 생명이 가득한 푸른 산으로 변했다. 나무 그늘 아래 잠들어 있을 호국영령들을 생각했다. 희생의 의미에 대해 생각했다. 호국영령들의 희생은 대한민국의 미래를 싹 틔우는 하나의 씨앗이었고, 그 덕분에 지금의 푸른 대한민국이 있는 것이란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이것이 유학산이 내게 들려준 이야기였다.

호국영령들이 잠든 땅 위로 꽃들이 폈다.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기며 도봉사로 내려갔다.
도봉사 뒤로는 50m 높이의 깍아놓은 듯한 암벽이 있다.

산행길잡이

다부동전적기념관에서 산행을 시작한다. 횡단보도를 건너 유학산 방면 길로 들어서면 유학산 등산로 팻말이 나온다. 647고지까지는 길이 잘 정비돼 있어 헤맬 염려가 없다.

647고지 이후 능선길이 이어진다. 유학산 정상 방면으로 산행을 진행한다. 중간중간 낙엽 때문에 등산로가 희미한 구간이 있다. 하지만 곧 선명한 등산로가 나오니 크게 헤맬 염려는 없다.

837봉 이후 왼편으로 조망이 조금씩 트인다. 암벽들이 나타나며 자잘한 바윗길을 걸어야 하는데, 낙엽에 미끄러지지 않도록 주의한다 바위구간에는 철계단이 설치돼 있다.

유학산 정상부 못미처 나오는 갈림길. 이곳에서 왼쪽으로 내려가면 도봉사가 나온다. 쉰질바위를 보려면 이곳으로 가야 한다. 유학산 정상으로 가려면 진행방향을 따라가면 된다. 유학정 지나 도봉사로 내려가는 길이 연결되어 있다. 다만 해당 구간은 경사가 가파른 편이라 조심히 발을 디뎌야 한다. 도봉사를 가볍게 한 바퀴 둘러보고 팥재로 내려서면 된다. 유학산은 뛰어난 조망이 있는 산은 아니지만, 호국영령의 흔적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는 의미 있는 곳이다. 이곳에서는 봉두암산 혹은 숲데미산으로 연계산행이 가능하다.

교통

자차를 이용한다면 팥재나 다부동전적기념관에 주차하면 된다. 두 곳 모두 무료로 주차할 수 있다. 버스를 이용한다면 왜관북부터미널에서 34-1번 버스를 타고 팥재주차장에 하차하면 된다. 버스는 왜관북부정류장에서 하루 2회(10:20, 16:00) 출발한다. 택시를 이용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인데, 취재진처럼 팥재에서 산행을 마치면 택시를 잡는 게 어려울 수 있다. 미리 기사님과 약속을 잡는 것을 추천한다. 석적콜택시(054-977-8855)

맛집

산행이 끝나는 팥재에는 두 개의 카페가 있다. 엠비언트(0507-1492-3362), 정상 프로젝트(070-8844-5008). 이곳에는 식당이 없어 식사를 하려면 다부동마을로 이동해야 한다. 다부동에 있는 짜장나라(054-977-4296)에서 중식으로 가볍게 끼니를 해결할 수 있다. 산행 후 참숯불갈비(054-972-5088)에서 다양한 고기를 먹고 단백질을 보충하는 것도 좋은 선택이다.

등산지도

- 특별부록지도 참조

월간산 6월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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